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때 며느리는 안 나오고 아들이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나와 인사했습니다. “어머니, 웬일이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니, 네 마누라는 어디 가고 네가 나오냐? 그리고 웬 고무장갑을 끼고 있냐?” “예, 아내가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누워 있으라고 하고, 제가 설거지 좀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열이 오른 어머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이런 쓸개 빠진 놈 같으니라구, 내가 고생 고생해서 대학까지 가르쳐 놓았더니 기껏 한다는 게 설거지냐? 죽어라. 이놈아!” 화가 난 어머니는 아들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딸네 집으로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딸네 초인종을 누르자 이번에는 사위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나왔습니다. “장모님, 어서 오세요.” “아니, 자네 마누라는 어디 가고 자네가 나오는가?” “예, 아내가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누워 있으라고 하고, 제가 설거지 좀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말에 이 어머니가 마냥 행복해 하면서 “암, 그래야지, 부부는 서로 돕고 어려울 때 짐을 나누어져야 그게 부부지, 우리 딸이 시집 잘 갔구먼!” 그러더랍니다. 두 남자가 똑같이 색깔도 안 틀리게 빨간 고무장갑을 낀 것은 똑같은데, 그 집이 어디냐에 따라 이렇게 다릅니다. 내 딸이 사돈집의 며느리로 있고, 내 아들이 사돈집에 사위로 있다고 상황을 바꾸어서 사도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판이하게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 성어를 자주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만큼 역지사지하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한 때라는 뜻일 것입니다.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의 뜻은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들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 간의 갈등,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요즘은 장모와 사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즉 서로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해 본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학교에서의 폭력, 왕따 문제도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과 피해자와, 왕따를 시키는 학생들과 왕따 당하는 학생과 입장을 바꾸어 놓고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직장 안에서의 성희롱, 성폭력의 문제, 사회에서의 계층 간의 갈등, 좌우의 대립의 문제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즉 처지를 바꾸어 놓고 진지하게 대화하며 해결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하지 않거나, 상대방의 입장이 돼 보지 못하면, 그 사람의 생각과 고충을 알 길이 없습니다. 역지사지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매일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한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아내가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내와 저의 몸이 바뀌어 역할을 바꾸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바꿔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아내가 되고, 아내는 남편이 되어 깨어났습니다. 아내로 바뀐 남편은 출근할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 깨워서 학교 갈 준비시키고, 아침 식사를 하게 한 후에 학교에 데려다 준 후에, 집에 오자마자 그 날 해야 할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세탁소에 맡길 옷을 맡기고, 은행에 들러 전기세, 전화세, 공과금 내고, 마켓에 들어 저녁식사 꺼리 사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오자마자 애들 방, 안방, 거실 청소하고, 오후에 아이들 학교에서 데려오고, 아이들 숙제 챙겨주고, 숙제하는 아이 옆에서 다림질을 하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반찬거리 다듬고, 찌개 안치고, 그 후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된 후, 아이들 저녁먹이고, 설거지하고, 빨래 마른 것 접어 넣고, 아이들 씻겨 잠자리 들게 하고, 늦게 들어온 남편 맞고,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집에 하루 종일 있는 아내의 역할에 대해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고, 제발 저를 남편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돌려 보내주실 줄 믿슙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내의 몸으로 바뀐 사랑하는 내 아들아, 어제 하루 동안 많은 것을 배웠을 줄 안다. 네 소원대로 다시 남편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러나 앞으로 10개월 있어야 남편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어제 저녁 남편과의 잠자리로 인해 너는 지금 임신 중이니라.”
사람은 어리석어서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고서 그때서야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부모님의 심정과 입장을 그제서야 느끼고 이해하게 됩니다. 아프게 되니까 그제서야 아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니까 그제서야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오늘 설교는 역지사지의 신앙을 갖자는 내용입니다. 직접 경험해보고 그때서 느끼고 그때서 이해하고 그때서 왜 조금 더 빨리 깨닫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지사지하는 신앙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 말씀 중의 한 부분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행복이 가득 차서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보낸 편지입니다. 스무 해가 넘도록 혹독한 선교 여행으로 지쳐있었고,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뛰어넘은 성숙한 신앙으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마치 연애편지처럼 따뜻하고 밝고 기쁨 가득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말씀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게 말씀하면서 그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삶은 어떤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느냐하면, 6-8절 말씀,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역지사지의 사건입니다. 사람의 처지에 친히 오셔서 함께 하셨고, 함께 웃으셨고, 함께 우셨고, 함께 슬퍼하고 괴로워하셨고, 함께 즐거워하셨습니다. 사람의 처지에 처하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시어 목숨을 내 주신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친히 사람의 입장이 되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역지사지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역지사지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말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철이 든다는 것입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헤아리게 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뮤지컬 배우인 전수경씨가 어느 토크쇼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신은 남편과 이혼을 하고, 혼자서 초등학생 쌍둥이 두 딸을 키우고 있는데, 직장 생활 때문에 아이들을 잘 못 챙겨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적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직업특성상 저녁 시간에 공연을 해야 하니 공연 끝나고 저녁 늦게 들어가니까 딸들한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도 딸들에게 전화해서 “오늘 엄마 공연 끝나고, 또 늦게까지 텔레비전 촬영이 있어서 늦게 들어갈 테니 너희들끼리 먼저 자!”라고 하니까, 딸이 엄마한테 불평하고 짜증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구, 우리 엄마 힘들어서 어떻게 해!...”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 하더랍니다. 자기들 무섭다고 칭얼대지 않고 빨리 들오라고 하지 않고, 엄마를 걱정해 주는 딸들의 마음이 가슴 속으로 확 들어온 것입니다. 그 딸들이 철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기 시작하면서 철이 들기 시작합니다.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동안에는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만 살았는데, 부모의 마음도 헤아리게 되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철이 들기 시작합니다. 철 든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뼈가 부러져서 몸속에 뼈를 잇는 철심을 박았기 때문에 철이 몸 안에 있는 것 그런 것 말고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에도 철이 들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철이 든 신앙인은 역지사지의 신앙으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와 반대로, 신앙의 초보, 신앙이 아직 철이 덜 든 신앙인, 신앙이 성숙해지지 못한 신앙인은 내 입장, 내 욕심, 나의 바램, 나의 뜻에 빠져 있습니다. 역지사지가 안 됩니다. 여러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가 철이 안 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불평하고, 어려움만 만나면 원망하고, 자신들의 바램과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불순종했습니다. 