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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  [4002]
· 설교 일자 : 2013년 02월 17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6장 1-13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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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 (요한복음 6장 1-13절)
  지난 14일 목요일 아침 라디오 기독교방송의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85세 된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방송을 하였습니다. 지상은 할머니입니다. 그분은 이번에 서울 마포에 있는 일성여자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분은 왜 82세에 중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돌아가신 남편의 일기장을 읽고 싶어서 랍니다. 돌아가신 영감님은 대학원까지 나오신 분인데, 일기를 영어로 썼답니다. 그래서 그 일기에 도대체 뭐라고 썼는지를 읽고 싶어서 중학교에 입학을 했답니다. 무려 70살이나 차이가 나는, 손녀도 증손녀같은, 여중생들하고 같이 학교를 다녔고, 마침내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현정 앵커가 그래서 이제 남편의 영어로 쓴 일기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영감이 영어를 필기체로 써서 고등학교에 또 가야 알 수 있겠다고 합니다.
  지상은 할머니에게 있어서 돌아가신 남편의 일기를 읽고 싶었지만 읽을 수 없는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일기를 눈으로 그냥 볼 수는 있지만 읽을 수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물론 자식들이나 영어 실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남편의 일기장을 읽고 해석해 달라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기보다 자신의 남편의 일기를 아내로써 자신이 직접 읽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영어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80이 훌쩍 넘은 나이에 도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문제를 풀면 또 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문제를 만난 사람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배고픔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결핍의 문제, 질병의 문제, 고통의 문제, 관계의 문제,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까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의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서 그 문제 자체만을 해결하시지 않고, 항상 그 문제와 함께 더 중요한 그 무엇을 가르치셨고, 깨닫게 하셨고, 훈련하셨습니다. 문제 뒤의 하나님의 목적을, 문제 속에 하나님의 뜻을, 문제속의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루어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에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본문만 빼놓고 다른 말씀에는 “때가 저물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이 아침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예수님은 무리들 중에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주셨습니다.  천국 복음도 가르치셨습니다. 바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수많은 무리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 수는 그냥 ‘오천 명’이라고 하지 않고,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인 무리의 수는 최소한 일만 명이 넘으면 넘었지 일만 명보다 적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무리들에게 배고픔, 굶주림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쫄쫄 굶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무리들을 위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기도하셨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합쳐 일 만 명이 넘는 무리들이 배불리 다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무리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들어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곳을 떠나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소문이 쫙 났습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 예수님을 찾아서 몰려갔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흥분을 했겠지요. 이제는 배부르게 해 줄 수 있는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그 분을 왕으로 삼으면 매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행한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들 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배고픔의 문제, 굶주림의 문제, 양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은 무리들에게 가르치고 깨닫고 믿게 하려고 하셨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단순히 음식을 제공하는 기적을 행하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도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또 기적을 행하시기를 기대하고 찾아온 무리들에게 썩을 양식만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하는데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서 영혼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무리들에게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혼의 배고픔, 영혼의 양식,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예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여 영혼의 배고픔, 영혼의 갈증, 영혼의 굶주림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영혼의 만족, 영혼의 평안, 영혼의 충만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영적인 생활임을 가르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되 이 땅의 것들만을 위해 믿는 것은 온전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물질적인 것, 현세적인 것만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갈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님께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무엇을 듣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무엇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영혼이 목마른 사람은 목말라 해야 합니다. 영혼이 굶주린 사람은 배고파해야 합니다. 영혼이 메마른 사람은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영혼을 위해 갈망해야 합니다. 구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영적 상태가 건강하지 못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밥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는 사람이 있지요? 왜 그렇게 먹느냐고 물으면 입맛이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입맛 없으면 밥맛으로 먹으면 되지.” 그렇습니다. 