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교회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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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창립 60주년을 맞는 교회를 생각하며 쓴 수필을 소개합니다.
미디어팀 | 2013.06.02
조회수 : 13024
박희태 장로님의 여동생 박명순 권사님께서는 현재, 문단에 등단하여 수필을 저술하고 계십니다.

최근, 양정교회 60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 생각을 글로 표현하여 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나의 고향, 나의 유치원
박명순

1. 남편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이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나, 큰형님께서 부모님 자리를 대신해 주셨을 때 남편은 꼭 나를 데리고 일 년에 여남은 차례씩 먼 길을 마다않고 고향을 방문하곤 했다.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 기일 등이 주된 원인이기도 했지만 고향이 없는 나에게 자기 고향에서나마 함께 그 맛을 느껴 보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2. 6.25 전쟁 통에 부모님을 따라 피난을 나온 나는 실향민이었다. 마을 앞 신작로 길 따라 피어있는 아카시아 꽃잎 따서 꿀을 빨아 먹었던 향수가 있을 수 없고, 철새들의 먹잇감으로 남겨두었던 늦가을 홍시 감을 흔들어 따먹다가 얼굴에 홍시 폭탄을 맞았다는 우스운 옛이야기도 없다.
남편이 고향에 들를 때 마다 자기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 나도 슬그머니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3. 대 여섯 살 때쯤 이었을 게다. 거제도로 피난 가셨던 부모님이 우리 모두 부산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셨다. 함께 거제도 두동교회에 다녔던 피난민 2.3세대 교인들이 성포항 부둣가에서 부산-거제간 여객선 창경호를 타고 부산으로 집단 이주를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흰옷으로 차려입은 거의 모든 섬사람들이 우리가 탄 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전송을 했다. 그리고 찬송을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서 간데 마다 보호하며 양식주시기를 원하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어린 나이에 경험한 일이지만 그것은 60년이 넘도록 잊혀 지지 않는 나만의 스크린이었다. 부둣가 뱃고동 울리는 여객선을 볼 때 마다 정든 사람들과 헤어질 때, 하다못해 영화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침몰 장면에서조차 나는 이 스크린이 재 작동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교회였고 기억되는 교회였다.

4. 어찌해서 부산 양정동에 정착을 하셨는지 잘 모른다. 다만 그곳에 150세대쯤을 수용할 수 있는 피난민 집단 수용소촌이 있었다는 것과 먼저 도착해서 교회를 개척하신 어떤 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세워나갈 장로님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으신 것 같았다.
거제 두동교회에서 장로님인 아버지를 신앙의 남편처럼 부형처럼 따르는 전쟁미망인 2.3세대의 거처도 아버지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수용소촌 사 8호 집이었다. 식구들이 많다고 좀 너른 방을 배정받은 것 같았다. 8~9평쯤 되는 방을 칸막이를 쳐서 둘로 만들어 한 쪽방은 마루를 깔고 네 명의 오빠들 거처를 만들어 윗방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한 쪽은 온돌을 깔고 부엌을 내고 부엌 위에는 다락을 얹었다.
연탄 값이 만만치 않아 겨우 불씨 역할만 할 정도로 남겨 두었다가 식구들 끼니 만들 때는 어쩔 수 없이 불을 키웠다. 그 바람에 아랫목 한사람 앉을 자리만큼은 늘 따끈따끈 했고 온기가 식을세라 겨울이면 이불을 꼭 덮어두곤 했다.
나는 막내라서 아버지, 엄마와 같이 온기 감도는 아랫방에 기거를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따끈한 아랫목 자리에 나를 눕히고 그 옆에 엄마자리를 만들고 윗목에서 주무셨다. 그런데, 이 따끈한 사치를 누리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저녁 예배가 없는 날 밤에는 영락없이 담임 목사님이 오시곤 했기 때문이다.
"장로님, 또 왔습네다…."
다섯 남매를 두신 목사님의 둘째 아들이 나와 같은 나이였으니 아버지보다 한참 연하이셨다. 전화도 없던 때였으니 소통의 방법은 이 길 밖에는 없었을 것이리라. 아버지는 목사님이 오실 때 마다 따끈한 아랫목을 내드리면서 나를 윗목으로 내쳤고, 엄마는 국토개발대 현장에서 품삯으로 받아온 콩으로 쑤어 먹었던 저녁거리 콩죽을 무나 고구마를 깎아 곁들여 내어 놓곤 했다.
어린 나이에 무슨 말씀들을 나누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의 사이는 이렇게 가까운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5.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어느 날, 당회를 마치고 제직회를 마치고 공동회의까지 있었던 날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악을 쓰면서 대들었다. 엄마는 성미가 칼칼하셨다. 좋고 나쁨이 분명하고 경우 없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분이었다.
"당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왜 다 뒤집어 썼수?
왜 바른대로 말 못하고 혼자 죽을 곤경에 빠지우?"
화가 잔뜩 난 엄마가 종주먹을 들이 댈 만큼 다그쳐 물어도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셨다. 그날 밤, 아버지가 식구들을 모두 앉혀 놓고 말씀하셨다. 그때 큰오빠 둘째오빠는 교회 청년부에 들어 있을 만큼 성장했다.
"내레, 상황을 바르게 다 말하면 목사님이 곤란해져서 그랬다…. 아직 공부할 아이들이 많은데 목사님 거처가 어려워지면 어떻게 하갔네? 그리구 그렇게 되면 교회가 시끄러워져. 나 하나 희생하면 다 조용하갔는데…. 하나님이 아시면 되지 않갔네?"
식구들에게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속 깊은 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장로님은 교회나 목사님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또 새겨두었다.

