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호심경- 하나님의 전신갑주(II) (에베소서 6장 13-17절) |
한 회사원이 자동차 서비스 회사 서울 본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경기 고양시에 있는 회사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답니다. 북적거리는 서울 본사와는 달리 고양시에 있는 창고는 건물은 큰데 근무자들은 얼마 되지 않아 분위기가 썰렁했습니다. 그래서 기분도 달랠 겸 창고 옆에 오리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퇴근하기 전에 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에 넣어줬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해보니 오리가 물속에서 죽어있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이리저리 오리를 살펴봐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은 없었습니다.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왜 얕은 물에 빠져죽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오리를 산 곳에 가서 따졌습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은 오리를 판 주인은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 오리는 양계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이기 때문에 수영을 할 줄 모르고, 게다가 그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서 물에 잘 뜨지도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리발에 물갈퀴가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여 수영을 할 줄 모르고, 오리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들어가면 깃털이 다 젖어서 수영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아무리 오리라도 물속으로 들어가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빠져 죽은 이 오리 얘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물갈퀴가 있다고 해서 모든 오리가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다 영적인 수영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 모두 다 사탄의 공격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잠수함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도 안전한 것은 물로부터의 보호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아시지요?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즉 사탄과 마귀와 악영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이 땅의 삶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적의 공격에 대비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고 승리하려면 보호 장비를 착용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적 싸움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주셨는 데 두 번째 의의 호심경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호심경을 착용하고 전쟁에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호심경이란 무엇일까요? 왜 호심경을 붙여야 하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일까요?
호심경은 로마 군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1 전신갑주 그림 보여주세요) 그것은 목 주위로부터 허벅다리까지 군인의 몸의 앞뒤를 덮어 주는 갑옷입니다. 특별히 가슴 부분의 심장과 배 부분의 내장을 보호하는 장비입니다. 옛날에는 동물의 뿔이나 발굽을 얇게 썰어 두꺼운 헝겊에 넣어 만들기도 했는데, 보편적인 것은 쇠나 구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사에게 아주 중요한 장비이기 때문에 이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군사는 없습니다. 개역성경에는 흉배라고 번역했습니다. 호심경을 요즘 말로는 방탄복, 방탄조끼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 가운데 머리를 빼고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기관은 모두 가슴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심장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의미하고, 내장은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정리해서 표현하면, 호심경이 심장과 신체 내장을 보호하는 장비이므로, 의의 호심경은 우리의 양심과 생각과 감정을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영적 군사 장비를 뜻합니다.
사탄은 참소하는 자입니다. 참소한다는 것은 흠집을 내고 고해바치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들어 고소합니다. 우리의 불의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죄책감을 계속 갖도록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공격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것을 꺼리게 하고 두려워하게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숨는 것처럼, “내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을 어떻게 가서 뵈올까?”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까?” “나같이 자꾸만 죄를 짓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실꺼야. 그러니 이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이것은 사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떼놓으려고 공격하여 우리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생각들입니다.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오려고 하는 데, 사탄이 마음을 공격합니다. “네가 일주일 내내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지도 않았으면서 교회는 무슨 교회야? 하나님께 예배는 무슨 예배야? 하나님께서 네 예배를 받아주실 것 같아?” 토요일 저녁에 ‘내일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데... ’하면서 생각을 하면, 주중에 범한 큰 죄가 생각이 나서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큰 죄를 짓고 하나님을 어떻게 뵐 수 있나... 다음 주에 죄를 짓지 않고서나 교회에 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솔직해 집시다. 정말 우리가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서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가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께 자신있게 나아갈 수 있는 의로운 상태란 어떤 상태입니까? “이 정도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지. 