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능력으로 (고린도후서 13장 4~5절) |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20미터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의 신앙에 십자가 신앙이 빠지면, 십자가의 진리를 잃어버리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추락합니다. 어딘가에 곤두박질칩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십자가의 진리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고, 십자가의 진리의 중심이 흔들리면 십자가의 사건은 미련하고 부끄러운 사건으로 취급됩니다.
헬라인에게는 십자가의 진리가 거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말씀했습니다. 헬라인들의 눈에는 십자가의 진리가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의 지혜와 철학은 인간을 죄인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 형벌은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처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예수가 죄를 용서했느니, 우리를 구원했느니,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것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에게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이 아니라면 십자가와 여러분은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죄인을 대신해서 죽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신에게는 질병이 없고, 그래서 자신은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에게 병원과 의사가 무슨 관계이며, 무슨 의미가 있는 존재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그가 몸속에 질병이 있고, 환자인데 본인이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철학, 세상의 학문, 세상의 가르침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의 진리가 미련한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인간은 죄가 없는 것입니까? 죄인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운데 ‘나는 죄인이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 죄를 지은 적이 없어’라고 장담하는 분이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는 이방인보다 유대인에게 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진리는 그들의 신앙적 자존심과 메시아 대망 사상을 모욕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다윗 왕의 시절과 같은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벌거벗겨져 채찍에 맞고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십자가위에서 죽는다? 이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명패에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자 유대인들이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저주했습니다. 이들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는 다윗의 나라를 회복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종교적 자존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구세주, 메시야가 왜 고난당하고, 죽으셔야 하는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제자들의 대부분은 도망갔고, 그들의 마음은 낙심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한 복음, 이해할 수 없는 복음, 부끄러운 복음이란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진리 복음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믿음이 아니고는 받아들일 수도, 깨달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죄의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없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내 대신 죄 값을 치르시고 피 흘려 속죄하는 죽음을 죽으셨고, 약속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사도신경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믿음은 그릇과도 같습니다. 그릇은 그릇 안에 내용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릇 자체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릇 안에 담는 내용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거듭하여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하여 말씀했고,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낡아진다고 했고, 오늘 본문 말씀 4절에서도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 자신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이지만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본문 13장 앞, 고린도후서 12장 9절, 10절에,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힘을 빼면 뺄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행사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살아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추종자들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을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더 어려운 길을 즉 고난 받으시고, 수치를 겪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죄인으로 죽는 죽음의 길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세상을 향하여 권력을 휘두르신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놓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고 죽으시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무능한 죄인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세상 권력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항거조차도 못하는 약해 빠진 존재로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고 죽으시는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약함으로 죽게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셨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알의 진리와 같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둔다는 진리 말입니다. 한 알이 죽으니까 많은 생명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이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있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은 곧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보혈이라고 합니다. 보배로운 피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능력으로 우리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제물이 되어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의롭다고 일컬어지게 되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아 정결해지고, 성화되고, 영광스럽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피 흘려 죽으심을 뜻합니다. 우리 생명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보면, 각종 제사에 관한 규례가 정해져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속죄제물을 드릴 때에 수소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를 가져오면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잡아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그 피를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를 전부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떼어내 제단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 때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을 대신하여 피 흘려 죽고, 불에 타는 수소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를 보면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여 저 짐승이 저렇게 피 흘리고, 살이 찢기어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결단해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죽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고백한다는 것은 곧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라는 고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4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했듯이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감으로 자신 속에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었고, 그 능력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도전합니다.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믿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를 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안에서 성결과 성화와 신실함이 나타나고 있는지, 십자가의 능력으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증하라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예수님을 2000여 년 전에 유대 땅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훌쩍 하늘로 올라가신 분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고 고맙다는 인사만 듣고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처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성탄절이 되면 선물을 가져다주고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가버리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분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의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고 그냥 떠나가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 사십니다. 내가 주인인 옛자아는 죽고,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어주신 것은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 한 장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서 이 땅에서도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예수님을 믿기 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았습니다. 죄로 오염되고 타락한 우리의 옛사람이 죄를 짓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죄를 지었고, 죄를 짓고도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은 이제 다릅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은 주인을 바꾸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일 때는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여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인으로 행하시면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래전 섬기던 교회의 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목수였습니다. 일반 주택을 구입하여 이사예배를 드려 달라고 요청이 왔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새로 지은 집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목수인 자신이 자기 집을 새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완전히 새집 같았습니다. 그 집의 먼저 주인은 그냥 대충 살았습니다. 그래서 김집사님이 그 집을 살 때에는 집 안이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주인이 김 집사님으로 바뀌고, 주인의 손을 거쳐 새집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란 그런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바뀌는 것은 주인이신 예수님의 손에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 안의 주인이 바꿔지지 않은 채, 교회만 다니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한다고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지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하시니 그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주인으로 계시니 죄를 지으면 불편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전에는 죄를 지어도 그저 그랬었지만, 주인이 바뀌고 난 후에는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괴로워해야 합니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인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자주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내 생각대로 말하고,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내 생각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내 안의 주인으로 계신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생각하기를 기대하시는지, 무엇을 행하기를 바라시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아예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언제 나의 주인이셨느냐는 듯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안에 주인으로 사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자꾸 들으려고 할 때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 자꾸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 가르쳐주십시오.” “예수님,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 지혜를 주십시오.” “예수님, 제가 지금 잘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제가 했던 말, 지금 하는 말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입니까?”
내가 강하다, 강하다 생각하면 십자가의 진리와 멀어집니다. 예수님과도 멀어집니다. 십자가의 능력도 멀어집니다. 내가 높아진다, 높아지고 싶다 하면 십자가의 진리와 멀어집니다. 예수님과도 멀어집니다. 십자가의 능력도 멀어집니다. 내가 지혜롭다, 지혜롭다 생각하면 십자가의 진리와 멀어집니다. 예수님과도 멀어집니다. 십자가의 능력도 멀어집니다. 내가 온전하다, 온전하다 생각하면 십자가의 진리와 멀어집니다. 예수님과도 멀어집니다. 십자가의 능력도 멀어집니다. 내가 의인이다, 의인이다, 죄인이 아니다, 내게는 죄가 없다 하면 십자가의 진리와 멀어집니다. 예수님과도 멀어집니다. 십자가의 능력도 멀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내 능력으로 살려고 하니 자꾸만 쉽게 지치고,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쉽게 낙심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어야 살고, 썩어야 새싹이 피어나고, 버려야 얻고, 포기해야 소유하고, 참아야 복 받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복음의 비밀이라는 진리를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 안의 교만을 죽이고, 분노를 죽이고, 미움을 죽이고, 참지 못하는 조급함을 죽이고, 자존심을 죽이고, 원망함을 죽이고, 욕심을 죽이고,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다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능력으로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내가 나의 삶의 주인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셨으니 주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에게 용서와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평강을 줍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2013년 03월 17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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