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사람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산 넘어 또 산이 예요.” 시집 간 딸이 친정에 와서 어머니에게 불평을 합니다. 어머니는 딸을 주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세 개의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불을 켰습니다. 물이 끓자 어머니는 첫째 냄비에 당근을 집어넣었습니다. 둘째 냄비에는 계란을 집어넣었습니다. 마지막 냄비에는 커피 가루를 집어넣었습니다. 잠시 후 그릇 세 개를 꺼내더니 거기에 각각 뜨거운 물에서 끓였던 것들을 집어 꺼내 놓았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무엇을 하시려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때까지 말씀이 없으시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이것들은 모두 뜨거운 물이라는 똑같은 장애물을 통과했단다. 하지만 이것들은 각기 다르게 반응을 했지. 당근은 들어갈 땐 힘 있게, 멋있게 들어갔지만 뜨거운 물을 만나고는 말랑말랑해지고 약해졌구나. 계란은 그 자체로는 아주 약하지. 하지만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을 때 그 얇은 껍질이 힘을 다해 속의 액체를 보호했지. 그래서 그 안이 딱딱해졌단다. 커피 가루는 아예 그 물 자체를 바꾸어 놓았단다.” 어머니는 딸을 바라보며 질문을 했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고난의 뜨거운 물속에 들어갈 때가 있단다. 그런데 너는 당근, 계란, 그리고 커피 가루 중 어떤 것이 되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고난을 만납니다.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겪게 되는 고난을 어떻게 겪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지난 주 설교 중에 성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책에서 했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모든 사람이 무슨 고난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 똑같은 미풍이 불지만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거룩한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 나무에 불면 / 녹색의 바람이 되고 / 꽃에 불면/ 꽃바람이 된다. / 방금 / 나를 지나간 바람은 / 어떤 바람이 되었을까?” 하반신 마비로 살아야 했던 일본 시인 호시노의 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불어온 고난의 바람이 여러분을 지나가면서 어떤 바람이 되고 있을까요?
고난이란 괴로움과 어려움 혹은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고난은 크게 세 종류의 형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형벌적인 고난’ 또는 ‘인과응보적인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비극적인 고난입니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로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두 번째는 ‘결백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자기는 잘못이 없는 데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 부당하게 주어지는 고난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다른 이를 위한 고난입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구속적인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고난과 두 번째 고난을 말할 때에는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고난을 받고 싶어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고난은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고난 받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세 번째 고난은 억지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택과 결단으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난을 겪는 사람,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고난을 대하는 자세와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고통을 주는 고난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이 없기를 바랍니다. 슬픔, 고통, 괴로움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통과 아픔을 피해 달아나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하며, 심지어는 환각제나 알코올을 통해서라도 고통을 피하고자 합니다. 위기에 처한 부부는 문제에 직면하여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미련 없이 헤어집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부끄러워하며 감추기까지 합니다.
폴 브랜드 박사가 말하기를, 미국 환자들은 그가 겪어 본 어떤 환자들보다도 더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을 맞이할 준비가 훨씬 덜 되어 있었고,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진통제 시장은 연간 63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고, 텔레비전 광고들은 더 좋은 효능의 더 신속한 진통제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불편하지 않은 것, 편안 한 것, 고통이 없는 삶만을 추구하다보니까 약해질 데로 약해진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고통에도, 아주 작은 어려움에도, 아주 작은 고난에도 쉽게 무너집니다. 포기합니다. 절망합니다. 여러분, 살기 좋은 복지국가일수록 자살율이 높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 그럴까요? 고통을 모르는 병은 우리 내면에 자양분을 없애고 삶의 매력을 줄이고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마저도 싱싱하게 체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생의 깊은 맛이 상실되어가고, 성취감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공허함과 지루함이 만연되어 갑니다. 이것은 고통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피하려고만 한 결과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구, 진짜 고통이 뭔지 경험을 못해 봤으니 저런 소리를 하지. 고통에 대해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이야기야. 직접 고난을 겪어보라구!” 그 말의 뜻을 저도 이해합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몸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몸을 향한 경고입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의료선교사로서 인도에서 20년, 미국에서 30년, 모두 50년을 고통이 없어 고통당하는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분입니다. 그의 자전적인 글인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에는 탄야라는 아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갓난아기 때는 건강한 것 같았는데, 17개월이 넘어가면서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엄마가 방에 가보니 바닥에 앉아 하얀 종이 위에 손가락으로 빨간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탄야의 손가락 끝에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피로 그림을 그리고 놀았던 것입니다. 그 아이 엄마가 소리쳤습니다. “탄야!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그러자 탄야는 엄마를 보면서 싱긋 웃더랍니다. 그때 탄야의 이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자기 손가락 끝을 이빨로 물어뜯어 그 피를 갖고 논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리 엄마가 볼기를 때리고 벌을 줘 가면서 손가락을 물어뜯지 말라고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답니다. 그 아이는 ‘고통에 대한 선천적 무감각’이라는 비공식 명칭의 희귀한 유전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탄야라는 아이만이 아니라 나병, 알코올 중독, 다발성경화증, 신경 장애, 척수 손상 등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매우 위험한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통은 우리 몸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신호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도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이유와 기원에 대해 분명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 고난에 대처하여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고난 속에서도 승리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승리로 이끄신 비결은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가시채를 배제해 버리기보다는 극복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고난을 받으며,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승리 할 수 있도록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함께 고난 받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우리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나 위로 받는 것으로 끝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해 도망가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고통을 못 느끼도록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성경 말씀은 고난 받은 사람이 그 고난을 겪어 낼 때에 얻게 되는 유익에 대해 말씀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신앙생활을 하면 고난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는 곳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마약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마약을 먹은 것처럼 세상 모든 고통과 고난을 잊어버리고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곳곳에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삶에 고난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0-11절에는 하나님께서 징계라는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려 하여 고난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연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광산에서 캐내어 온 광석을 제련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광산에서 캐낸 광석은 제련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단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훈련 받지 않고, 연단되지 않은 채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시인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자기 멋대로 살았다가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죄를 깨닫고, 잘못을 고치고, 인생의 불순물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인생의 고난을 만나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새롭게 변한 분들이 계십니다. 고난은 우리를 바르게 하고 정결케 해 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인생의 진리를 따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집니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 집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지게 되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밀접하게 사귀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합니다. 또한 고통과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더 깊이 보게 하고 더 높이 닿도록 하는 디딤돌입니다. 고난은 고통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저 하늘의 신령하고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게 하는 사닥다리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10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말씀대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온전케 되고, 굳건해 지고, 강하게 되고, 터가 견고해 집니다. 성숙해 집니다.
