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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승의 신앙  [6367]
· 설교 일자 : 2013년 07월 28일
· 본문 말씀 : 고린도후서 4장 7~12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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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승의 신앙 (고린도후서 4장 7~12절)

 

요즘에 랜드마크라는 말을 합니다. 랜드마크란 어떤 지역, 도시, 나라를 대표하거나 구별하게 하는 시설이나 건물을 말합니다. 부산은 광안대교가 랜드마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미국 뉴욕은 자유 여신상이 랜드마크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는 에펠탑이 랜드마크라고 합니다. 에펠탑 아시지요? 에펠탑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유명한지 옛날 빵집 이름을 에펠제과라고 간판을 붙인 곳도 많았습니다. 에펠탑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회를 위해 구스타브 에펠이라는 사람이 설계를 했습니다. 높이가 320m입니다. 건축 초기에는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철제로 된 흉물이라며 시민들이 싫어했고, 몇 차례 철거 위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파리의 낭만과 감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고, 파리하면 에펠탑을 떠올리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당시에는 푸대접을 받았지만 세월이 가면서 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을 받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실패한 것 같아도 후에 성공으로 판명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패배한 것 같아도 후에 승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만 보면 안 됩니다. 순간만 보면 안 됩니다. 이 세상만 보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지금만 보며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당장만 중요하게 여기는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삶을 위해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 당장의 상황과 형편만을 보지 않고, 그 다음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금은 힘들고 괴롭고 지치고 실패하고 패배한 것 같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오늘 본문 7 말씀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합니다. 지금 힘들고 괴롭고 지치고 실패하고 패배한 것 같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을 질그릇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 흔했습니다. 질그릇은 흠집이 쉽게 하고, 깨어지기도 쉬운 그릇입니다. 그만큼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니 값도 쌉니다. 평범한 그릇입니다. 부뚜막 근처나 시장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릇입니다. 바울 시대에는 질그릇의 용도가 다양했습니다. 음식을 담는 것으로부터 연료까지 모든 것을 담아 사용하였습니다. 그냥 음식을 담으면 음식 그릇이 되고, 기름을 담으면 기름 그릇이 되고, 잡동사니를 담으면 잡동사니 그릇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질그릇에 그리스도인을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질그릇처럼 쉽게 흠집이 나고 쉽게 깨질 수 있는 존재이구나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질그릇인데도 금그릇인 척, 은그릇인 척, 다이아몬드 그릇인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인대도 강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한 존재인대도 완전한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잘못 파악하면 거기에서부터 인간관계의 문제가 생기고,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 약이 되지 못하고 독이 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 비웃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조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패배를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이고, 실패할 수 있는 존재이고, 패배할 수 있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2417,18절에,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그 안에 보배를 담았기 때문에 삶이 실패와 패배로 끝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본문 7,8절에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겨쌈을 당했다는 말은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궁지에 빠지게 되고, 사방으로 옥죄어 들어오며 짓누르는 상황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궁지에 빠져 사방으로 옥죄어 들어도, 그러나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움츠러들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짖 눌려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결코 찌부러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여기서 답답한 일을 당하였다는 뜻은 길이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길이 없는 절망 상태에 빠졌어도, 그러나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사냥감처럼 쫓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사냥감처럼 쫓길지라도, 그러나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였다는 말은, 칼싸움을 하다가 칼을 떨어뜨리고 넘어져 있을 때 상대가 목을 짖 밟고 목에다 칼을 갖다 댄 죽음 직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약할 때, 그때에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약할 그때가 강할 때가 됩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약할 때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주님께 더욱 도움을 구하게 되어 예수님의 능력이 더욱 온전히 머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자신이 연약해 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때가 새로운 소망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역설의 신앙입니다. 또한 지금 패배하는 것 같고, 그렇게 끝날 것 같아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마침내 승리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역전승의 신앙입니다.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역전승의 삶을 삽니다.

지난주 설교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끌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 앞에 멈춰섰습니다. 그때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죽은 목숨입니다. 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다른 길로 갈 수 있었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는 코스가 몇 가지 있습니다. (출애굽경로 지도를 잠시 보겠습니다.) 다른 길은 초생달 지역이라고 불리우는 지중해변 비옥한 땅입니다. 이곳은 블레셋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초승달 지역은 아프리카에서 근동지역으로, 또는 근동지역에서 아프리카로 진출하거나 정복해 들어갈 때 꼭 통과해야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 지역을 확보하면 길도 좋지만 바다도 확보하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족속, 모든 나라가 탐내는 지역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블레셋 족속이 그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말은 그 지역을 지키고 살 만큼 강한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군사 훈련도 잘 돼있고, 전쟁 경험도 많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으로 갔으면 백이면 백 패전하여 죽고, 블레셋의 노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생활을 했지만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바다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끌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는 자신들을 죽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불평하고 원망했지요. 왜 애굽에는 묘자리라도 있는데 여기까지 끌고 와서 죽게 하느냐고, 애굽에 그냥 놔두었으면 애굽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그냥 살아있을 텐데 왜 그랬냐고 아우성쳤습니다.