이 정도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이 정도면 하나님을 만나기에 부끄럽지 않을 거야...”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 정도면’이라는 그 상태가 정말 하나님께 떳떳한 상태일까요? 하나님께서 보시면 저와 여러분의 의의 상태는 거기가 거기입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사탄은 과거의 우리의 죄와 실수들을 계속 기억나게 해서 우리 마음을 괴롭힙니다. “너 같은 죄인이 하나님을 믿는 다구?” “너 같은 자가 무슨 목사야?” “너 같은 자가 무슨 양정교회 집사야?” 너! 지난번에 이런 실수했지? 또 실수하면 어떻게 하려구 그래? 자신 있어?”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이런 기억들 때문에 우리는 쉽게 주저앉습니다. 쉽게 힘이 빠집니다. 순식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저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집니다. 그러면서 “그래,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정말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래,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어?” 자신의 죄와 허물이 참소를 당하면 우리의 감정은 죄책감과 패배감과 자괴감에 순식간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실수와 허물을, 우리의 작은 죄든지, 큰 죄든지, 모든 죄를 예수님이 보혈로 깨끗이 씻어서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우리는 넘어집니다. 사탄의 공격으로 영적 심장이 찔린 사람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사탄의 공격을 방어할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심장 즉 양심과 생각과 마음을 보호할 수 있는 호심경을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격을 받으면 백이면 백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사탄이고,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물론 사탄의 입장에 서 본다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 공격이 효과적으로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이려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고 싸움에 나오는 것을 사탄이 좋아하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호심경 없이 싸움에 나서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무방비상태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호심경이 아닌 것을 호심경으로 알고 착용한 채 싸움에 나가도록 하는 것일 것입니다. 가짜 호심경을 착용하고서 그것이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고 믿는다면 사탄은 분명히 기뻐할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대심방을 하는 중에 전화를 하려고 하는 데 자기 휴대폰이 배터리가 다 되어서 전화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 권사님께 “권사님, 휴대폰 가지고 계시면 한 통화만 쓸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쾌히 쓰시라고 하면서 가방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 주더랍니다. 그런데 휴대폰을 받은 목사님이 권사님을 보고 깔깔대며 웃더랍니다. 왜냐하면 권사님이 가방에서 꺼내 준 휴대폰은 휴대폰이 아니라 텔레비전 리모콘이었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은 아침에 심방 나오려고 바삐 준비하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리모콘이 휴대폰이라고 착각을 하고 넣어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리모콘을 휴대폰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리모콘으로 전화를 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호심경을 착용해야 합니다. 가짜 호심경이 우리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자기 의(義)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가짜 호심경을 착용한 군사와 같습니다.
자기 의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신뢰를 뜻합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정신을 뜻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의롭다, 의롭지 않다고 나눕니다. 그 결과 자신을 의롭다고 평가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인데 그는 따로 서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다고,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드린다고 하면서 뻐기며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기도했고, 또 한사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사실 죄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실제로 지은 죄보다 적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와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를 기억하지 못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할 때 자신이 더 의롭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에 대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인간이 죄와 악에 대해 얼마나 쉽게 노출되어 있는지, 인간이 이 세상의 충만한 죄의 실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알지 못하여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안데르센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에 나오는 임금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멋진 옷만을 입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입니다. 이 임금님께 사기꾼 재봉사 둘이 찾아와서 어리석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최고의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 임금은 그 옷을 어서 만들라고 합니다. 이차저차해서 임금님께 그 옷을 가져왔는데 보니까 옷이 안 보입니다. 사기친 옷이지요.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보지 못하는 옷이라고 하니까, 임금은 그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행차를 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소리를 칩니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사실 만들지도 않은 옷, 입지도 않은 옷, 가릴 수도 없는 옷을 입고서 입었다고, 가렸다고, 아름답다고 착각하며 행차하였던 것입니다. 이 동화의 벌거숭이 임금의 모습은 마치 자기 의를 가지고 영적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 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의가 아니라 자기를 수치스럽게 하고, 교만하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 의입니다.
