작은 자에게, 작은 것 부터 (I) (마태복음 25장 31~46절) |
여러분, 만약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면, 저는 아마도 목사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죽음 뒤의 내세, 즉 영원한 세계가 없다면 목사인 저는 지금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심판이 있다고 겁까지 주는 사람이니 거짓말쟁이거나 사기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을 선포하셨고,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만약 천국도 영원한 세계도 심판도 없다면 예수님도 거짓말쟁이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강아지를 사오시거나, 어디서 강아지를 얻어 오셨을 때, 뚝딱뚝딱 개집을 지으셨습니다. 옆에서 아버지를 도와드렸던 저는 아버지께서 처음 구상하셨던 개집의 크기보다 항상 작품이 크게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아지는 아주 주먹만 한데, 아버지께서 지은 개집은 사람이 허리를 조금 숙이기만 해도 들어갈 수 있는 크고 넓은 저택을 지어주셨습니다. 아버님의 스케일이 크신 것인지, 아니면 규모 없는 건축을 하신 탓인지, 분명 시작할 때의 규모와 달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 집에 있는 개집에 대해 건축법을 위반하여 지었다고 벌금을 물리거나, 군청 건축과에서 나와 철거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개집은 준공 검사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집이나 건물은 반드시 설계대로 되었는지, 건축법에 맞게 건축이 되었는지, 불법 건축은 없는지를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라는 집을 다 지은 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삶이 하나님의 설계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냥 동물이라면 심판을 받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명령을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후 심판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이 있다면 심판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고, 심판이 없다면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최후 심판을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라, 심판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모두 우리가 잘 아는 비유들입니다. 1절부터 13절까지는 열 처녀 비유라고 부르는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 미련한 처녀 다섯 명과 슬기 있는 처녀 다섯 명은 각각 준비가 달랐고, 미련한 처녀들은 결국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니 인내로 준비하며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14절부터 30절까지는 달란트 비유라고 부르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신 재능과 여러 가지 책임과 일들을 청지기로서 잘 감당했는지를 결산하실 것과 그에 대한 상급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1절 이하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면, 마치 목자가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구분하듯이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른 편에 선 사람은 영생을 얻고,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고, 왼편에 선 사람은 저주받은 자로 부르면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 영벌에 처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양처럼 오른편에 서게 되고, 누가 염소처럼 왼편에 서게 된다고 말씀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초점은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32절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돌보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놀라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이 오른 편에 선다고 말씀합니다.
작은 자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누가 작은 자입니까?
본문 말씀을 보면, “내가 배고플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집이 없을 때 너희가 내게 방을 내주었고, 내가 떨고 있을 때 너희가 내게 옷을 주었고, 내가 병 들었을 때 너희가 내게 문병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내게 면회를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배고픈 자, 목마른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자, 감옥에 갇힌 자, 그들이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인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이들’을 이웃 사랑의 대상인 ‘이웃’으로 말씀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강도 만나 약탈당하고 실신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 곧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이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작은 자로 규정을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고통스럽게,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자기에게 이익이 발생하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뻗습니다. 그들에게 잘 해주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이익이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작은 자의 등을 쳐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작은 자에게 도움을 주고, 작은 자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힘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섬기는 사람, 남을 먼저 대접하는 사람, 십자가의 희생으로 사랑의 힘을 삼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사는 법,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사는 법입니다. 이것이 심판을 준비하며 사는 법입니다. 혼자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쏙 들어가려고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복음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작은 자를 돕고 사랑하라고 하실까요? 작은 자는 곧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40절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45절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한 것, 배고픈 사람에게 한 것, 목마른 사람에게 한 것, 헐벗은 사람에게, 나그네에게,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14장 31절 말씀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아직 회심하기 전,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핍박하고 박해할 때 살기가 등등 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자기가 대제사장에게 공문서를 만들어 가지고, 내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오고 박해할 테니 허락해 달라고 하여, 허락받아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은 다마스커스입니다. 지금 시리아 땅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가려면 거리도 거리이지만, 시간과 경비 등을 모두 자비로 하여 핍박하러 다녔으니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치었습니다. 사울은 말을 타고 가다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강한 주님의 임재 앞에 나가떨어진 것입니다. 사울은 엎드러져서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사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공격하거나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성령강림 사건을 체험한 후,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을 때,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핍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만약 사울이 예수님께 “내가 언제 당신을 박해하였다고 합니까? 나는 당신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한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는 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였고,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것 맞지? 그들을 박해한 것이 곧 나를 박해한 것이고,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 곧 나를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들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 곧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박해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당하셨고,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아시시 지방의 성 프란체스코가 어느 날 나병에 걸린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 때 프란체스코에게 마음속으로부터 솟구치는 어떤 충동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타고 가던 그가 말에서 내려서 그 거지에게 다가가 그를 안았답니다. 그때에 그 거지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로 변하였답니다. 작은 자가 곧 예수님이시라는 경험을 한 유명한 일화입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그의 삶과 작품 속에서 작은 자가 곧 예수님이시라는 진리에 크게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자로서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 그리고 인간이 겪고 있는 “수고, 갈등, 고통 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쓰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작은 자에게 베푼 사랑이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그때 네가 사랑을 베푼 그 사람이 나였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차별 없는 사랑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절 이하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사람이 값비싼 정장 차림을 하고 교회에 들어오고, 뒤이어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에게는 “사장님, 사모님, 여기 앉으십시오. 