6. 시대가 다 가난했으니 먹을 것이 어찌 넉넉했겠는가? 콩죽을 먹거나 깡보리밥, 감자밥 먹는 것도 다행이었던 때였다. 그래도 일 년에 꼭 한번은 틀림없이 고깃국을 먹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생일날이었다. 아버지의 생일은 아주 추운 음력 정월달이었다. 모두들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장로님 생일이라고 귀하디귀한 소고기를 가지고 왔고 어떤 이는 닭을…. 그리고 푸줏간에서 거저 갖다 먹으라고 주었다면서 돼지껍질과 비계를, 배추김치며, 파며, 시금치, 양파까지….
피난민 수용소촌 대부분이 우리 교인들이었다.
가 1호, 나 6호, 다 7호, 8호 멀리 아 줄 몇 호까지…. 엄마는 주위에 계시는 교회 분들과 밤을 새워 만두를 빚고 소고기가 없을 때는 닭을 고아서라도 만둣국을 넉넉히 끓여 온 교인들과 함께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때까지 나누어 드나들면서 아버지 생일을 보냈다. 나는 갑자기 우리 집이 부자가 된 것 같아 의기양양했지만, 그 많던 만두가 쑥쑥 없어지는 것에 애가 닳아 겨울 추위에 꽁꽁 얼어 있던 만두를 숨겨 놓는다고 다락에 올려놓았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때도 있었다.
"이렇게 만두가 붙어서 어떻게 먹깐? 에미나이 같으니라구…. 그대로 놔뒀으면 한사람은 더 불러다 대접할 수 있었갔다!"
나는 그때도 장로님과 교인들의 사이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7. 집집마다 먹을거리 걱정을 하던 시대였는데 그 와중에 어떻게 자식들 공부를 시켰는지…. 요즈음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드높은 자녀교육열은 이북 피난민들이 원조였을 것 같다.
피난민 수용소촌에 반가운 일이 생겼다. 수용소촌 모두에게 로또당첨 만큼이나 좋은 일이었다. 당시에 막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나일론은 질감에 따라 여인네들의 치맛감이나 이불 호청감으로 쓰였지만, 조금 부드럽게 색상을 잘 맞추어 짜여진 나일론은 요새말로 스카프로 쓰였다. 마후라라고 했다.
지금에사 손바느질과 똑같이 마감질하는 재봉틀이 있지만 그때는 없었다. 국제시장에 출입하시던 어떤 여 집사님이 이 마후라 만드는 공장을 알게 되어 일감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재단만 한 마후라를 수 백 장 나중에는 수 천 장씩을 가지고 와서 가장자리를 예쁘게 도르르 말아 감침질하는 수작업을 맡기는 것 이었다.
한 장에 얼마씩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든 부인들이 하루 저녁 꼬박 앉아 완성시킬 수 있는 양만큼 배급받아 다음날 아침에 넘겼다.
한 달에 두어 번 공임을 받았다. 귀한 돈이었다. 아이들의 교통비도 되고 반찬값도 되었고 모으면 등록금도 되었다.
엄마는 딸이 많은 집을 부러워하면서 더 많은 양의 작업을 할 수 없음을 늘 아쉬워했다. 어떤 날은 돈 욕심에 많은 일감을 받아놓고 시간 맞추어 해 낼 재간이 정히 없을 때에는 아버지, 오빠들 눈치를 보면서 자는 나를 살살 깨웠다.
"명순아, 바늘에 실 좀 꿰 줄래?"
그때는 이북에서 보내주는 전기를 끊으면 도리 없이 정전이 되어 암흑천지가 될 수밖에 없던 때였다. 촛불하나 켜놓고 돋보기도 없이 구부리고 앉아 마후라를 감침질하는 엄마를 보고 바늘에 실만 꿰 주고 벌렁 다시 잘 수가 없어 거들어 주었던 때도 있었지만, 엄마는 어지간해서는 나를 깨우지 않았다. 대신 바늘마다 실을 줄줄이 꿰어서 벽지 사이사이에 촘촘히 꼽아 놓곤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공임을 받으러 그 집사님 집에 갔을 때, 그동안 수고했던 수작업 양만큼 돈을 받아들고 나오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환했다.
"에구, 이번에 제일 많이 타 가시네…."
"고맙습니다."
"집사님, 다음에는 조금 더 많이 하시라우요."
"예, 그래야지요. 고맙습니다."
모두가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이었다. 이 모습 역시 또 다른 하나의 교회였다.

