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시체를 도륙한 살인사건이 경기 용인에서 발생했습니다. 사건의 범인이 학교를 중퇴한 10대 청소년이라는 점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19살인 피의자 심모군은 친구로 지내던 김모양(17살)을 강간 후 목 졸라 살해한 뒤 공업용 커터칼로 16시간 동안 시신을 훼손했습니다. 그에겐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카카오톡 스토리에 "악감정 따위도 없었고, 좋은 감정 따위도 없었고, 날 미워하세요. 난 지옥에 가고 싶었어요"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 10대들의 범죄가 갈수록 흉포화하고 있습니다. 살인, 강간, 집단성매매 등 성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강력하고 지능화된 범죄 사건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12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살인·강도·강간 및 강제추행·방화 등 4대 강력범죄를 저질러 검거된 미성년자는 3239명에 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어떤 세상을 이루며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초,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본인의 알몸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후에 1만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받고 팔았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 동영상들은 인터넷 카페에서 거래가 되었고, 그런 카페를 적발하고 보니까 운영자들 중에는 12살짜리 초등학생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이 음란동영상을 찍고 불법거래 알선까지 하다니 상상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성교육 전문가들은 이런 뉴스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문제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어 온 일이고, 터질 것이 이제야 터졌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터넷 상의 비공개 음란카페가 약 2만여 개 이상 되는 걸로 추정하고 있고, 이번 사건은 그중에 몇 개가 걸린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어떤 세상을 이루며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또한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한 보험사기가 10대들 사이에서도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는 것은 청소년 범죄가 빠른 속도로 지능화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지난달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보험사기로 적발된 10대는 1562명으로, 2010년의 586명보다 3배 가까이 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어떤 세상을 이루며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성인 영화, 성인 오락물, 폭력물을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점, 부모가 가정에 없는 시간이 많은 가정의 자녀들이 홀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점, 그들에 대한 가정, 학교, 사회의 무관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꽃이 많이 피어있는 꽃밭을 망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꽃밭에 들어가 발로 밟고 꽃을 꺾고 뿌리를 뽑아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꽃밭을 망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꽃밭을 그냥 놔두면 됩니다. 그러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벌레가 생겨서 저절로 꽃밭이 망쳐집니다. 여러분, 친구간의 우정을 망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돌아다니면서 친구를 마구 헐뜯고 비방을 하지 않아도 우정을 망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내버려 두면 우정이 끝납니다. 여러분, 한 인간을 망치게 하는 법을 아십니까? 이쯤 되면 답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부러 방탕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관심도 갖지 않고 놔두면 저절로 망합니다.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삶의 목표도 없이 살다가 그냥 불행하게 허무하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무관심, 방치, 포기, 부정적인 마음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환경,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환경에서 자라나는 사람이라고 해도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후원하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그가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오래전 카우아이 섬 종단 연구 결과에 관한 사례를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카우아이 섬은 그야말로 끔찍하도록 절망적인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아이에게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에 한 명만 있어도 그 아이가 꿋꿋이 성장하여 역경을 극복해 나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또는 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그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이 있었을 때, 인생이 달라졌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사람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죽을 지경에 처해있다가도 사람 때문에 다시 용기와 희망을 얻어 다시 일어서고, 다시 살아납니다. 또한 사람은 잘 나가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도 사람 때문에 병을 얻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파멸의 내리막길로 치 닫기도 합니다. 인생에서, 특히 자라나는 성장세대에게 있어서 누구의 관심과 사랑을 받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에게 영향을 받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을 베풀고,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발견하게 하고, 바른 삶의 자세로 살아가도록 해주는 사람이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 사람을 일컬어 멘토라고 합니다.
요즘 우리사회에 멘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나의 멘토는 누구누구입니다.’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그 어원을 설명하자면, 멘토는 호머가 쓴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주전 12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출정하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쿠스를 가장 믿을 만한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그의 이름이 멘토입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 동안 왕자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들 텔레마쿠스가 너무도 잘 컸습니다. 아들을 맡은 친구가 어린 텔레마쿠스에게 책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얻게 하는 스승이자 조언자, 친구이자 상담자로,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주고, 그리고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한 결과였습니다.