이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시하면서 “거기 그냥 서서 예배를 드리든지, 뒷자리나 저기 구석 자리에 가서 앉으시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를 차별하고 남을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일하신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 나라의 권리와 특권을 지닌 일등 시민이 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2장 13절 이하에,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하실 것이고,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에게 정말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냥 말로만 “밥 먹어라” “옷 입어라”라고만 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7절 이하에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며,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단순히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고, 상을 받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작은 자들에게 관심과 돌봄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선행으로 천국 간다는 내용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마땅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고, 사랑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올해 우리 교단 총회의 주제는 “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 벗 – 다시 희망이 되겠습니다.”입니다. 최근 한국교회가 양적 성장이 멈추어져 있고, 질적으로도 사회적 공신력을 크게 상실하여 쇠퇴일로의 총체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터넷 네티즌 중에는 안티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웃습니다. 그들의 비판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적이고,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 사회에 유익한 존재라기보다는 해로운 존재, 해로운 집단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고 반성해야 할 내용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행실을 다 했는데도 그런 비판을 들고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541년 제네바 시의회가 종교개혁자 칼뱅을 다시 초청했을 때, 제네바에 돌아 온 칼뱅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나를 다시 부르는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해 있는 범죄와 성적 방탕함을 청산하십시오. 내 생각에 ‘복음의 가장 큰 적들’은 교황도, 이단도, 유혹하는 자들도, 독재자도 아니고 ‘나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착한 행실이 없는 죽은 믿음이 무슨 쓸 데가 있겠습니까?”
착한 행실이 없는 믿음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라는 강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 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고, 선한 행실로 나타나고,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작은 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요셉도 작은 자였습니다. 종으로 팔려가고, 감옥에 수감된 죄수였습니다. 그런 그를 들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후에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전투를 위해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 정탐꾼을 숨겨준 사람이 기생 라합입니다.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정탐꾼들이 성공적인 정탐을 하고 돌아와 여리고 성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생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에 작은 자 라합이 사용되었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고, 남편과 사별한 과부였습니다. 그는 작은 자였지만, 보아스의 은혜를 입어 메시야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사무엘서 17장에 나오는 소년 다윗은 전쟁터에서 작은 자였습니다, 그는 병사로 징집되지도 않았고,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 싸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작은 자였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들 가운데는 작은 자가 많았습니다. 제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당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았고, 그는 나중에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세리, 창기,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기득권자들은 예수님보고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홀대 받고, 착취당하며 학대받는 사람들, 곧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즉 작은 자들을 택하시어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 교양 있다고 하는 사람들, 상류집안 사람들, 뛰어난 사람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허세를 폭로하시려고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왜 작은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을까요? 반대로 왜 큰 자, 가진 자, 높은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았고, 버릴 것이 많아서 그걸 비우고 버려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데, 자신을 작은 자라고 고백하고 작은 자가 되어야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하십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능력이 많고, 아무리 잘 났다고 하더라도 그가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멀리하십니다.
작은 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합니다. 솔직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 간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며, 작은 자를 들어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이 땅에서 작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도록 하십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큰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니까 심판이 있기까지 무엇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34절을 보면, 작은 자에게 관심과 돌봄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영원한 나라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34절에,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말씀 속에 엄청난, 놀라운,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아십니까?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이 왕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상속 받으라는 말은 왕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른 편에 구분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왕이 되어 나라를 상속 받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라는 데 별 감동이, 감격이, 놀라움이 없나 봅니다. 여러분은 그저 로또 복권 같은 것이 1등으로 당첨되어야 눈이 휘둥그레집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에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작은 자를 차별하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고, 사랑을 베풀며 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왕이 된다니 이것이 바로 엄청난, 놀라운, 충격적인 내용이 아닙니까? 구원받는 것도 큰 은혜인데 왕이 된다니 놀라운 은혜 아닙니까?
그러므로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은 천국에서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이 왕이 될 수업을 하는 것입니다. 왕자가, 공주가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서 수업을 하듯이,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왕으로써 수업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 말씀에서 양으로 비유되는 사람은 왕위 수업을 충실히 실천한 사람들이고, 염소로 비유되는 사람은 왕위 수업을 하지 않고 매일 딴 짓, 백성들을 돌보는 노력을 하지 않아 마귀와 그 졸개들과 함께 영원한 불구덩이에 던져져 영벌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깨닫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작은 자들을 돌보고 사랑을 베풀어 왕 수업을 잘 마치고 훌륭한 왕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는 금년에 창립 60주년을 맞습니다. 금년 목회 표어를 “작은이에게! 작은 것부터!”로 정하여 우리의 신앙이 실천적인 신앙이 되고,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더 구체적으로 확대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우리 교단 총회는 가난한 이들, 다음세대, 장애인, 다문화가족, 북한 동포까지도 작은이로 규정하였습니다. 우리 자신도 작은 자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작은 자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 나라에서 왕이 될 사람들입니다.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며, 사랑을 베풀어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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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1월 06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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