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말라기 1장 6-14절) |
새 중에 다른 새들이 알을 품으면 따라서 알을 품는 시늉을 하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다른 새들이 보기에 당연히 알을 품고 있으니 때가 되면 알이 부화하여 새끼 새가 태어날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알을 품고 있는 척했던 새가 날아가 버린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생명이 담긴 알이 없었으니 알을 깨고 나오는 생명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이런 새와 비슷한 성도가 많을 거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영적이지 않는데, 거룩하지 않는데, 충만하지 않는데, 주님을 품은 듯 모양만 내는 것입니다. 기도 후에, 예배 후에, 말씀 묵상 후에, 헌신 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기진해 하며, 허무해 하는 성도들 말입니다. 공갈빵처럼 안은 텅 비었습니다. 신앙회복이 필요한 신앙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배회복을 통한 신앙회복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본문 말씀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과 이스라엘 백성의 대답입니다. 6절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는 그 부모를 공경하고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내가 너희의 아버지인데 왜 나를 공경하지 않느냐? 내가 너희의 주인인데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언제요? 우리가 어떻게 주를 멸시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오히려 적반하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병들고 시원찮은 동물, 팔다 남은 것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눈이 멀거나, 절거나, 병든 동물들, 즉 흠있는 동물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고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가져오는 성의 없는 제물들을 거절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제물을 가져와서는 안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그냥 넘어가주니까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가지고 온 제물이 흠이 없는 것인 것처럼 속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문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드리는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렇게 하면 총독이 기뻐할 것 같으냐? 총독이 그런 것을 드리는 너희를 받아줄 것 같으냐?”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10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을 하나님의 제단에서 드리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 버려서 아무도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성의 없는 그런 제물들을 드렸을까요? 왜 하나님을 멸시하였을까요? 그들의 신앙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또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해도 안 들어 주시고, 그 예배를 안 받아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예배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성의가 없었습니다. 예배가 예배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분명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배를 드리는 백성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이 영적으로 고갈되고 메말라 있고,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예배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와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는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김남준 목사의 책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책에 그는 “역사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사라진 예배는 모든 방종한 삶의 원인이 되어왔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를 느낄 수 없는 형식적인 예배야 말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왔다.”고 지적하면서,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반영이다. 예배는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교회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능가하는 예배를 드릴 수 없고, 그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신앙과 예배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만큼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는 곧 신앙의 상태라는 말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치고 신앙이 좋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예배를 소홀히 여기거나, 예배 시간에 딴 생각, 딴 짓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시간을 내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영혼의 안식도, 영적 재충전도, 하나님의 은혜도 깨닫고 받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런 적이 많아서 이제는 낯설지도, 꿀꿀하지도, 찝찝하지도 않습니까? 하나님께 얼굴 도장 찍고 온 것으로 만족합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나? 하고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친밀한 교제, 하나님께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영적 회복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안식과 재충전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는 은혜 풍성한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아있는 예배, 감격이 있는 예배, 하나님을 만나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으로 지나가시다가 수가성에서 물을 긷는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던데요.” 사마리아 여인의 말은 자기네 조상들이 말하는 예배 장소와 유대인들이 말하는 예배 장소가 다른데, 어떤 것이 맞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솔로몬 왕이 죽고 난 후, 남북 왕조로 분열되었습니다. 분열된 두 왕국은 예배드릴 성전이 필요했습니다. 남유다 왕국은 예루살렘이 그 안에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북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지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디가 예배드릴 장소로 맞느냐? 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예배란 어느 장소에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드리느냐가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뜻으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라, 하나님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알지 못하는 예배가 아니라 알고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배에 대하여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드리는 것이며, 또한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예배의 의미가 좌우됩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달라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떠한 희생적인 일도 스스로 감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예배는 예배드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찾아 뵐 때, 부모의 재산이나 챙기려고, 부모님 집에 있는 농사지어 거둔 곡식 얻으러, 김장 김치, 고추장, 된장 담근 것 가지러 가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뵙는다면, 그런 동기와 목적은 자녀 된 도리가 아니지요.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찾아뵙는 것이 부모님을 찾아가는 동기요, 목적입니다. 부모님을 찾아가 뵈면 부모님들은 자식들 보는 것이 좋으시니까, 기뻐하시니까, 행복해 하시니까 그 기쁨을 드리려고 찾아가 뵙는 것이 자녀 된 도리입니다. 물론 그렇게 자식들이 오면, 왔다가 갈 때에 부모님들은 무엇이든 더 주시려고 합니다. 바리바리 싸서 챙겨주십니다. 그것이 부모님을 뵈러 온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배라는 말의 뜻은 봉사하다, 섬기다, 굴복하다, 자신을 엎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겸손한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겸손히 엎드리면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은 크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한 마음과 자세로 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꾸미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솔직하십시오. 하나님께 진실 된 마음과 자세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 배고파 음식을 먹으러 식당에 온 사람이 배부른 척하면 배가 저절로 채워집니까? 갈증이 나서 우물에 온 사람이 입 다물고 있으면 물을 마실 수 있습니까? 