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적 신앙과 무조건적 신앙 (말라기 1장 1-3절) |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내 친아빠 아니지?” 엄마가 이상해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아이가 하는 말, “엄마는 아빠가 들어오면 무표정한 얼굴인데, 택배 기사가 오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잖아!” 홈쇼핑에서 주문한 상품을 배달해 주는 택배 기사를 남편보다 더 반가워하는 엄마를 보고 묻는 어린아이의 심각한 질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 때문에 반응이 달라집니다. 어떤 조건에 대해 각각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조건반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러시아 생리학자 파블로프가 개를 가지고 실험하여 정의되었습니다. 파블로프가 종을 치고 개에게 먹이를 주니까 개가 먹이를 보고 입에서 침이 나오더랍니다. 그렇게 종을 치고 먹이를 주는 행위를 계속하니까 나중에는 종을 치고 먹이를 주지 않았는데도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더랍니다. 일정한 조건을 주면 그것에 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 것을 먹은 후, 신 것만 보아도 침이 고인다든지, 눈을 찌푸리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조건 반사입니다.
조건적 반응이 있습니다. 조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조건이 주어지면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네가 나를 도와주면 나도 너를 도와주겠다.” “만약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 “만약 네가 나에게 손을 내밀면, 나도 네게 손을 내밀겠다.” “만약 네가 나를 좋게 여기면 나도 너를 좋게 여기겠다.”이런 조건적인 생각을 갖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조건적 생각은 조건적 신앙을 만듭니다.
오늘 말씀은 조건적 신앙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라기 예언은 여섯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하나하나는 핵심 질문들로 구분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첫째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상태가 어떠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첫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다윗 왕 시대를 거쳐 솔로몬 왕이 죽은 뒤, 남북으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누어진 북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했고, 남유대 왕국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당하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본국 이스라엘로 귀환시켜 주었습니다.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일 먼저 무너졌던 성전을 건축하려 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6년 동안 방치해 둔 성전을 재건하자고 외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그렇게 성전 건축이 완성되고 난 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믿음이 식어졌습니다. 식은 가슴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영적 온도가 점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생기를 잃고 메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나태해져가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며, 무기력한 신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을 바라보시던 하나님께서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고 사랑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든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응하였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을 입증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나요?” “하나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기는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나요? 사랑하신다면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지금은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면 복을 줘야 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주위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잘 살게 해 주고, 고생도 안 하고, 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게 해 주셔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해주시면서 무슨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냐고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다. 지금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사랑하셨냐고, 사랑을 보여 달라고 반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것, 저것,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을 이루어 주시면, 그것을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겠는데, 그 조건들을 안 해주시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세상의 조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테스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믿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는 것으로 믿겠다고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풍속과 세상의 조건들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는 지, 안하는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물질을 많이 주시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게 해 주시면,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해주시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압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뭔가를 보여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번에 나에게 이런 이런 일을 이루어주시면, 이런 이런 일을 행하시면, 그 사랑을 믿겠습니다.”라는 조건을 내걸고 신앙을 갖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깨닫지도 못하고, 은혜를 받을 줄도 모르고, 은혜를 누릴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오해를 합니다. 존 밴턴이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영적 문제들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조건적인 생각은 위험합니다. 매사에 조건을 내걸고 사는 사람은 조건에 맞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때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비합리적 조건이 자신을 속박합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하면 나도 너에게 이렇게 하겠다.’는 식의 조건적 생각은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조건적 생각은 보복적 생각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만약 네가 나에게 욕하면, 나도 너에게 욕을 할 거야!” “만일 네가 나를 무시하면, 나도 너를 무시할거야!” “네가 나에게 한만큼 나도 너에게 되돌려 줄 거야!” 이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이지, 복음적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조건적인 생각에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억지로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신학대학의 기독교상담학 교수가 학생생활상담소장을 맡아 학생을 상담해 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여학생이 상담실을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데 그 여학생은 지금 자신이 사귀고 있는 남학생이 과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가 될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답니다. 이 여학생은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남자 친구와 함께 중국음식점에 가서 남자 친구가 짜장면을 시키면 나와 결혼할 사람이고, 짬뽕을 시키면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중국음식점에 가서 주문을 하는데 혹시 이 남자가 먼저 짬뽕을 주문할까봐 이 여학생은 자신이 먼저 주문을 하였답니다. “자기야, 뭐 먹을 거야? 나는 짜장면. 이 집은 짜장면이 맛있더라! 오래간만에 짜장면 먹어야지!” 이렇게 남자친구가 짜장면을 시키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 남자 친구는 한참 생각하더니 “그럼, 나는 짬뽕!”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여학생은 충격을 받았답니다. “아! 이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자꾸 낙심이 되어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속에서는 이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생겨서 괴롭다는 내용의 상담을 요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여학생의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여학생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 방법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짜장을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자신이 만든 조건부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중심에서 벗어난 신앙입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어느 대학병원 원목은 병실을 방문하다가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말기암에 걸린 한 남성 환자가 암을 치유받기 위해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집을 팔아서 교회를 짓겠습니다.”라고 기도하자 그 옆에서 그 기도를 듣던 아내가 소리를 지르면서 “여보! 죽으려면 곱게 죽어! 당신이 집 팔면 나는 어디서 살라구? 애들은 어디서 살구? 지금 당신 수술비, 치료비, 아이들 학비 때문에 집을 팔아야 될지도 모르는데...” 그 서원기도 때문에 병실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부부싸움을 크게 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말기암 환자는 조건부 로 서원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시면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조건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시면, 제가 건축헌금을 얼마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대학에 합격시켜주시면, 제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시면, 제가 저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으로 거래를 하려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만약 제시한 조건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 믿을 것입니까? 