밥맛없으면 입맛으로 먹으면 되고, 입맛 없으면 밥맛으로 먹으면 됩니다. 삶의 의욕이 있으면, 입맛도 없고 밥맛도 없어도 살기 위해서 밥을 약처럼 먹습니다. 밥이 입안에서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아도 살아야 하니까, 밥 먹고 움직여야 하니까, 밥 먹고 내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밥을 씹어 삼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면 몸 안에 기운이 돌고, 몸의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고, 건강이 좋아지면서 입맛이 돕니다. 밥맛이 좋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밥을 젓가락으로 세듯이 먹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먹어서는 영적으로 소화나 될까? 그렇게 먹어서 영적인 영양분이 공급이나 될까? 그렇게 먹어서는 영적인 힘이나 쓸 수 있을까? 그렇게 먹어서는 영적으로 건강하게 잘살 수나 있을까? 영적인 면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의 영적인 상태로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자각과 영적으로 새로워지려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기독교방송 김현정의 뉴스쇼의 김현정 앵커가 지상은 할머니에게, 학교 다닐 때 다른 여학생들과 똑같이 다녔느냐고. 다른 사람들이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도시락을 꼭 싸가지고 다녔고, 똑같이 시험도 치고, 똑같이 다녔다고 합니다. 개근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망정 나는 자신이 있어요. 공부하는 것이니까.”라고 대답하시더군요. 그분은 배우고자 하는 열망, 갈망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을 넘어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원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 갈망하는 것이 죄 짓는 일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면, 온전한 사람으로, 거룩한 신앙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것이라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배고픔을 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해결되어야 하는지 우리보다 먼저 문제를 아십니다. 교우 여러분, 영혼의 문제, 영혼의 양식을 주님께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수많은 무리들이 식사 때가 되어 배고픔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문제 해결을 위해 5절에 말씀하십니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리고 성경은 이 말씀이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시는 말씀이라고 6절에 기록하였습니다.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이미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지 마음속에 작정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배고픔의 문제,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복음서에서는 무리들을 먹이는 문제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반응도 나옵니다.
그 한 가지는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먹을 것을 각자 사 먹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각자 해결하도록 하자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거기에 모인 무리들은 갈릴리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땅의 주인은 모두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갈릴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땅의 주인으로부터 소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사 지은 뒤 추수한 것의 대부분은 예루살렘에 사는 땅 주인들이 거두어 가고, 그 나마 조금 남는 것은 로마의 앞잡이 세리들이 과하게 거두어 가고, 그 나머지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늘 가난하고, 늘 배고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여 나오지 못한 것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나올 형편이 아예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고픈 무리들을 인근 마을로 보내어 각자 해결케 하자는 의견은 무리들이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무책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시에 마을로 내려간다고 해서 그들에게 음식을 팔 수 있는 식당도 없었습니다. 그 모든 현실을 아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보고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결 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해결해 보라고 하시는 예수님께 무엇인가 의도하고 계신 것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무리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빌립의 방법인데, 2백 데나리온 어치 떡을 사다가 먹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 5절에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어디서 음식을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면, 빌립이 바로 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립은 그곳에서 약 14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벳세다 출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립은 곧 바로 계산을 했습니다. 어림짐작으로 모인 사람들을 세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께 모여 온 무리들의 숫자를 어느 정도 가늠하는 눈썰미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주님의 사람들- 열두 제자들 이야기]라는 그의 저서에서 빌립이 열 두 제자 중 식사 공급의 책임을 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 문제가 생길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던 것이고, 그 때 빌립의 대답이 빠르고 주저함이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무리들을 먹일까 하는 계산을 이미 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하튼 빌립이 계산한 결과는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먹을 것을 사다가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200데나리온이라는 돈은, 1데나리온이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와 오늘과 화폐가치가 다르지만 그래도 환산을 해 보면, 하루 일당 5만원으로 계산을 해도 200데나리온은 천만 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밀리건이라는 사람은 그의 논문에서, 그 당시 1데나리온으로 살 수 있는 빵은 길이 23센티, 두께 3.5센티의 밀가루로 만든 빵은 12개, 보리가루로 만든 빵은 36개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약 50여명이 나누어 먹는다고 계산하면, 배부를 수가 없는 양입니다. 그러니 빌립이 200데나리온으로 사온 떡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방법입니다. 그들에게 당연히 그만한 돈이 없으니 계산을 아무리 잘 해냈다고 하더라도, 없는 돈으로 누가 어떻게 사올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양의 빵을 어디서 단번에 사올 수 있겠습니까? 대형 빵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형 빵 유통매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 방법은 이론적으로, 계산상으로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해결 방법이 되지 못했습니다.
