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적 공동체 (마태복음 19장 3~12절) |
어느 노총각과 노처녀가 맞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맞선을 보기위해 만났으면 서로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해야 할텐데 노총각은 계속 주저주저하면서 말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제 이름은 철입니다.” 총각은 이름만 이야기 하고 성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처녀는 그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가 답답해서 물었습니다. “성은 뭐예요?” 노총각이 주저하다가 대답합니다. “전씨입니다. 전 철입니다.” 이 총각은 이름이 “전철”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친구들이 이름을 가지고 놀렸고, 사람들도 이름을 들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름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고, 맞선을 보러 나갔을 때마다 자기 이름을 소개하면 상대 아가씨가 깔깔거리며 웃는 바람에 몹시 기분이 상하여 맞선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그 결과 더 이상 진전이 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총각의 이름을 듣자 상대 아가씨는 그전 선보았던 그 어떤 아가씨보다 더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노총각은 얼굴이 벌게지면서 기분이 상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 아가씨가 웃음을 그치며 하는 말이, “잘 됐네요. 전 철씨, 제 이름은 호선이예요. 이호선! 전 철과 이 호선! 천생연분인 것 같네요.” 그래서 그 둘은 결혼했다나 어쨌다나... 여러분, 그들이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아니면 불행하게 살았을까요? 사실 이 질문은 질문답지 않은 질문입니다.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 어울린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쩌면 이름이 서로 잘 어울린다고 서로를 받아들이듯 서로 잘 맞추고 도와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시대별로 결혼을 하기 위해 청혼하는 것도 변천한다고 합니다. 1950년대는 결혼 당사자에게 청혼을 하지 않고 양가 부모들이 사돈 될 사람에게 “이 아이들 결혼시킵시다.”라고 말했답니다. 60년대에는 남자가 여자 부모에게 찾아가서 “이 사람 저 주십시오.” 70년대에는 상대에게 “나랑 결혼해 주겠소? 밥 굶기진 않겠소.” 또는 장인에게 “밥 굶기진 않겠습니다.”라고 청혼을 했습니다. 80년대에는 상대에게 “우리 인생을 함께 꾸려 갑시다.”라고 했고, 90년대에는 “아침마다 당신이 해 주는 밥을 먹고 싶어.”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내 아를 나도!”라고 했고, 요즘에는 “우리 동거한지 3년인데 이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애두 갖자구.” 그런답니다. 급격한 사회변동과 가정 해체 현상을 빗댄 이야기입니다.
현대사회는 급격한 사회 변동을 겪으면서 모든 면에서 다양해졌습니다. 직업의 종류만 보더라도 현대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분야가 많고 다양한 일들이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다양한 변화가 계속적으로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현대사회가 굉장히 다양해지는 만큼 현대사회의 가정도 다양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가족 구성원들의 구조와 고용 구조, 혼인 상태에 따라 독신 가족, 동거 가족, 자녀가 없는 맞벌이 부부 가족, 자녀가 있는 맞벌이 가족, 편부모 가족, 재혼 등으로 이루어진 혼합 가족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는 국제결혼을 하여 이룬 다문화 가정까지 생겼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미 결혼한 분들 뿐만 아니라 미혼인 분들, 이혼한 분들, 재혼한 분들 모두가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이 부분을 정리하고 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겨 이혼하려고 할 때, 그리고 다시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해결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이혼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혼에 대한 대답만을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결혼 제도를 누가 만드셨는지, 그리고 결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일 마지막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고,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갈비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 하와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고 오셔서 결혼을 시키신 말씀이 나옵니다. 최초의 결혼식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 아담과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중매를 서셨고, 하나님께서 주례를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결혼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문 4절, 5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본문 6절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혼의 의미와 결혼 제도가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니까 결혼했다가 사랑하지 않으니까 헤어질 수 있는 것이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은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동물의 짝짓기처럼 말합니다. 결혼을 종족 번식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종족 번식을 위한 목적이 결혼의 근본적인 특성이라면 차라리 다른 동물처럼 짝짓기를 하게 하는 것이 더욱 종족이 잘 번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족 번식은 결혼의 주된 목적이 아니라 종속적인 목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이 성적인 연합을 위한 것으로 말합니다. 물론 결혼은 성적인 연합을 하나의 중요한 의무와 기쁨으로 하는 연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성적인 연합 보다는 크고 포괄적인 것입니다. 결혼은 신혼여행에서 첫날밤을 지내었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주례로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서로 약속을 하고, 언약적인 관계가 될 때, 신랑, 신부가 부부가 된 것을 선포하는 순간, 결혼이 완전히 성립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의 신성한 제도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언약의 큰 틀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혼의 언약을 함으로 부부가 되고, 그리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언약적 공동체입니다. 언약적 공동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담긴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기구는 가정과 교회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언약적 공동체입니다. 교회 또한 언약 공동체입니다. 가정이 언약적 공동체라는 말은 가정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보여주고, 맛보고, 이루어가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두 당사자가 서로를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하기로 한 구속력을 가진 약속입니다. 언약적 공동체란 가정이 이 세상을 향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복을 받아 누리는 가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 구원이 중요합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느냐 하면, 결혼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결혼을 왜 했느냐? 또는 나는 왜 결혼하려고 하느냐?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면, 자신의 결혼관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때가 되었으니까 결혼한다, 또는 옆구리가 허전해서 결혼한다, 밥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다, 남들 결혼하는 것을 보니 나도 결혼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결혼한다,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하도 결혼하라고 성화해서, 또는 결혼해서 애도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어서 결혼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런 이유에서 결혼하는 것이라면, 결혼에 대해서 온전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고, 결혼의 목적을 바르게 알지 못한 경우입니다.