목욕하러 온 사람이 옷 입고 탕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씻을 수 있습니까? 공부를 배우러온 학생이 다 아는 척하면 저절로 배워집니까?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드려야 합니다.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장하고 위장한다고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숨기고 위장하는 사람을 만나시지 않습니다. 허물 많고, 지은 죄가 많아도, 문제가 많아도, 어리석고 부족하여도, 솔직하게 진실하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어떤 자세인지, 동기가 무엇이고, 목표가 무엇인지를 통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분이시라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보실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영이 아니시라면, 우리가 마음을 숨기고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해도 모르시겠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무엇을 담고서 예배하는 지를 보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냉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성의 없는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예배를 드리고, 위선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배가 하나님께 성의 없는 예배가 되지 않으려면, 무분별한 예배가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배가 되지 않으려면, 위선적인 예배가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예배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또한 하나님께 사랑으로 응답할 때,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거울 앞에 자주 섭니다. 그래서 데이트를 하러 나갈 때는 거울 앞에서 한껏 멋을 내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한 번 더 거울을 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오면서, 만유의 대주재이시고, 크신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나갈 때의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면 오늘 교회에서 만날 교인들만 신경이 쓰였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데... 뭔가 옷매무새를 고쳤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한량 없으 신지를 알고 경험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것이 당연한 응답이고,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다르게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면 예배는 무너집니다. 살아있는 예배가 아니라 죽은 예배가 됩니다. 진정과 사랑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없는 예배는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가장 귀한 것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귀한 것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한 공경과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가장 귀한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마음과 자세를 말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왔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가장 귀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귀한 시간을 드릴 수 있을까요? 예배드리는 시간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귀중한 시간임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예배 대충 드리고 열심히 주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한 시간도 예배로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다른 봉사가 하나님을 위한 봉사가 되겠습니까?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여기면서 생활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배 시간조차도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면서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일 예배도 자주 빠지면서 복은 많이 받기를 원하십니까? 예배 현장에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받고 싶어 하는 그 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욕심을 채우려는 복이 아닙니까?
예배 순서 순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대화하듯, 하나님께서 내 앞에 계시다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참회 기도할 때는 마음을 담아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뉘우치고,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해 주심을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공동기도, 봉헌기도, 목회기도를 할 때, 아멘으로 응답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 고백하는 마음으로 읽고, 믿음을 담아 고백하십시오.
찬송을 부를 때,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부르십시오. 그 때 찬양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에 임하십니다. 영혼이 순화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영적인 힘과 능력이 공급됩니다. 찬송의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약 찬양대원 가운데 사람들 앞에 보일 때에는 입을 크게 벌려 찬양을 하고, 예배 찬송 시간에 찬송을 부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예배가 살아나려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나 혼자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예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눈감고 듣지 마십시오. 가능한 한 예배드릴 때에는 다리를 꼬고 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한번만 생각해 보면 곧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 전, 설교를 듣는 중에도 자신의 마음이 좋은 땅처럼 되도록 기도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마귀가 들어와 의심과 거절의 씨를 뿌리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듣고,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헌금을 드릴 때, 가장 귀한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귀한 물질을 드린다는 말은 기도하며 준비한 헌금을 드리라는 뜻입니다.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헌금을 그렇게 준비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총독에게 그렇게 예물을 드리면 총독이 기뻐하겠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하나님은 친구만도 못한 존재이신가? 거래처만도 못한 하나님이신가? 커피 한잔만도 못한 분이신가? 사람들에게는 인색하지 않으면서, 자기 이름 내는 곳에는 척척 잘 내면서, 나는 하나님께 인색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 사랑하고는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 은혜 받고 싶어 하고, 복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적은 것은 아닌가?
우리의 마음과 사랑과 믿음이 모아진 예배와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목사 혼자서 하는 원맨쇼가 아닙니다. 예배 위원 몇 사람, 인도자, 기도자, 찬양대, 봉헌위원 몇 사람이 대표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서로 도와야 합니다. 소음을 없애야 합니다. 휴대폰도 미리 끄십시오. 아무 생각 없이 예배를 드리지 마십시오. 옆 사람과 말하지 마십시오. 뭘 만지느라 부스럭거리지 마십시오. 내가 옆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 내가 예배에 중요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여러분이 구경하고 관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 속에 여러분이 살아있고, 예배가 살아있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반응을 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지만, 하나님을 찾지도, 갈망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 사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릇이 엎어져 있는데, 아무리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해도 비가 그 그릇에 담길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열고 예배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배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풍성히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충만, 말씀 충만,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지요? 그런 성도가 되기를 원하시지요? 예배를 통해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자세를 새롭게 하여 예배가 회복되고, 신앙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
2012년 11월 1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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