  6절에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신 것은 빌립을 시험하시고자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조(peirazo)’라는 단어는 중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라고 요구받은 시험 같은 경우에는 무언가를 입증하는 경험을 가리키는 시험을 뜻합니다.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결과를 위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의 ‘시험’은 파괴적이며,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문제를 주었습니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주셨습니다. 무리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문제입니다. 이 과정은 제자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통해 제자들이 깨닫고 경험하고 갖추어야 할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낙심하고 좌절케 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왜 하나님을 믿는가? 어떤 하나님이심을 믿는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훈련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 모든 사건, 모든 이야기, 모든 사람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분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 어떻게 응답하느냐? 어떻게 믿음으로 순종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변화가 일어나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하고 훈련하셨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계산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결하는 법을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신 문제 뒤의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만나게 하시고, 그 문제를 통해 우리를 관찰하십니다. 문제를 만나면 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잘 모르던 나의 모습, 아무 문제없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나의 모습에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숨겨진 약점, 감추어진 단점, 상처들, 쓴뿌리들, 견고한 진, 부정적인 생각과 자세와 습관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문제를 통해 우리를 교정하십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절대로 바뀌지 않을 그 무엇을, 문제를 통해 바꾸게 하십니다. 문제를 통해 우리를 더욱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문제를 통해 우리를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그 뜻을 이루어가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으로, 삶의 문제를 믿음으로 헤쳐 나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문제를 겪고 있습니까? 그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픕니까? 그 문제 뒤에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 문제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여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은 안드레가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들고 온 방법입니다. 사실 상식적으로 판단을 하면 말도 안 되는 행동입니다. 한 아이의 도시락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차라리 그 아이만이라도 배부르게 먹게 놔두는 것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로부터 빼앗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한 아이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겠지요. 그리고 그 대화를 들은 아이는 자기 혼자만 먹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순수하게 자기의 도시락을 드리기로 마음을 먹고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이 손에 과자를 들고 있을 때, 어른들이 “나도 좀 줘!”하고 손을 내밀면 아무런 망설임없이 손을 쑥 내밀어 과자를 주는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아이는 그러고 난 뒤, 자신의 빈손을 보고는 막 우는 아이도 있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망설임없이 주는 아이의 순수한 그 마음처럼, 자신의 도시락을 제자 안드레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준 아이가 있었기에 그것을 통하여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있어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코끼리에게 비스겥만도 못한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계산을 해 봐도, 현실적으로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되는 양이었습니다. 그것 가지고 뭘 해? 장난 하냐? 치와 뿌라!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들고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떡도, 물고기도 제자들을 통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11절 보니까 조금씩 나누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누어 주셨습니다. 더 먹고 싶다면 더 주었습니다. 리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배부를 만큼 주었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취하여 거대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사용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듣고 자신은 아무런 능력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 일을 하기에는 가진 것이 없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는 나무로 된 지팡이 하나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들고 있는 작은 것,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바로 왕 앞에서 지팡이가 뱀이 되기도 하고, 그 뱀을 다시 집었더니 지팡이가 도로 되기도 하고, 홍해 바다 앞에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또 광야 길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그곳에서 샘물이 솟아나왔습니다. 지팡이가 능력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 군대가 침략하여 전쟁을 할 때, 그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이라는 장수 앞에서 모두가 벌벌 떨고 있을 때,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갔습니다. 소년 다윗은 갑옷도, 칼도, 창도 없이 나갔습니다. 그의 손에든 것은 막대기와 물매와 물매돌 다섯 개 뿐이었습니다. 골리앗과의 대결은 말도 안 되는 대결입니다. 상식적으로, 통계적으로,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소년 다윗을 골리앗에게 내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들고 나간 것은 골리앗에 비하면 극히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실 것을 믿고 물매돌을 던지니까 한 방에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작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 메시지를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지만 거기에 가능성을 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을 넘어서 가능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신앙인은 예배나 새벽기도회나 모임에 열 명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열 명이나 나왔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더 나오면 스무 명, 삼십 명, 오십 명, 백 명 되겠지. 내가 지킬 자리를 지켜야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왜 이렇게 안 모였어? 다른 사람들도 많이 안 나왔으니 나도 안 나와야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누가 기적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누가 문제를 긍정적으로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교우 여러분, 믿음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비록 작은 것, 적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적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3년 02월 1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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