9. 유치원이라는 이름조차 없었던 때였지만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하기 전부터 교회 유치부에서 글자를 깨쳤고 성경을 암송했다. 기도를 배웠고 예배드릴 때의 자세를 배웠다. 수작업으로 벌어들인 수입조차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교인들로부터 배웠다.
"살아가며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나의 유치원은 양정교회였다.
부모님은 그 후 자식들의 성장과정을 따라 삶의 거처를 옮겨 다녔지만 어느 곳에서 몇 년을 머물었던지 간에 언제나 생각의 중심은 양정교회였다. 다행히 노후에는 부산 양정교회를 다시 섬길 수 있었고 두 분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가셨을 때 영결식 예배를 드린 곳도 양정교회였고 잠드신 곳 역시 양정교회 공원이다.
나도 진해에서 출발했던 결혼생활이 지금은 이곳 수도권에서 맴돌고 있지만 젊은 날 잠시 3~4년 양정교회를 다녔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첫 돌을 막 지난 작은딸이 가을 추수감사절 예배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10. 나에게는 남편처럼 옛 시절을 재미있게 들려 줄 고향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교회관은 부산 양정교회에서 비롯되었고 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대물림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해왔다. 비록 땅 물림이 없다 하더라도 이만하면 교회는 나의 고향이고 나의 유치원이다.
금년에 부산 양정교회가 창립 6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내 나이도 어느새 예순 일곱이다. 돌이켜서 볼 때 지나간 삶이 보여 지고 또 살아갈 앞날이 아직 남아있는 참 좋은 나이다.
부산 양정교회도 60년 지켜온 역사가 얼마나 귀하며 또한 앞으로 이루고 싶은 비전은 얼마나 값질 것인가!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나의 년수를 허락하실지 알 수 없지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내 고향 양정교회를 잊을 수가 없거니와 기도 또한 멈출 수가 없으리라.
살아남은 인생이 좀 있고 오가는 객들과 손이라도 마주 잡을 수 있을 때 그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옳은 일 같은데 왜 사람들은 다들 늙어서, 죽어서 고향 땅을 가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고향의 품이 그만큼 넉넉해서인지도 모른다. 나도 남들처럼 늙어 죽으면 고향 같은 양정교회에 가고 싶어질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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