그것 고쳐주시려고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철 들게 하려고, 역지사지의 신앙을 갖게 하려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말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아가 깨졌다는 말,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비웠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신앙에 철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중심적인 자기애를 버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실까를 생각하고 깨닫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을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세상을 향한 구원의 사랑으로 채웠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이런 역지사지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내 입장, 내 욕심, 내 경험, 내 주장, 내 뜻에서 하나님의 입장과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라는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우물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영역이 넓혀져야 합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죄의 문제에 대해서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과 성숙한 신앙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단번에 모든 죄를 다 용서받기 때문에 굳이 빨리 회개할 필요 없이 죽기 전에 천천히 회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크셔서 회개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 삼아 죄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은 죄를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여 내 죄가 용서 받는다, 안 받는다, 벌 받는다 안 받는다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더욱 성숙한 신앙이 되려면 죄 때문에 내 마음이 편치 않고, 내 영혼이 불안하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 차원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죄 짓는 나를 보시고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나님께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얼마나 근심하실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이런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생각나는 죄가 있다면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역지사지의 신앙은 하나님께 성숙한 반응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건강으로나, 물질로, 다양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여러분, 징계 받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징계를 받게 되면 징계 받는 것이 지금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런데 나를 징계하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역지사지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를 볼 수 있다면, 징계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징계에 대해 성숙한 신앙으로 반응을 할 것입니다. 징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역지사지의 신앙으로 내 뜻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쉬운성경번역본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며, 친절과 동정을 베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서로 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한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무슨 일을 할 때, 이기적이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해 주십시오. 자기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앙의 힘을 얻고 있다면, 예수님처께서 자신의 비우고 사람의 처지가 되어 오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그 뜻에 순종하신 것처럼 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위로를 받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을 모두 합하여 그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서로 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한 뜻으로 하나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있다면,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처럼 역지사지의 신앙으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역지사지의 신앙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영어로는 'understand'라고 하여 ‘under’ ‘아래에’, ‘stand’ ‘선다’ 입니다. 상대방 입장에 서보는 것, 상대방 아래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100%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상한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위로한다고 해서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만큼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고,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인격심리학의 대가인 하버드대학의 고든 올포트 박사는 성숙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다음 일곱 가지 경향성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입니다.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를 보면 그가 성숙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는 사람은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부족해서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어떤 장점이 있어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를 압니다. 그러나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관적으로 자기 입장만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기준과 판단에 의해 맞는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나도 저 사람처럼 연약한 존재인데..., 나도 저 사람처럼 어리석은 존재인데..., 나도 저 사람처럼 부족한 존재인데..., 나도 저 사람처럼 실수하는 존재인데..., 나도 저 사람처럼 죄 짓는 추악한 존재인데..., 그런데 나는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저 사람의 눈에 티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태복음 7장 2절에,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나도 입장이 바뀌면 비판 받고, 헤아림을 받겠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역지사지의 신앙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존중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존중합니다. 우리는 ‘남의 흉이 한 가지면 자기 흉은 열 가지’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디언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답니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지 않고서 함부로 말하면, 그 말이 잘못된 말, 상처를 주는 말, 상대를 죽이는 말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잠언 12장 18절 말씀에,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역지사지의 신앙으로 말을 하면,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하면, 상대방의 상처와 아픔을 고쳐주는 좋은 약이 되지만, 함부로 막말을 하면 상대방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성숙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젊은 아가씨들이 어느 허름한 돼지국밥집에 들어갔습니다. 돼지국밥을 주문하였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주인아저씨가 국밥을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놓는데 보니까 국밥의 국에 엄지손가락이 쿡 담긴 채 국밥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아가씨들이 국에 담긴 주인아저씨 손가락을 보면서 질겁을 하면서 “아저씨!~ 엄지손가락이~ ” 그랬더니 주인아저씨가 하는 말, “괜찮아요. 난 뜨거운 거 잘 참아요. 하나도 안 뜨거워요~ ”라고 자랑하듯 말을 합니다.
그게 아니지요! 아저씨 손가락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음식에 아저씨 손가락을 담갔으니 불결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주인아저씨는 자기 입장에서 자기 손가락 걱정해 주는 줄로만 알아 들었습니다.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장사하는 그 아저씨 식당이 어떻게 됐을까요? 손가락을 국에 담그는 것을 고치지 않는 한은 망했을 것입니다.
역지사지의 신앙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역지사지의 신앙은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이해합니다. 긍휼을 베풉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시면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도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나아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역지사지의 신앙으로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역지사지의 신앙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내 입장에서만 말하고, 내 입장에서만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무슨 신앙의 성장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사람의 처지가 되어 입장을 바꾸신 사랑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역지사지의 신앙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