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까닭 (누가복음 19장 1-10절) |
벼룩에 대한 이런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벼룩은 본능적으로 앞에 있는 벼룩을 따라가는데, 앞서 가던 벼룩이 원을 돌면 뒤에 있는 벼룩도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의 벼룩도 마찬가지로 앞의 벼룩을 따라 모든 벼룩이 죽는 순간까지 원을 돌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왜 해야 하는지 생각지 않고, 그냥 남이 하니까 나도 하지는 않습니까?
레밍(lemming)이라는 쥐가 있습니다. 나그네쥐라고도 부릅니다. 크기가 작고, 다리가 짧고 부드러운 털을 가졌습니다. 이 레밍쥐는 디즈니의 영화《하얀 광야》에서, 수십 마리의 레밍이 고의로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이렇게 레밍쥐는 집단 자살로 유명합니다. 눈이 나쁜 이 쥐는 떼를 지어 이동하다가 바다를 보고 쉽게 건널 수 있는 작은 강으로 착각해서 제일 앞의 쥐가 뛰어들면 그 다음 쥐도, 그 다음 쥐도 계속 뛰어들어 ‘자살’ 현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벼룩이나 레밍쥐들처럼 죽음을 향한 행렬을 따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고, 더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서로를 향한 부끄러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자기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범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 중의 하나는 사람이 미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사람이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어떻게 살면 건강한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이것저것에 미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엇을 소유해야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해야 행복해지는 줄 알고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누군가 그렇게 앞서서 살아가니까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묻지도 않은 채 달려갑니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어려움과 위기는 앞서 달리던 사람들이 오직 돈! 오직 이윤! 오직 자산 증식! 이라는 미명하에 달려가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뒤 쫓아 가다가 바다를 강인 줄 알고 뛰어든 격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려면 투자하고, 부동산 사들이고, 펀드하고, 주식에 투자하여 단기간에 대박을 터뜨리려고 너도나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2000년 전에 뛰어난 재산 증식을 이루며, 탁월한 재테크의 달인이었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려는데 삭개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당시에 로마의 통치 하에서 세리장이 되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하여 모든 것을 올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그 지역 사람들 중에서 세리들을 뽑았습니다. 세금을 걷기 원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를 로마 정부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지역특산물로 올리브기름과 대추야자열매, 전나무가 유명합니다. 애굽과 유대를 잇는 상업도로에 위치한 곳이며, 예루살렘을 가려면 거쳐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세금징수원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명당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오직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그까짓 욕먹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증오하는 것쯤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오직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민족의 반역자로 불려지는 것도 감수했습니다. 도덕도, 양심도, 민족도, 돈만 벌 수 있다면... 오직 돈만 많이 모을 수만 있다면, 그 돈으로 무엇이든 다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마음의 평안도, 만족도 많아지고, 돈이 늘어나는 만큼, 자신감도 늘어나고, 돈이 풍성해질수록 행복도 풍성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삭개오! 그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값을 못했던 사람입니다. 반대로 불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여리고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세리도 싫어했는데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으니 사람들이 더더욱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더 이상 그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고, 그의 집에 방문하셨고, 그리고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절반을 떼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또한 그는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속인 것에 네 배를 갚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모세 율법을 진지하게 수용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1절은 가축 도둑에게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를 갚도록 규정했습니다. 사해사본과 로마법도 네 배 상환의 의무를 담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율법의 가장 엄한 형벌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적용하여 진정한 회개의 결과를 보였습니다.