결혼의 출발은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 혼자 살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결혼을 하게 하셨습니다. 서로 돕는 배필이 되도록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동반자 관계를 위해서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결혼을 동반자 관계의 언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돕는 배필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돕는 배필이라는 뜻입니까? 밥해주는 것, 빨래 빨아주는 것, 아이를 낳아주는 것, 돈 벌어다 주는 것, 그런 것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결혼의 목적일까요? 서로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 17절에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인생의 목표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통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 질서와 창조 목적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며 사는 것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결혼의 목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인간다운 참 인간이 되도록, 서로를 돕는 것이 결혼의 목적입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그것도 서로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의 약점을 스스로 내놓고 도움을 청하고 또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장점도 주셨지만, 약점도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배우자의 약점이나 단점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체로 훈련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결혼의 목적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상대를 바라본다면 불행한 결혼생활이 될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환상만 있고 올바른 이해와 준비 없이 살아가다가 서로에게 실망하고 여기 저기 상처 받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 미혼자들이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중요한 가정 형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독신 가정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독신 이유는 다양합니다. 아직 배우자를 찾지 못한 경우,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니까 독신으로 사는 경우, 결혼 생활이 깨져서 혼자 된 경우, 배우자를 사별하여 혼자 된 경우, 신체적인 정신적인 질병으로 혼자 사는 경우, 특별한 목적을 위해 독신으로 사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독신을 싱글족이라고 부릅니다. 통계 발표에 따르면, 싱글족이 늘어나고 있는 배경은 개인주의 성향,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대한 반발, 여성의 경제적 자립 및 의식화, 적령기 남녀의 성비 불균형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한동대 이기복 교수는 젊은이들이 행복한 가정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행복한 가정생활의 모습을 배우지 못한 영향과 결혼 생활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냐고 강하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기성세대의 부부가, 가정이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10절 이하에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셨습니다. 독신으로 살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독신으로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결혼의 목적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이 담겨있듯이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것은, 교회 안에서 독신자들에게 결혼 왜 안하느냐는 말로 스트레스를 주지 마십시오. 정말 그를 위하여 중매 해 주는 것 아니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남의 일이라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독신자들도 마음을 자꾸 닫고 거리를 두고 스스로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사회의 가정 변화는 이혼 가정이 급격히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작년 결혼한 건수는 32만 6천 여 건, 이혼한 건수는 11만 6천 건입니다. 유배우자부부 100쌍 당 한 쌍이 이혼을 하고, 특히 황혼 이혼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혼을 할까요? 모든 결혼 생활은 각기 다릅니다. 여러 가지 원인과 상황들의 독특한 결합에 의해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혼의 원인으로는 간음 즉 외도, 배우자가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 결혼생활에 대한 미숙한 태도, 신체적 심리적 학대 즉 상습폭력, 다른 스트레스 등입니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이혼 사유 순위는 성격차이, 경제적 문제, 외도 순서랍니다. 특히 요즘은 아내의 외도로 인한 이혼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혼한 후 80%가 후회한다는 법원의 통계가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 장 경윤 이벤트 팀장과의 인터뷰가 모 일간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는 그동안 10년간 만남을 주선한 미혼 남녀가 5만 여명이랍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결혼이 가벼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굉장히 인위적이랍니다. 서로 만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한데 만나기 전에 상대의 신상을 따져보고 조건이 맞으면 결혼하는 식이랍니다. 대형마트에 가서 인스턴트식품을 고르듯 상대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어 사오는 것처럼 쉽게 결혼을 한답니다. 그렇게 쉽게 결혼하니까 또 쉽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풀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요즘은 경제력, 외모 등의 조건을 앞세워 눈높이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혼의 의미와 목적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조건에 의해서 결혼을 하니까 상대에게 만족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조건이 변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회적인 개념으로 보면 결혼이란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입니다. 불가피한 이유가 있으면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는 계약입니다. 이 같은 결혼관에 입각해서 생각해보면, 결혼관계를 취소할 수 있는 갖가지 이유와 변명들을 사람들이 쉬지 않고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이 질문하는 배경에는 신명기 24장 1절에,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는 모세 오경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혼을 너무도 쉽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남성 중심으로 해석하여 당시에 많은 남자들이 자기 맘에 안 들면 이혼사유로 삼아 이혼을 했습니다.