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름 과일들이 한창입니다. 요즘 과일들은 웬만하면 다 맛있습니다. 옛날에는 맛없는 과일도 많았습니다. 참외 같은 것은 잘못 사면 오이보다도 못한 맛으로 먹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수박 같은 것도 익지 않은 수박, 맛없는 수박을 사면 돈 주고 산 것을 억지로 먹어야 하는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도 배고픈 때니까 먹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웬만하면 맛이 있습니다. 못 먹을 정도로 맛이 없는 과일은 아예 팔 생각을 못합니다.
여러분, 맛있는 과일을 고르는 법을 아십니까? 과일가게에 가서 비싼 과일을 사면 거의 틀림없이 맛있습니다. 비싼 이유가 괜히 비싼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싼 것이 싼 것이고, 싼 것이 비싼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비싼 것이 비싼 것이고 싼 것이 싼 것이지, 무슨 비싼 것이 싼 것이고 싼 것이 비싼 것이라는 말을 합니까? 비싸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사서 써 보면, 비싼 값어치를 하고 오래 쓰고 성능도 좋습니다. 싸다고 하는 물건을 사서 써 보면,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처럼, 값어치도 못하고 쉽게 망가지고 후회하게 되어 결국 또 사야 하니,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짜증은 짜증대로 나니 싼 것이 결국 비싼 것이라는 뜻입니다.
‘비싼 것이 싼 것이고, 싼 것이 비싼 것이다’ 이런 것을 역설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역설(paradox, 逆說)이란 표면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즉 자기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해석의 과정을 거쳤을 때, 그 의미가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는 진술, 곧 진실을 담고 있는 진술을 말합니다. 그 속에 진리를 품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역설적 표현으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강하고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이 세상은 이성의 논리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논리적으로 항상 딱딱 맞는 일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겪는 일들이 논리적으로 항상 딱딱 맞는 일만 겪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1 더하기 1은 2, 2 더하기 3은 5라는 수학의 논리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딱딱 맞아 떨어지고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역설이란 이렇게 이성의 논리가 도저히 적용되지 않는 사건을 풀 수 있는 논리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이성의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시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를 드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올라갑니다. 그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100세에 겨우 얻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통하여 바다에 모래알같이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자손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언약하시며 주신 아들입니다. 그런데 제물로 드리라니요? 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죽여서 바치라는 말입니다.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100세에 아들을 주실 때는 언제고 다시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요? 그럴 것이면 아예 주시지 말든지. 도무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제물로 바칠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홍해를 건너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신앙은 이성의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10가지 이적을 행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고 나왔는데, 뒤에는 바로가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아우성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냥 애굽에 놔두었으면 애굽 사람을 섬기며 살았을 텐데 광야에서 죽게 만든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외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 14장 13,14절)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라”고 명령하셨고 모세가 그대로 하니 바다가 갈라져 가운데 마른 땅을 걸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것은 역설이라는 논리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역설이라는 논리는 초이성적 세계에서 통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떤 신학자는 ‘인생의 잉여’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나머지’라는 말입니다. 10나누기 2하면 답이 5로 딱 떨어지는 데, 10 나누기 3하면 답이 3하고 0,33333이 끝까지 나누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는 이해가 딱 되고, 설명이 명쾌하게 되고, 논리적으로도 딱 맞는 일들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음주운전을 한 사람의 차가 길가 커피숍으로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은 즉사를 했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자신이 음주운전을 했기 때문에 사고를 냈고, 죽거나 다치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커피숍에 앉아 있다가 다친 사람은 왜 다쳐야 합니까?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사람들은 그냥 재수가 없어서 당한 일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재수가 없느냐 그 말입니다. 재수라는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 안 되는 일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된다면 종교가 필요 없고 신의 도움 없이 인간들끼리 잘 먹고 잘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은 이성의 논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입니다.
신앙에도 신앙의 논리가 있습니다.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명되고 증명되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믿음의 대상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신앙이 그 뒤를 맡는다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의 일이 이성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에게는 제자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으뜸이 되려면 으뜸이 되어야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면 어떻게 으뜸이 됩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어떤 진리가 담긴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셨으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서 짐도 벗겨 주고,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해 주어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니요? 그리고 그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어떤 진리가 담긴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면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인 논리에 의하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얻는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잃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지,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다는 말이 안 맞는 말로 들립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어떤 진리가 담긴 말씀입니까?
이것이 역설의 진리이고, 이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이 역설의 신앙입니다.
역설적 진리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진리가 됩니다. 예를 들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역설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지는 것은 그냥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란 하나님이 관계하시고, 하나님께서 진리를 진리 되게 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진리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 세상의 논리로만 보면, 지는 것은 그냥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데,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은 그냥 약자가 강자 앞에서 자기 최면을 거는 말일 뿐입니다. 강자에게 자꾸 지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렇다고 이길 수는 없으니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자기를 위로 하는 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진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역설의 진리는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이 진리가 해결되고 이해되고 믿어집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뜻을 받아들여야 이 진리가 진리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질병 때문에 주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은 이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절박하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무슨 뜻인가? 그 결과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더욱 붙잡고 의지하게 되고, 그때 자신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러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강하고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개입, 예수님의 역사,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역설적 경험, 역설적 진리체험입니다. 이렇게 그가 깨달은 '약한 그때가 곧 강한 때다'라는 역설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 능욕 받는 것, 궁핍, 박해, 곤고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런 때에 자신은 약하고 무능력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드러나고 예수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은 자신의 역설적 경험들을 서술함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이 본문 말씀을 감동적인 역설, 아름다운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삶을 역설의 진리로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얼핏 보기에는 속이는 사람 같지만, 복음의 진리, 영생의 진리,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참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무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있습니다. 징계를 받아 고난 속에서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 근심하며 살 것 같지만,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며 삽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영혼과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영원한 것,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스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결코 우습게봐서는 안 될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그런 사람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입니다. 사도 바울의 역설의 신앙 고백이 여러분의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16절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누가복음 6장 21절에,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물질과 이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 신앙의 선배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세계 교회사와 우리나라 교회사에 기록된 위대한 신앙인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러가 한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배제학당을 창설하였고, 정동제일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서 번역에도 크게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런데 1902년 6월11일. 성서번역의 일로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한국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칼에 맞아 죽은 토마스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그가 죽기 전 몇 권의 성경책만 던지듯 전해 주었는데, 그것을 주어간 소년과 그 성경책을 찢어 벽에 붙인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우리나라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니까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