삭개오는 마음의 회개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진정한 회개는, 머리가 회개해야 하고, 가슴이 회개해야 하고, 돈지갑이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삭개오는 진정한 회개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자기 속마음으로 회개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가던 죄의 길을 돌이키십시오. 자신의 회개를 드러내십시오. 죄를 짓던 옛 사람의 방식으로 살던 것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자신의 삶에 새 주인을 맞았기 때문에 생활방식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동안 살던 방식으로 행복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처럼, 우리의 낡은 방식, 우리의 옛 습관, 우리의 고집스런 생각들, 우리들의 하나님 없이 살던 시절에 행하던 행위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옛 방식 그대로 살아가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삭개오에게 일어났을까요? 삭개오가 구원을 받게 되는 데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떤 계기가 삭개오의 삶을 바꾸어 놓았을까요? 사건의 시작부터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와 있었습니다. 삭개오도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전직 세리였던 사람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세금 징수 구역인 여리고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최근의 따끈따끈한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일어난 일들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한 행동들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며 말씀하심으로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가 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까요? 3절 말씀처럼,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까닭은 그저 키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4절 말씀처럼, 삭개오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까요? 그가 눈에 띄면 띌수록 사람들의 구설수는 더 많아지고,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 보이면 잘 보일수록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당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보려고 나온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를 돌무화과나무위에 올라가도록 만든 진정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200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사람은 1997년 말 IMF 경제위기 때 실직을 해서 아이 미술학원 보낼 돈 6만원이 없을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답니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밖에 나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다른 사람들의 돈을 맡아 대리로 투자를 해주었습니다. 그때는 투자만 하면 주가가 올랐기 때문에 돈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돈을 많이 벌어 주니까 고맙다는 사례로 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벤처기업하던 친구에게 빌려주었더니, 그 벤처기업 주식이 너무 많이 뛰어서 가지고 있는 주식의 시가를 합해 보니 1백억이나 되었답니다. 부럽지요?
이 사람이 ‘내가 부자가 되었는데 셋방살이가 웬 말이냐, 부자처럼 한번 살아보자’고 마음먹고 외제 승용차를 두 대 샀습니다. 그리고 10억짜리 집도 장만했습니다. 골프도 배우고 회원권도 구입했습니다. 대박을 터뜨려 돈을 벌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의 대접이 달라졌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구나’하고 흡족해했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고민거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부부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형편이 어려울 때는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얼마나 힘들어서 그러느냐고 꿀물을 타주던 아내가 남편이 취해서 들어오면 어떤 여자랑 술을 마시고 왔느냐고 윽박지르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검소했던 아내가 가정부를 들이고, 골프를 치러 다니고 100만원이 넘는 비싼 옷을 사 입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한테 한 턱 내는데 몇십만원씩 썼습니다. 급기야는 아내에게 애인까지 생겼습니다. 아이들도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과자 한 봉지만 사들고 들어가도 고마워하던 아이들이 고가의 게임기를 사줘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형제간에도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100억이나 벌었다면서 사업자금 좀 안 보내 주냐고 동생들이 서운하게 생각하는 등 가정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신문에 ‘셋방 살다 돈벼락, 병든 가족관계’라는 기사로 실렸었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는 패륜아도 생기고, 돈 때문에 부부가 헤어집니다. 얼마 전에도 대기업의 아들이 이혼을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하게 잘 살 것 같은데 왜 그럴까요? 돈 때문에 부모자녀가 원수가 되고, 형제동기간이 원수가 됩니다.
돈은 악한 것인가요? 돈이 악한데 삭개오가 악한 돈을 모아들였기 때문에 불행했던 것입니까? 여러분, 솔직히 말해 봅시다. 여러분은 돈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저는 돈이 좋습니다.
불교는 무욕을 강조합니다. 욕심을 버리라, 욕심을 끊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욕의 종교가 아닙니다. 욕심을 전환하는 종교입니다. 가지지 말라는 종교가 아니라 가지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많이 가지되 좋은 일에 많이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 돈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많이 가진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악할 수도 있고, 선한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돈은 악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부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복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합니다.
