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명령, 최고의 사명 (마태복음 28장 18-20절) |
지난주 설교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요, 중심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신다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핵심 뼈대이지만, 이 신앙을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바르게 온전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만, 유아기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갓난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엄마만 바라보고 자랍니다. 엄마만 의지합니다. 엄마의 도움을 받습니다. 엄마 앞에서 살아갑니다. 엄마 중심의 삶을 삽니다. 그래서 엄마는 사랑스런 아이에게 모든 것을 줍니다. 젖도 먹여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입을 것도 주고, 엄마 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해 줍니다. 엄마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나 20살이 되고, 40살이 되고, 50,60살이 되었는데도, 계속 엄마에게 밥 먹여 달라고 하고, 옷 입혀 달라고 하고, 엄마 품에서 잠만 자려고 하고, 그렇게만 산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비정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깨닫고 형성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가치와 의미가 달라집니다. 관계 정립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요즘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부부 사이에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더군요. 물론 오빠 오빠 하다가 남편이 되었기 때문에 호칭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부부 사이의 관계를 남매지간으로 만드는 그런 호칭으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시어머니 앞에서도 오빠라고 부르는 며느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왜 오빱니까? 그러면 애들도 아빠한테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든지. 어느 목사님 휴대폰에는 부인을 ‘귀여운 고양이’로 입력 해 놓은 분도 있더군요. 애칭을 부르는 것과 관계를 이상하게 만드는 호칭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호칭을 죽으면 죽었지 못 바꾸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경범죄를 적용할 수도 없고, 과태료를 물게 할 수도 없고, 구속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도 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일은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어 있지 않을 때, 관계가 무너질 때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바르게 정리되어야 인간의 정체성이 분명해 집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어떤 인간을 만드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고, 그렇게 만드신 목적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소통하고 교제하며 함께 무엇을 하자’는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축복하셨습니다. 2장 15절에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너희는 나를 닮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내가 만든 세상을 너희와 함께 다스리고 돌보기 위해서이다. 나의 파트너가 되어 주렴.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며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자.” 정리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이 세상 관리인이며, 청지기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관리하고 돌보는 청지기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세상의 관리인이자 하나님의 파트너이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종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로 임무를 받은 존재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에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우리를 종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어느 곳도 인간이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주인이 아닌 인간이 주인으로 착각하고 살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교만이고, 삶에 문제가 생겼고, 인간 세상에 심각한 죄악이 행해졌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면 누구에게 심판 받을 필요가 없지요. 내가 주인인데 누가 감히 나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가 없지요. 또 누가 이러쿵저러쿵 말한다고 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주인인데!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내 인생의 주인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지금 월세나 전세 사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을 여러분 마음대로 뜯어 고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 있습니까? 아주 고약한 주인은 새집 전세 주면서 벽에 못도 못 박게 합니다. 벽에 아무것도 걸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조용히 살다가 나가랍니다.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겪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삶을 부여 받아 이 땅에서 살다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즉 주신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아무도 ‘내 것이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리인이요, 청지기이면, 청지기에게 주인이 뭔가를 맡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관리인, 청지기, 종은 임무를 감당 할 수 있도록 주인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생명도, 건강도, 시간도, 재능도, 지혜도, 물질도, 그밖에 삶에 필요한 햇빛, 공기, 물, 자연, 땅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그 일을 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굉장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생명이 살아있어서 인데,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에게 건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에게 사명을 감당할 만한 지혜나 재능이나 은사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다른 무엇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지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거저 받아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관리인, 청지기일 뿐입니다.
