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먼저 보시는 것 (마가복음 2장 1-12절) |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 특별히 각기 중요하게 먼저 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때 어느 부분부터 먼저 보십니까? 나는 눈과 눈 주위 분위기를 먼저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비슷하면 닮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선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코 주위를 먼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입 주위와 입 아래 턱과 턱 선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마 부분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볼 때, 호감을 가지고 본다면 어디부터 보든 그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생김새를 먼저 보신다면, 입고 있는 옷을 먼저 보신다면, 직업이나 신분이나 겉모양만을 먼저 보시고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대하신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보실 때 먼저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로마서 8장 27절에,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서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잠언서에는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길 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보시고자 하시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중심에 믿음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는가? 마음의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자세, 마음의 태도가 바르게 되어 있는가를 보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말합니다.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관계가 유지되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네 친구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씀의 뜻이 이와 연결됩니다. 그들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가 예수님 보시기에 맘에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 예수님을 향해 가져야 할 마음, 가져야 할 태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오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이 뜯어지면서 중풍병자를 누인 침상이 내려올 때, 중풍병자를 메고 와 지붕을 뜯어 내리는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고 예수님께 들고 나오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그들의 믿음을 먼저 보셨습니다. 지붕을 변상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수님을 의지하여 친구의 질병을 낫게 하고자하는 그들의 믿음을 귀히 보셨습니다. 이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방에 앉으신 예수님 앞으로 중풍병자가 완전히 내려지자 이제는 중풍병자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그가 단지 육체적인 문제가 생겨서 중풍병에 걸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영혼의 문제로 병이 생긴 것인지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을 낫게 하시기 전, “작은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사죄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떤 서기관들이 와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문서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직무를 담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서 예레미야서에 보면, 바룩이라는 서기관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들이 한 계급을 이루면서, 서기관, 율법사, 랍비, 교법사 등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주력했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다시 세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이었고, 결국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율법 지식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치명적인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병을 고치시기 전 먼저 하신 말씀에 강하게 의문을 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만 사해주실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신성 모독죄는 매우 심각한 죄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신성 모독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무거운 죄였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것 한 가지를 알고 있지 못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성자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이니 뭐니 말할 정도가 되려면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앉아있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척 일찍 왔나 봅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이 나중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서기관들은 일찌감치 와서 앞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가까이 위치한 곳에 자리를 잡고 예수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위치는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위치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아주 멀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시는 일을 믿는 마음으로 모임에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허물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비판하는 태도로, 어떻게든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 태세로, 부정적인 태도로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자세는 예수님을 믿고 섬기고 사랑하는 자세가 아니라 의심하고 배척하고 미워하고 제거하려는 자세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세입니다.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위치는 바로 예배당 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예배당 안에 위치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다면 여러분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태도가 잘못 되어 있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여러분에게는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골문 앞에서 공격수가 공을 기다립니다. 골을 넣기 위해서입니다. 분명 위치는 골문 앞에 서 있습니다. 같은 편이 공을 패스합니다. 센터링을 합니다. 공격수는 공을 받아 머리로 헤딩을 하든지, 발로 슛을 합니다. 그런데 공이 골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공중으로 붕 떠서 날아갑니다. 소위 똥볼을 찹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자세의 문제입니다. 골을 맞출 때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갑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바람이 불 때 하늘을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폅니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날개의 각도 즉 날개의 자세가 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새는 공중으로 날 수 없고, 비행기도 공중으로 이륙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는 날아가기 위해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자신의 날개의 깃털의 각도를 조절합니다. 비행기도 날개의 각도를 조절합니다. 그래야 공중으로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나 비행기의 날개의 각도란 자세, 태도를 말합니다. 자세가 되어 있어야, 태도가 좋아야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자세, 마음의 태도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들락거리는지, 어떤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그 마음속에 갖고 있는 예수님을 향한 태도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와 앉아있었지만, 예수님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멀기만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의 사회적 위치가 높으냐 낮으냐? 교회에서 여러분의 위치가 어떠하냐도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세입니다.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 예수님을 향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은혜를 주시면 받을 자세가 되어 있는지, 말씀을 주시면 믿고 받아들일 태도가 되어 있는지, 복을 주시면 받아 잘 사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먼저 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중풍병자는 가장 큰 필요가 육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중풍병이 치료되어 몸을 움직이고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중풍병자가 움직일 수만 있으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보셨을 때, 영적인 상태를 먼저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중풍병은 영적인 중풍병과 육체적인 중풍병에 함께 걸려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영적인 치유를,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신 뒤에 육체의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네 상을 가지고 일어나 가라.”고 하시니 그가 치유되어 침상을 가지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영혼을 먼저 중요하게 보십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영혼의 상태가 마음에, 그리고 육체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면적인 증상 즉 중풍병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아래, 그 속 깊은 곳에 있는 문제의 근원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치유보다는 영적인 치유에 먼저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의 영혼의 문제는 죄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에게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죄가 사하여져야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혼속의 죄를 먼저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적하고 꾸짖고 심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찾아 그것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옴짝 달싹 못 하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러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도록, 죄를 이기며 살도록,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도록,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죄사함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복과 가장 영원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는 일은 의사도 합니다. 능력있는 선지자나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들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판사가 피고인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했다고 해서 피고인이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하셔야 죄가 없는 것입니다. 변호사가 아무리 변론을 잘 했다고 해서, 그래서 무죄판결이 났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변호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자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영혼의 죄를 사해주심으로 그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까지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의 마음에 평안까지도 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중풍병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중풍병이 자신의 영혼까지 치유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죄책감을 계속 가지고 있는 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은 병들어갑니다. 평안이 깨지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힘을 잃고, 어두워집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갖게 되고, 사람과의 대인관계에도 위축이 됩니다. 영적 담대함도 약해집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죄책감이 마음에 남아 있다면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여 자신을 용서함으로 죄책감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깨닫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를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용서받았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해 주셨는데, 왜 여러분은 여러분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끓어 안고 사는 것은 일종의 교만입니다. 자기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용납이 안 되는 것이기에 교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실수하고 죄짓고 허물이 드러나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것 역시 주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시고자 하시는 위로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죄사함, 용서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죄책감을 벗어 던지시기 바랍니다.