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구절 해석을 한 예로 들면, 아내가 요리를 잘 못하면 수치되는 일이고 남자가 기뻐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이혼사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혼을 위한 이혼을 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에게 대해 예수님께서 8절, 9절에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신약 성경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르침의 중심에는 결혼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 원칙입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혼은 결혼서약을 파기했다는 사유- 배우자의 의무 유기-에서만 허용될 수 있고, 이혼 결정은 피해자측만이 내릴 수 있습니다. 신자는 결혼 서약을 어겨서도 안 되고, 배우자가 결혼 서약을 어겼더라도 그가 회개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혼은 허용될 수 있으나 가능한 피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결혼 관계가 취소되어 이혼을 할 경우, 몇 가지 예외 규정 외에 이혼 하는 경우를 죄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고 말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라고 규정짓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혼의 원인과 결과에 따라 죄를 범하게 됩니다. 성경의 대원칙은 결혼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혼하려고 할 경우, 반드시 이혼 상담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혼은 단순히 헤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혼 과정 중에 스트레스, 상처가 생기고, 이혼 후의 자녀 양육과 집안 간의 복잡한 문제가 뒤 따라 옵니다. 또한 이혼은 무서운 실패감과 죄책감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정서적, 영적인 문제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충분히 노력하고 후회없는 이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이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혼하지 않고 문제와 아픔을 신앙으로 잘 극복하여 더 온전한 사람이 되고, 행복한 가정으로 회복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이혼한 후에 다시 재혼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재혼의 유형도 다양합니다. 단순한 재혼이 있습니다. 서로 자녀가 없는 사람과 재혼할 경우입니다. 한쪽은 재혼이고 다른 쪽은 초혼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가 없는 남자에게 아이를 데리고 재혼할 경우, 아이가 없는 여자와 아이 있는 남자와 재혼 할 때, 혼합가족 재혼도 있는데, 양쪽 다 각기 자녀가 있어서 재혼할 경우 가족이 혼합 가족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재혼 후에 혼합 가족 안에 아버지의 자녀와 어머니의 자녀, 그리고 재혼 후 공동의 자녀가 복합가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쪽이 사별 후 재혼인 경우, 둘 다 사별 후 재혼인 경우, 둘 다 이혼 후 재혼인 경우... 이렇게 재혼의 유형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만큼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재혼을 실패하게 만드는 요인은, 옛 배우자에게 잘못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책임을 면하려는 의도로 결혼을 시도하는 경우에 또 다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초혼의 실패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는 없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재혼을 위해서는 홀로서기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선 자신이 이혼한 사실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최소한의 미련이나 이혼에 대한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과거를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입니다. 나의 잘못은 없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는 않았는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를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이혼을 통해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결혼생활의 잔재가 남아있다면 그 후유증이 재혼의 새 출발을 가로막습니다. 심리적인 상처나 육체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손쉽게 사랑에 빠지거나 주변의 권유로 재혼을 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단지 현실적인 외로움이나 어려움,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또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재혼을 선택하는 것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재혼을 허락하는 경우는 성경에서 허락한 이혼 후 재혼과 사별 후의 재혼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복잡하고, 이혼한 경우도 이혼 전 결혼생활의 내용과 이혼 사유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와 관련을 맺었던 사람이 아니고는 그 잘잘못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미 이혼한 후라는 것입니다. 다시 합쳐질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려고 할 경우, 과거는 과거이고 이혼 사유에 따라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간음한 사유로 이혼하였을 지라도 회개한 후라면 교회에서 결혼하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음한 상대와 재혼하는 경우는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를 숨기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우리교회 교인이 되었다면, 그 가정도 역시 함께 하나님의 언약적 공동체로써의 역할을 감당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와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져 새롭게 이룬 가정이 하나님의 언약적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왜 결혼했는가? 나는 왜 결혼하려고 하는가?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 를 바르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루고 있는 가정이, 독신 가정이든, 이혼 가정이든, 재혼 가정이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결혼 생활하는 것,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참으로 인생에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우리 자신만의 지혜와 힘과 능력만이 아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율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고치고, 치유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서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향한 책임을 다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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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5월 22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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