모세는 이 진퇴양란의 상황을 역전시키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역전승의 신앙을 갖습니다. 모세는 홍해바다에 빠져 죽거나 바로의 군대에게 죽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든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홍해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땅을 밟고 홍해바다를 건너고, 뒤따라오던 바로의 군대는 홍해바다 가운데서 다시 바닷물이 합쳐져 몰살당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반전 드라마 연출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바로의 군대가 홍해바다에 빠져 죽게 되는 작전이며, 애굽 사람들과 바로 왕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는 사건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게 될 상황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믿으면 구원의 길이 있음을 깨닫고 경험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모세를 따르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직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볼 때 블레셋 족속을 피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좋은 경로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전승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백성으로써 합당한 모습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세계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을 함께 이룰 백성이 되도록, 다듬고 연단하고 훈련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하시기도 하고, 홍해바다 앞에 서게도 하시고, 마라의 쓴물을 만나게도 하시고, 곤경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훈련하십니다. 우겨쌈을 당하게도 하시고, 답답한 일을 당하게도 하시고, 박해를 받게도 하시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인생의 홍해 앞에 서게 하십니다. 진퇴양란의 상황 속에 서게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전이 일어나고, 역전승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서 역전승을 하도록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산에 오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향해 칼을 높이 든 순간, 수풀에 걸린 양을 예비하여 놓으시고 그것으로 제물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반전의 드라마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고, 주인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전혀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우시는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이방여인이요, 과부인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와 보아스에게 큰 은혜를 입게 된 것도, 광야에서 10년 동안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던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니엘의 그 세친구가 바벨론에서 풀무불에 던져질 때에도,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질 때에도, 에스더와 삼촌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하만에 의해 몰살당하기 직전에도 하나님께서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셔서 그들로 역전승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신 성육신 사건은 반전의 사건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자 당시 율법학자, 바리새인, 종교 지도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신성모독이니 하면서 난리 난리를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반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구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니 메시아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기대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3년 동안의 공생애는 허망하게 십자가 위에서 끝난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도록 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겼다고 기뻐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죽고 끝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패배했다고, 모든 희망이 다 날라 가 버렸다고, 모두 허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일 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반전의 반전이 거듭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역전승의 생애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패배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실패한 것 같이 보이고, 패배한 것 같이 보이고, 끝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부활로 역전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온 인류를 역전시키시는 대역전승의 삶이셨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대역전승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역전승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승리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승리할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지금은 실패한 것 같고, 지금은 패배한 것 같고, 지금은 망한 것 같고, 다 끝난 것 같아도 최후의 역전승이 기다리고 있는 승리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역전승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4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실수했거나 실패했을 때, 패배했을 때, 망했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여 포기합니다. 그때 역전승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실패하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자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믿었고, 그 주님을 통해서 역전승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믿지 못했다면, 그도 별수 없이 낙심하고 절망하고 패배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고,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자신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삶속에서 나타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1815618일 영국의 웰링턴 장군 휘하의 영국군은 벨기에 부뤼셀 남부의 한 마을이었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과 교전하였습니다. 교전의 결과는 빛을 사용하여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해협을 건너 걱정하고 있던 영국시민들에게 드디어 빛의 신호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웰링턴 패배함(Wellington defeated)’이라고 전해졌고, 그리고는 곧 영국의 전형적인 안개가 해협을 가로막았습니다. 영국은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며, 이 두려운 소식은 삽시간에 영국 전역에 퍼져 영국을 절망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고 마지막 말을 전해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패배시켰다(Wellington defeated Napoleon)’는 내용이었습니다. 승리의 소식이 분명하게 전해지자 대영제국의 분위기는 비극에서 승리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서 축하로 바뀌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영국이 워털루전쟁의 승리자이면서도 승리소식을 바르게 듣지 못해 패배자인양 절망 에 빠졌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역전승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 세상만 바라봅니다. 지금만 봅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환경만 보게 됩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지 않으면 세상과 환경과 사람만 바라보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단절된 타락한 본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역전승을 이루어놓으셨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각만으로, 사람들의 말과 평가만 듣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만 보고 좌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세상만 바라보고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입니다. 오죽하면 도박판에서도 첫 끗발이 개 끗발이고 손 털고 일어설 때, 딴 사람이 진짜 딴 사람이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손 털고 가야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하던 일 멈추고, 쥐고 있던 연장 내려놓고, 손 털고 가야 합니다. 그때 승리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인의 삶은 질그릇을 치장하여 금그릇이 되는 삶이 아니라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가 드러나는 삶입니다. 신앙인은 질그릇인 자신을 금이나 은이나 무엇으로 도금하여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이신 주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보배이신 예수님 때문에 삶에 반전이 일어나고, 역전승을 이루어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고단하고 지친 우리들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역전이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믿고 기대하고 의지하면 근심을 찬송으로, 걱정을 기도로, 눈물의 밤을 기쁨의 아침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역전시키실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쓰레기통에서도 꽃을 피우십니다. 고목에서도 꽃을 피우십니다. 사막에서도 물을 내시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고, 광야에서도 고기를 먹게 하시고, 홍해 속에서도 길을 내십니다. 역전승의 주님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질그릇 같은 여러분 안에 주님을 모시고 믿고 의지함으로 역전승의 신앙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역전승의 은혜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2013년 07월 28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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