그 조건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보면 서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거나 일정한 기간 동안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원은 보통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했습니다. 서원하지 않는다고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서원한 이상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성경에 서원한 사람들을 보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고 서원하는 경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안치될 때까지 열심을 다하겠다는 서원, 바울이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 등입니다. 또 다른 서원은 조건부 서원입니다. 한나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면 집으로 돌아올 때 자기를 제일 먼저 영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결국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되었는데, 사실은 입다가 그런 서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입다의 잘못된 조건적 신앙의 실수입니다. 조건적인 서원은 꼭 지켜야 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임으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조건적 생각은 조건적 신앙을 갖게 하고, 조건적 신앙은 율법적 신앙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몇 년 동안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하고, 헌금도 드리고, 금식도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실 거야.”라고 기대하는 것은 율법적 신앙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 조건적 신앙을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율법적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선물과 은혜와 맞먹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치 어린 자녀가 부모님 심부름 좀 열심히 했다고, 왜 나에게 용돈을 많이 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미 부모는 그 자녀에게 낳아주고, 길러주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심부름 좀 열심히 한 것으로 부모의 은혜를 넘어서서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까요? 이런 조건적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내가 생각하는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과 협상하려고 하고,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고, 조건을 주장하며 마치 협박하듯 하나님께 요구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조건적 신앙은 은혜를 잊게 합니다. 또한 은혜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은혜란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호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그 어떤 선행이나 업적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건적 신앙을 갖게 되면 은혜를 놓쳐버립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을 조건적으로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적인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조건절이 없습니다. 조건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고 많은데 거기에 또 무슨 조건을 달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은혜를 받았으니 조건 없이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아무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너희보다 조금도 못한 데가 없었지만 나는 그들을 그냥 지나쳤었다.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로 태어났을 때, 이 둘 사이에는 서로 다른 것이 없었다. 사실상 너희들의 조상인 야곱은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자로서 에서보다 더 나쁜 데가 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조상인 야곱을 택하고 그에게 복을 준 반면, 에서와 그 후손들인 에돔 백성들은 그냥 지나쳤다. 옛적에 내가 형편없는 야곱을 일방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했다면, 그의 후손들인 너희들도 동일하게 조건 없는 사랑으로 대하지 않겠느냐?”라고 확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 후손,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신 것은 그들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건 없이 선택하고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향한 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내 사랑은 너희들의 장점 때문에 사랑이 커지거나, 너희의 부족함 때문에 사랑이 소멸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나의 사랑은 너희 상태에 따라, 조건에 따라 변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조건을 요구하여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많은 사랑의 특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무슨 특권을 받았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이런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구원을 받은 것,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특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천하 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것이고, 그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니 그 은혜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 가장 귀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어 믿음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보호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 우리가 간구하면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시는 것, 주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을 수 있고, 악한 영들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언제나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 언제나 믿고 확신에 차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입니다. 독생자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우리 대신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그 사랑을 받습니다. 그 사랑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 조건적인 신앙의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조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무조건적인 은혜의 신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조건적인 신앙과 무조건적인 신앙의 차이는 마치 땅바닥만 보고 사는 사람과 하늘 위에서 땅과 하늘을 다 보고 사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은혜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32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조건에 맞추어 반응하고 조건에 따라 행하는 것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슨 상 받을 일이 못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심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비로우심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조건에 따라 사랑을 베푸시고, 조건을 만족시키면 은혜를 주시고, 조건에 맞추어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은혜, 무조건적인 자비를 베푸셨으니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조건에 매여, 조건에 묶여 사는 삶을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지속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들은 영적으로 쇠약해집니다. 메마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니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없어지고, 믿음도 없어지고, 소망도 없어지게 됩니다.
22세의 외아들과 함께 살던 과부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세 가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째, 외로운 저에게 지난 22년 동안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째, 저와 함께 사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이제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합니다. 셋째, 이제야 비로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은혜, 즉 무조건적인 은혜를 받고 조건없는 신앙으로 반응한 신앙인입니다. 이분이야 말로 은혜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날마다 깨닫고 누리며 사는 사람, 내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발견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응답하며 사는 사람은 조건을 걸지 않습니다. 조건을 넘어섭니다. 그리고 은혜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은혜가 지배하는 세계로 들어갑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에서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불에 던져질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조건을 넘어선 신앙인들의 고백입니다.
교우 여러분, 조건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마십시오. 다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조건없이 사랑해 주시고,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함께 무조건적인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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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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