자기 의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기 열심이 지나쳐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서는 사람입니다. 자기 열심이 지나치다 보니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생각을 무시하고 앞서 나갑니다. 그 결과 반드시 사탄의 직격탄을 맞습니다. 사탄은 정확하게 그 부분을 공격합니다. 처음에 사탄의 공격은 미혹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비교해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비판하고, 비방하거나 정죄하게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충만한 사람은 자기 의로 호심경을 삼고 신앙생활 하다가 사탄의 본격적인 공격을 받게 되면, 그의는 쉽게 깨지거나, 갈라지거나, 뚫려버립니다. 그 결과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왜 나를 몰라줄까?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왜 장로로 안 뽑아 주실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데 안수집사로, 권사로 안 뽑아 줄까? 하나님께서는 나 같이 열심있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않을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여 하나님께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하나님에 대한 열정, 갈망이 식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떠납니다. 이것이 사탄이 원하는 결과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몸은 화살과 칼과 창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연약합니다. 무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호심경을 붙이고 전쟁에 나가야 상처가 나지 않고, 심장과 목숨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의란 연약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초라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의의 호심경을 붙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호심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참소하는 사탄을 잠잠케 할 수 있는 장비를 주셨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훼방하는 사탄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장비로 의의 호심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일컬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무엇보다도 먼저 의롭다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로마서 3장 23-24절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5장 1절 상반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이 의는 내가 정말로 의로워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일컬어주시는 의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 덮어주고, 가려주고, 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이 의로 된 의의 호심경을 착용해야 합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그리스도교 고전 중의 고전이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는 한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에서 나와 천국에 이르기까지 겪는 역경의 길을 재미있게 그러나 아주 성경적으로 의미있고 영성 깊은 내용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몇 단계를 거쳐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 크리스천에게 아볼루온이라는 괴물인 무저갱의 사자가 나타나 “나는 멸망의 도시 주인이다. 그 모든 시민들이 내 백성들이다. 감히 내 영토에서 도망치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붉은 화염을 토해내며 공격을 합니다. 다시 멸망의 도시로 돌아가면 살려 주겠다고 합니다. 순례자 크리스천은 다른 왕을 섬기기로 맹세했기에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아볼루온은 자기가 있는 이 계곡에서 지나가던 크리스천들이 거의 다 죽었기 때문에 너도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빈정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임마누엘이 너 같은 놈을 백성으로 받아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느냐? 네가 임마누엘에게 충성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 여기서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이 묻습니다. “내가 언제 그분께 충성하지 못했다는 거냐?” 아볼루온이 크리스천을 노려보며 과거를 들먹이며 말합니다. 절망의 수렁에 빠졌을 때,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 사악한 잠에 빠졌을 때 귀중한 증거물을 잃어버렸고, 사슬에 매여 있는 사자들을 만났을 때, 자만심에 부풀었을 때, 크리스천이 천국으로 향하여 오는 과정에 지었던 수많은 죄들을 기억나게 하며, 그것들이 바로 임마누엘에게 불충한 거라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때 크리스천이 “네 말이 옳다.” 수긍을 하면서 말합니다. “아니, 너는 내가 많은 불충과 허물과 잘못을 한 것 중 그것밖에 모르는구나. 그러나 내가 섬기는 왕은 자비가 충만하시므로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용서하실 것이다.” 그랬더니 아볼루온은 괴성을 지르며 발악을 하면서 공격합니다. 오랜 싸움 끝에 마침내 크리스천이 결정적으로 “우리는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승리한다!”고 하며 아볼루온의 옆구리 깊숙이 칼을 찔러 넣습니다. 결국 아볼루온은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바로 크리스천이 아볼루온에게 대답한 말이 의의 호심경입니다. 사탄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된 호심경때문에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사탄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죄책감과 패배감과 영원한 저주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의로 보호받게 되었으니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고 하시면서, 의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언제나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오셨고,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시고, 죄를 지어 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252장 가사“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의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의 의로움을 가지고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나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내 죄를 위하여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나를 정결케 해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담대히 살아갑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를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열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사탄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공격하여 양심을 습격하고, 생각을 사로잡고, 감정을 어둡고 침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의의 호심경을 착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사탄이 공격하는 화살마다, 칼마다 백발백중으로 우리를 찌를 것입니다. 십점 만점에 십점입니다.
교우 여러분, 죄 때문에 사탄이 여러분과 하나님을 멀리 떼어놓으려고 합니까? 죄 때문에 기도가 잘 안 됩니까? 죄 때문에 영혼이 불안하고 공허합니까? 하나님의 의의 호심경을 확인하십시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과 마음과 감정이 쉽게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우리의 적 사탄, 마귀에게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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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22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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