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1장 16~17절) |
깐깐하기로 악명 높은 교수 밑에서 조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기말 시험을 치르는데 문제가 기상천외한 문제였습니다. 사지선다형도 아니고, 논술형도 아니었습니다. 사진에 찍힌 발만 보고 새의 이름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리도 아닌, 25마리의 새 이름을 모조리 알아맞히라는 문제였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새들 중에 25마리를 뽑아서, 교실 벽에다 25마리의 새 사진을 쭉 걸어놓았는데 새의 전체 모양을 찍어놓은 칼러 사진도 아니고 흑백으로 발만 찍어놓은 사진이었습니다. 학생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문제는 풀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시험을 중단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학생을 보고 교수가 붙들고 물었습니다. “자네, 시험 안 보고 어디가나?” “이 문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습니다. 기권하고 저는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래, 이 시험이 기말 시험이라는 걸 모르나? 포기할 경우 과락을 할 텐데 그래도 좋은가?” “좋습니다. 과락시키려면 한번 해 보세요. 저는 이 따위 시험은 치를 수가 없습니다.” 학생이 교실 문을 박차고 나서는 순간 교수가 “자네, 이름이 뭔가?” 교수는 그 학생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 순간 학생은 갑자기 자기의 바지단을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은 채 발을 교수에게 내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제 발만 보시고 제 이름을 한 번 알아 맞혀 보세요.” 그 학생은 제대로 졸업을 했을까 한편으로 걱정이 됩니다. 간혹 교수들이 시험 문제를 이상야릇하게 내어 학생들을 골탕을 먹이는 교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일까요? 어떤 문제가 해결하기 힘든 문제일까요? 그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 문제입니다.
구원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갈망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생을 얻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방편으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맞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을 잘 지켜 죄를 짓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율법의 가장 핵심이요, 기본이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제사법이 있습니다. 십계명은, 제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 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 제3계명,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지키다가 지은 죄를 해결 받을 수 있도록 제사법을 정하여 속죄제사를 드리게 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 제대로 잘 지킬까를 연구하고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사항들을 만들어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의 정신을 따라 율법을 지키기 보다는 율법의 외형과 형식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킨 사람은 외형적으로 안 지킨 사람을 구분하였고, 정죄하였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영적인 만족과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형식에 치우쳤고, 외식하였고, 법 조항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외형적인 것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리고 겉모양만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산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율법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종이 되어버리고, 죄의 종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로부터 개혁의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중세 카톨릭 교회는 제정한 성례전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7성례전이 구원에 이르는 통로라고 불렀습니다. 7성례는 영세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서품성사, 혼배성사, 종부성사입니다. 개신교에서 쓰는 말로 풀어 설명하면, 유아세례, 입교, 회개, 성찬, 목사임직, 혼인예식, 장례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똑같은 예식을 가지지만 7가지 모두를 성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세례와 성찬만 성례라고 부릅니다.
카톨릭 교회가 신앙문제에 가장 혼란을 준 것은 고해성사입니다 고해성사는 속죄소에서 고해사제와 신도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고해사제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는 데에 사제가 하는 일이 ‘사면선언’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제의 사면선언이 중세 후기 카톨릭으로 오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던 선언내용이 중세 후기에 와서는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라고 변질된 것입니다. 사제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사하여 주는 형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면선언이 교황청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로 등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 면죄부를 받기 위하여 돈을 지불하였고,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도록 하는 면죄부까지 팔았던 것입니다. 비싼 것은 더 많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결국 돈으로 구원을 얻는 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조직, 교황권, 성례전이 강조되니까 중세 후기 카톨릭 신앙관은 ‘공로주의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로주의 신앙이란, 신앙의 외형적 조건에만 집착한 나머지 신앙이 있고 없음이나 믿음이 많고 적음을 교회가 제정한 양식에 따라 점수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사를 많이 드리면 많이 드릴수록 그 공로가 쌓인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마일리지나 포인트 쌓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교황청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면 공로가 더 쌓이는 것으로, 로마에 있는 여러 성지에 가서 미사를 드리면 더 공로가 쌓이는 것으로, 면죄부를 사서라도 공로 마일리지를 쌓으려고 했던 잘못된 신앙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고민과 갈등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공로주의 신앙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 하는 의문과 고민입니다. 그러던 루터는 성경을 읽다가 오늘 본문 말씀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는 말씀의 참 뜻을 깨달으면서,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세웠습니다. 이신칭의란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일컬어진다.”는 의미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로마서 3장 28절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아 의인이 된다는 것이 구원론의 핵심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악마가 루터에게 말했습니다. “마르틴 루터, 너는 큰 죄인이다. 그러므로 너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루터가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잠깐 한 가지씩만 말하자. 나는 큰 죄인이다. 네가 나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은 없지만, 그 말만은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고백한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악마가 또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 너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루터가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서 물러가라!” 루터는 그렇게 악마를 물리쳤고, 악마는 루터를 죄인으로 몰아서 넘어뜨리지 못했기 때문에 울면서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죄와 구원의 은혜를 실제로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체험으로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이 외쳤던 종교개혁의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ratia!” 즉 “오직 신앙, 오직 성경, 오직 은혜!”입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연결하면, 인간이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신앙(믿음)입니다. 