교단 발행 신문인 기독공보에 저희 교회에 년 초에 일일부흥회 강사로 오셨던 고 훈 목사님의 목회 일기가 늘 실립니다. 이번 주에 실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고 훈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장안교회 집회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낮 집회 시간에 조금 일찍 교회에 도착했답니다. 그때 교회 사무실로 두 부류의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4명이 함께 몰려왔고, 이어 두 번째 부류는 한 사람이 왔답니다. 4명에게는 사무 간사가 2천 원으로 네 명에게 5백 원씩 나눠주었답니다. 그리고 혼자 온 사람에게 사무 간사는 2천 원을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먼저 온 4명의 거지 중 왕초로 보이는 사람이 자기들은 5백 원씩 주고, 저 사람에게는 왜 2천 원을 주느냐고 불평을 하더랍니다. 그랬더니 사무 간사가 하는 말, 2천 원 받아가는 거지는 돈 받은 후 화장실 청소도 하고 교회 청소도 하는 거지이기 때문에 2천 원을 준 것이고, 당신들도 돈만 받아가지 말고 일하고 가라고 했답니다. 그 때 첫 부류의 왕초가 한 마디 던지고 가더랍니다. “저 거지는 거지가 아닙니다. 일하고 돈 받아가는 거지가 무슨 거지요. 일하려면 왜 구걸합니까? 우리는 진짜 거지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런 의미라면 진짜 거지는 오직 은혜로 얻습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만 거저 얻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임종 때 “하나님, 나는 평생 하나님 나라 거지로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했답니다. 왜 거지라고 하니까 불쾌하십니까? 고상하게 표현해 볼까요?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지지난 주간 기도원에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목사인 제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우들도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 하나님께 죄송하고, 교우들에게도 죄송합니다. 마치 모유 수유를 하는 엄마가 모유가 적어서 모유를 더 먹어야 하는 아이가 늘 모유가 부족하여 살도 안 붙고, 몸도 약한 것처럼, 저는 모유가 적은 엄마와 같은 목사입니다. 하나님! 저는 능력도 없고, 지혜롭지도 못하고 인격적으로도 너무 모자랍니다. 열정도 식어 있고, 너무도 연약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그러니 이 부족한 목사를 데리고 가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제 마음 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필요하지! 그러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고, 내 은혜가 필요한 거야, 그러니까 성령을 의지해야 하는 거야!” 그 때 제 마음 속에 떠오른 성경 말씀이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포도나무 비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있어야 하고, 너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내 힘 가지고 하려고만 하면 안 됩니다. 힘듭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 능력, 은혜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인이신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늘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은혜만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 구원의 사명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 이상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계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세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역하신 모든 것의 목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명령입니다.
사명이란 누구로부터 명령을 받아 맡겨진 임무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 자기가 잘 하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수행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해야 되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탁하신 명령이며, 임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때, 아무런 뜻도, 계획도, 목적도 없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뜻이 있으셔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사명이고, 또 하나는 각각에게 주신 그 사람만의 특별한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사명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명령은 사도행전 1장 8절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명령은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명령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시려는 뜻을 명령하신 것이니 위대한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우리가 이어받는 명령을 우리들이 받았으니 최고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사명이니 사명 중에서 최고의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더 귀한 사명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 영혼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는 사명이니 최고의 사명 아닙니까?
주님의 위대한 명령은 우리 모두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 속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우리에게 위대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나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자고 하신 것처럼,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셔서 우리들에게 주님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자고 하시는 명령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청지기이기 때문에 주인의 이 명령을 받아 수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 우리들의 최고의 사명을 수행하려면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이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기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전도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절하고, 반대하고, 핍박하고, 모욕을 주기도 하고, 화를 돋우기도 하고,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으려면 믿고 말러면 말어!” “에라! 안 믿으려면 관둬라, 그러다가 지옥에나 떨어져라!” “당신 같은 사람은 교회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필요 없어!”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전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전도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며, 그런 마음과 자세로는 영혼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고 신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 대해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을 뿐더러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은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서로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고, 서로 싸우고 등을 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항상 우리 마음속에 가득 있겠습니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마음, 우리 인간처럼 낮아질 대로 낮아지신 그 마음,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그 마음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바로 예수님의 그 마음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지금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예수님의 그 마음속에 담긴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두 팔을 벌려 두 손에 못이 박혀 죽으시며 “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한다.”고 몸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이들을 보며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용서의 사랑,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온갖 모욕과 비방과 멸시와 수치와 목마름과 채찍질과 고통과 버림받으심을 당하시며 철저히 희생하신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담기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사랑! 오직 예수 사랑만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 그 사랑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사랑의 힘으로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하나님께로부터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것을 받아 그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심한 영적 침체에 빠져있을 때,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회복이 되어야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베드로가 감당할 수 있으니 예수님 사랑을 묻고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우물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퍼 올려야 합니다. 아무리 맑고 샘솟듯 솟아오르는 우물이 있다고 해도,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그 물을 마실 수 없듯이,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의 우물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퍼 올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이라는 물 항아리에 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내 마음 속에 솟아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채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실을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고백하는 찬양, 예수님의 사랑을 구하는 찬양을 부르는 것도 좋습니다. “예수 사랑해요. 나 주 앞에 엎드려....” //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 “예수님 사랑합니다. / 예수님 경배합니다. / 예수님 채워주소서 / 당신의 사랑으로” // “예수 사랑 / 나의 사랑 / 내 맘 속에 넘쳐 / 형제를 사랑해. 예수 사랑 / 나의 사랑 / 내 맘속에 넘쳐 / 자매를 사랑해”
교우 여러분,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인간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전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나의 사랑의 감정만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사랑을 공급받아 그 사랑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자기 힘으로 안 됩니다. 자기의 말재주나 자기의 인간관계의 친화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의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했다고 말했습니다.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고린도전서 2장 1-5절까지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20절 하반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뜻 속에는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기도하며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지원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협력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들에게 임하여 권능을 받아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 보혈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합시다. 한 영혼을 전도합시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시작합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세상의 청지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명령, 최고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고, 예수님 사랑을 공급받아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 우리가 받은 최고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
2013년 04월 14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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