모든 질병이 죄가 원인이 되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죄 때문에 질병이 생길 수도 있고, 유전적인 질병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영광을 위하여 질병이 주어질 수도 있고, 병을 주는 마귀, 즉 병마에 의해서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신이 건강관리를 잘 하지 못하여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위나 죄악에 의하여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음식조리를 잘못해서 식중독에 걸리게 된다든지, 유해식품을 만들어 판 사람에 의해 병에 걸린다든지, 인체 유해한 공해산업으로 인해 질병에 걸리는 경우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질병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다든지, 어떤 것에 신경을 너무 써서 생기는 경우, 마음속의 분노와 증오심을 해결하지 못하여, 마음의 상처와 어두운 경험을 해결하지 못하여 질병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질병의 원인은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복잡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질병을 고치시는 순서를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영혼의 상태를 먼저 보셨고, 영혼의 문제부터 고치셨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정리하면, 우리 몸의 질병은 단순히 몸만을 치료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영혼, 마음, 몸이 함께 치유되어야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고 이치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요 방법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의사의 치료능력을 못 믿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치유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의사가 여러분의 영혼까지 치유해 줄 수 있는 분이라면 좋겠지만 의사는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을 통해 마음과 영혼을 함께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에 나타난 문제, 장애물, 고통, 시련들의 현상만 봅니다. 보이는 그 현상만 해결되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빨리 나의 문제와 장애물과 고통과 시련을 해결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문제의 근원, 장애물의 뿌리, 고통과 시련의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또 다시 문제가 생길 것이고, 또 다시 장애물을 만나면 주저앉을 것이고, 또 다시 고통과 시련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 상태를 건강하게 바르게 온전하게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 혹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치유하시지 않는다면, 육체적인 치유가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관심사는 영적인 질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깨닫고 있는가, 용서받지 못한 죄는 없는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져 있지는 않는가, 교만하지는 않는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십니다. 그것이 제대로 안 될 때 영적 질병이 오게 되고, 영적 질병은 곧 마음의 질병, 육체의 질병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질병을 허락하시는 이유, 고난을 주시는 이유, 문제와 장애물을 만나게 하시는 이유 중에 중요한 이유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삶의 자세와 태도를 돌아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대사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어제 아침 방송에 의사가 나와서 설명하는 말을 들었는데 심각한 것이더군요. 대사증후군이란 인슐린저항성 증후군이라고도 한답니다. 인슐린 저항성이라는 것은 세포들이 인슐린의 작용에 대해 거부, 저항한다는 것으로서, 인슐린이 활동에 문제가 생기니까 더 많은 인슐린을 분비해서 인슐린의 활동을 보충하려 하게 되고, 인슐린이 많이 분비되면 그 부작용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대사증후군이 시작이 되면 그 다음 단계로 죽음의 4중주라고 불리우는 비만, 당뇨, 고혈압, 이상지혈증이 생깁니다. 대사증후군 증상의 주된 원인은 역시 비만과 운동부족에 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먹고 안 움직이는 것이 원인입니다. 한국인들의 경우 전체 인구의 약 35%가 대사증후군 단계에 있답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대사증후군 증상이 있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죽음으로의 지름길을 걷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사증후군 증상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느냐? 원인이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하는 것이니까 음식을 줄이고, 운동을 좀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의사는 말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식생활 습관, 운동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시일 내 체중을 좀 줄일 때까지 덜 먹고, 운동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식생활습관, 운동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정신, 우리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허리둘레를 줄이는 것만이 문제 해결이 아니고 더 근본적인 문제, 더 핵심적인 문제, 영혼과 마음의 문제, 그래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 살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천국을 준비하면서 웰빙, 웰다잉해야 합니다. 잘 살고, 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잘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고, 건강하게 사는 길입니다.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르고 온전하고 건강하게 하여 보이는 것을 잘 누리고 사용하고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고, 몸보다, 마음보다 영혼이 더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사용하고 다루고 지배합니다. 마음이 몸을 사용합니다. 영혼이 몸과 마음을 다스립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있어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지배하게 되면 거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저급한 인간이 됩니다. 짐승 같은 인간이 되고, 육체와 물질에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는 말씀의 뜻이 그 뜻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도 바로 우리의 몸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먼저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먼저 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먼저 보십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먼저 보십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보이지 않는 것을 온전케 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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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8월 2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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