신앙, 믿음이 아닌 것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을 얻게 하는 신앙의 거울은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을 근거하지 않는 것은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율법으로도, 공로로도, 사람의 지혜로도, 그 어떤 능력으로도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죽으셨고, 그 대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라고 선언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신앙은 “내가 믿는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나는 잘 될 것을 믿는다!” 이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앙과 신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복음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여겨주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의 신앙입니다. 복음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게 하는 신앙이지,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복음의 신앙이지, 내 뜻과 내 생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끌어당겨서 세상에서 자기 뜻을 펼쳐 성공하는 데에 도구나 수단이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의 생각이나 기대를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전적인 주권과 인도하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고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반응은 우리 삶 전체에서 진행되는 계속적인 과정이어야 합니다. 17절 상반절,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원문의 뜻은 “믿음에서부터 믿음까지” 또는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향해” (NRSV)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의 믿음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우리의 믿음은 단지 마음 속 믿음으로 머물지 않고 실천적 믿음, 순종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시작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마지막도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시작하여 다른 것으로 바뀌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되어 잘못된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세교회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는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개신교란 개혁교회입니다. 개혁정신을 이어받고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들의 신앙 중에 잘못된 신앙, 치우친 신앙을 바로 잡는 것 또한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신앙의 개혁입니다.
작금에 일어난 자살 사건의 연예인들이 교회를 다니던 연예인이 많았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정 다빈, 유니, 최 진실 씨 모두 교회를 다녔습니다. 드러난 사례가 그렇지, 자살하는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자살 충동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시기를 겪게 되면 그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은 생각으로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나 욥과 같은 의인도 죽기를 청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크리스천이 절망과 고통의 시기에 그 해결책으로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택하는 이유로 본질에서 벗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소위 번영신앙, 축복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없어지고, 이 땅에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신앙을 말합니다. 축복신앙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감기도 안 걸리고, 사업도 번창하기만 하고, 자식들도 명문대학에 척척 붙고, 남편은 승승장구 승진만 하고, 부동산 투기한 것이 몇 배씩 오르고, 모든 어려움은 싹~ 없어지는 만사형통의 삶을 살게 된다고 믿는 신앙이 번영신앙, 축복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보이는 것의 복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신앙은 삶에 고통이 있고, 고난이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식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런 번영신앙, 축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처음에는 어려움 후에 다가올 축복을 기다리며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지속되고, 자신이 기다리던 복이 오지 않을 경우 믿음의 끈을 놓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문제와 고난과 환난을 당하면 그것을 감당을 못합니다. 사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나무젓가락이 따뜻한 음식을 집을 수는 있지만 숯불을 집으려면 그냥 타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번영신앙, 축복신앙은 고난의 불을 감당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하는데 복 받을 때만 이어지고 고난을 받으면 끊어지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믿음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속되지 못하는 신앙, 한쪽 신앙,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나무젓가락 신앙이 아니라 쇠젓가락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으면 저주와 멸망, 사망에서 구원을 받고,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도 베푸시고, 기도도 응답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에게 고난도 있고, 환난도 있고, 슬픔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닥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때부터 탄탄대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매일대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의 실재와 악의 세력 때문에 문제도 만나야 하고, 슬픔도 겪어야 하고, 고통과 환난도 만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에는 걱정하던 것이 걱정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전에는 문제가 되던 것이 문제가 없어지길 바랍니다. 전에는 환난을 겪었지만 환난을 미리 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내 욕심과 잘못으로 고난을 겪었지만 이제는 고난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성경은, 예수님을 믿을 때 염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구하여 문제를 줄이고, 믿음으로 문제를 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환난가운데에서도 즐거워하며 그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어 소망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고난 가운데에서 인내하며 연단을 받아 정금처럼 나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은 모든 어려움이 없어지는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환난이 없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환난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곧 복음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고, 24절에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일컬어졌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의인의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의의 옷을 입었으니 의인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속도 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속이 의로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속이 의로워지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삶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기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극복하고, 믿음을 말미암아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교우 여러분,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외쳤던 종교개혁가들의 정신과 신앙을 되새기면서 바른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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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6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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