얼마 전 서울의 양천구청 복지과 안병철씨는 05년 3월 25일부터 08년 8월 21일까지 총 72회에 거쳐 26억4천4백만 원의 공금을 본인 및 부인과 어머니 명의 계좌 5개를 이용해 인터넷 펌뱅킹의 방법으로 횡령하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장애인에게 지급되어야 할 돈을 빼돌린 것입니다. 그가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녔답니다. 8급 공무원이. 이런 사람은 더러운 부자가 되 버렸습니다. 삭개오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것도 더러운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돈만을 위해 돈의 노예가 되었고, 돈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또한 돈에 대한 바른 태도와 돈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돈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과 소외와 공허와 문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돈 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의 정말로 소중한 것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 잃어버리면 인생에 불행이 시작되는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진실, 사랑,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동과 감격, 감사의 마음, 인생의 의미 등입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은 그의 마음속의 허허로움 때문입니다.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허로움, 아니 돈으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허허로움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공허라고도 합니다. 명품 옷, 명품 가방, 명품 구두, 명품 화장품, 명품 속옷, 지갑에 돈이 가득 들어있는 사람들이 아무 부족함을 못 느낄 것 같지요? 그런데 그들은 행복해야 하는데 왜 딴 짓을 할까요? 물질의 풍요가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하니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오직 돈만을 추구하다가 사람사는 맛, 세상사는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 사는 맛을 느끼며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데 삭개오는 사람 사는 맛은 없고, 돈과 사는 맛만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 사는 맛과 세상사는 맛이 없다는 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삭개오! 그에게는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감동과 감격이 없었습니다. 감동과 감격이 있어야 행복감을 느낍니다.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고,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며 살 때 감동과 감격이 있고, 그 때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오직 돈! 돈! 돈! 하는 인생에는 행복이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집에 가서 꽃이 예쁘게 핀 난 화분을 보고서, “저 난이 얼마짜리예요?” 라고 묻는 사람은 감동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이 얼마짜리인가에 관심이 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감동과 감격이 없습니다. 돈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돈, 돈, 돈! 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채울 수 없는 그의 허허로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 그동안 들어온 소문대로 참 인생의 진리를 듣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사람 사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허로움과 공허, 그 자리에 가득 채워줄 인생의 의미와 목적, 기쁨과 보람, 감동과 감격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그런 갈망이 있습니까? 사람답게 살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한번뿐인 인생을 의미 있게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벼룩처럼 앞서 살다간 허무한 인생의 선배들처럼 그렇게 뱅뱅 돌다가 죽겠습니까? 아니면 바다를 강으로 착각하여 뛰어내린 레밍쥐들처럼 인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겠습니까?
삭개오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오직 돈을 위하여 양심도, 도덕도, 인륜도, 나라도, 신앙도 다 무시해버리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로는 오직 돈, 돈, 돈! 하며 속물근성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들도 삭개오처럼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데 방해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신체적인 문제는 삭개오의 키가 매우 작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방해요소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설상가상으로 더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는 데 방해하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나무위에 올라간다는 것 또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면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너무도 작아서 놀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의 속에는 키에 대한 열등의식이 가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키 때문에 나무위에 올라간 것은 자신의 열등의식을 넘어서야 하는 행위였습니다.
여러분, 열등의식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면서도 열등의식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창피하게 생각하여 하나님께 내어놓기를 주저한다면 여러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삭개오의 체면이 예수님을 찾는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은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체면과 남들의 눈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예수님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런 체면을 넘어섰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데 방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데 극복해야 할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주님을 찾기 위해서,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주님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넘어서야 하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나무위에 올라가는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합니다. 무엇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를 합니까?
7절에 보면,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가신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의 우두머리요,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했던 삭개오의 집에 가신다고 하니 사람들이 불평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말 때문에 삭개오의 집에 가는 것을 고민하고,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삭개오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삭개오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의 영혼 깊숙이에 보이는 갈증을 보았습니다. 갈망의 눈을 보았습니다. 행복의 모조품을 붙잡고 사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헤어 나오고 싶어 하는 삭개오의 탄식의 숨결을 느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에 대해 조롱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간구할 때 장애요인이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열심히 섬기는 것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나누고 베풀 때에 수근 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언제나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있었고, 사도들 때에도 있었고, 우리들의 선배들의 시절에도 있었고, 나에게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말만 많은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울에 입을 올려놓고 심판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런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것입니다. 지저분하고 유치한 말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주지 못하는 의미와 생명과 만족과 감동, 감격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오직 돈만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십니다. 돈 때문에 메마르고 텅빈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힘들게 하는 요인을 극복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끼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십시오. 돈으로부터 자유하고, 복을 나눠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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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0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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