아프리카의 동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씨 고약한 벤 사독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긴 여행 중에 한 오아시스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반드시 죽여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괴팍하고 못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 주위엔 한창 자라고 있는 싱싱한 종려나무가 있었습니다. 심술궂은 벤 사독은 이 종려나무에 그만 눈을 찔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아주 무거운 돌을 집어 이 종려나무 위에 올려놓고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떠나갔습니다. 종려나무는 가지를 흔들어도 보고 몸을 구부려도 보며 그 돌을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땅 속으로 깊이깊이 뿌리를 내려 무거운 돌 무게를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종려나무는 오아시스의 깊은 수맥에 도달할 때까지 깊이 뿌리를 박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더 넓게 그늘을 지울 수 있을 만큼 잎이 무성한 큰 나무로 자라났습니다. 풍부한 물을 공급받고 따가운 햇볕을 받을 수 있었던 종려나무는 임금처럼 당당하고 기품 있는 종려나무가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벤 사독은 돌로 눌러두었기 때문에 그 나무가 제대로 크지 못했을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하며 그 오아시스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나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자랑스럽게 성장한 종려나무는 머리에 이고 있는 그 돌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벤 사독씨, 당신께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당신 심술 덕분에 내가 이렇게 튼튼한 나무가 되었으니 말예요.” 종려나무는 자신을 누르는 돌의 무게를 이겨내고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 결과 더 크고 튼튼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이런 유익을 줍니다. 고난 때문에 우리는 더욱 온전케 됩니다.
교우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보다 앞으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순간보다 영원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보다 마음, 정신, 영혼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이익을 남기는 것보다 유익을 얻는 일에 더욱 노력합니다. 여러분, 돈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에는 모든 것을 투자하면서 여러분의 인격, 여러분의 성품, 여러분의 영혼, 여러분의 신앙, 여러분의 영원한 삶을 위한 유익을 위해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고난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난을 통해 더욱 온전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영광을 줍니다. 고난을 이겨낸 사람은 영광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을 받을 소망을 갖고서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영광을 위해서 필수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 13절,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면서, 장차 받을 영광을 소망해서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영광을 얻게 될 소망을 붙잡고 고난을 견디어 내고, 고난을 이겨내고,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망은 우리의 현재의 고통과 슬픔과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고, 이겨낼 수 있는 인내를 주고,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 중에도, 고난 받는 중에도 소망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됩니다. 소망을 붙잡으면 됩니다. 굳건한 소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 소망 때문에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산모가 열 달 동안 뱃속에 아이를 키우고 해산 할 때, 그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고 해산 하는 것은 고통을 겪고 나면 새 생명이 태어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소망이 해산의 고통을 넘어서게 합니다. 이렇게 고통을 참고 희생할 수 있는 것은 희생 후에 이루어질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지금만 보지 말고 앞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라는 감정에만 휩싸이지 말고, 지금의 고난의 상황만을 쳐다보지 말고 믿음의 눈을 떠서 고난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내가 얻게 될 유익을 생각하고, 영광을 받을 것을 바라며 소망을 붙잡으면 고난을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난 중에 감사할 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감사는 꼭 필요합니다. 감사는 고난 받는 사람에게 신비한 힘을 줍니다. 감사 속에 고난을 해결하는 비법이 있습니다.
한스 셀리에 박사는 감정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개척자였습니다. 그는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을 찾다가, 걱정이나 우울증 같은 요인들이 고통을 유발하거나 이미 있는 고통을 심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가장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감정은 복수심과 비통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감사는 건강에 가장 유익한 유일한 반응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고통을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통에 대해 복수심이나 비통함으로 반응합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건 불공평해!”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네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이런 고난을 겪지 않을 텐데... 반드시 너에게 되돌려 줄어야! 내가 고통을 겪는 만큼 갚아 줄거야!” “감히 나에게 이런 고통을 줘! 널 부셔 버릴거야!” 이런 식의 반응들은 고통을 훨씬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합니다. 감사는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복수심과 비통함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난 속에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 받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려면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는 일,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어 이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고난을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신앙자세입니다. 믿음만이 고난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귀중한 두 군데의 말씀이 있는데, 그 하나는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한 군데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7, 18절,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대 원칙과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루어 나가는 자세와 방법의 말씀입니다.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이해되지 않아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신앙의 복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겪고 난 후에 주실 유익을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받을 영광을 소망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 중에 주시는 소망으로 인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심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악을 행한 결과로 고난 받는 것은 자신의 그릇된 행동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선한 사람이 고난 받을 때는 그 고난을 통해 좋은 것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받을 때는 괴롭고 힘들지만 그 고난을 이기고 나서 값지고 많은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영광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고난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입니다. 고난의 본을 보이신 주님을 따라 고난을 이겨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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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3월 2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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