그 후로 ‘멘토’라는 이름은 현명하고 신뢰하고 본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고, 그를 본 받고 따르고 영향을 받는 사람을 ‘멘티’ 또는 ‘멘토리’라고 하고, 둘 사이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 영향력을 끼치는 관계적 경험을 ‘멘토링’이라고 합니다. 다시 정리하여 설명하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정한 관계에 의해서 장, 단기적으로 혹은 정규적, 비정규적으로 개인적인 영향을 끼치는 모든 과정을 멘토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들이 이런 멘토링의 관계에서 신앙을 전수해 주고,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례가 너무도 많습니다. 삼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관계도 그렇고,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 장인 이드로와 사위 모세, 모세와 여호수아,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삼초 모르드개와 조카 에스더, 선지자 나단과 왕 다윗, 아버지 다윗과 아들 솔로몬, 스승 선지자 엘리야와 제자 선지자 엘리사, 선지자 이사야와 히스기야 왕, 바나바와 사울,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바나바와 마가, 바울과 디모데, 바울과 오네시모 등등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멘토링의 관계를 형성하여 본을 보이고, 본받으며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바울과 디모데도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형성하여 본을 보이고, 본받으며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의 시작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한다고 썼습니다. 물론 디모데는 바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2절에 디모데를 일컬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시 루스드라에 갔을 때, 거기에서 디모데를 처음 만났습니다. 디모데의 신앙과 가능성을 본 바울은 디모데를 선교 여행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 전할 기회도 주었고, 새로 개척한 교회에 목회할 수 있도록 했으며, 목회하는 그에게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써서 목회를 돕고 후원하였습니다. 그 편지가 디모데전서와 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디모데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가르침과 격려와 충고와 본을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멘토링이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실까요? 농사를 잘 짓는 것일까요? 환경을 잘 가꾸고 지키는 것일까요? 큰 건물을 건축하는 것일까요?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것일까요? 인류의 발전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것일까요? 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과 달란트를 사용하여 우리가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것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과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씀하셨고, 목숨을 구하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가 예수님을 주로 믿어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더 많이 기록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것을 제일 좋아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면 압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셨습니다. 천국을 선포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내쫓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존귀한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과 함께 중요한 일이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데는 혼자서보다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더라도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할 수 있는 인물이 되는 데는 물론 사도 바울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본문 5절 말씀에, 디모데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게 된 것은 디모데가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배우고 본 받고 물려받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디모데처럼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많이 받고 자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복이 없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고, 누군가가 나를 키워주고 세워주어서 이 모습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또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누군가를 키워주고 세워주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멘토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멘토가 되었습니까?
멘토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합니다. 멘토링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 기초단계인 기도 멘토링을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학교 학생들을 위해 영적 기도 후원을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기도 후원은 단지 나라는 한 사람의 후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하는 엄청난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안에서 기도 부모가 되어서 한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기도로 후원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영적인 사역입니다. 비록 여러분 가운데 교회학교 학생들을 기도 후원하는 멘토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부모의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기억하시고, 여러분 스스로 자녀들이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영적인 후원자, 영적인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은 본을 보이고 본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엄마와 아이가 토요일에 백화점에 갔습니다. 장난감 코너 앞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씁니다. “엄마, 장난감 사 줘! 장난감 사달란 말이야!” 그러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엄마가 아이에게 타일렀습니다. “엄마에게 존대말을 하라고 그랬지요? 다시 말해 보세요.” 아이가 존대말로 말합니다. “엄마, 장난감 사주세요.” “안돼요. 오늘은 장난감 사러 온 게 아니예요.” 아이는 존대말로 했는데도 엄마가 장난감을 사주지 않자, 더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면서 “엄마가 밖에서 이렇게 떼쓰면 집에 가서 어떻게 한다고 했지요?” 그러자 그 아이가 하는 말, “죽이신댔어요.” 그 엄마랑 아이가 주일날 교회에 가는데 아이가 장난을 심하게 칩니다. 장난을 치느라 엄마를 안 따라오는 아이에게 엄마가 장난 좀 그만 치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급기야 엄마가 화가 나서 이렇게 내뱉었습니다. “자랄 좀 그만해! 예배 늦는단 말야!” 엄마와 아이가 교회에 늦게 도착했을 때 마침 교구 목사님이 예배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얘야. 오늘은 좀 늦었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대답하는 말, “예, 지랄 좀 하다가 오느라 늦었어요.” 그러더랍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꾸 듣는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자꾸 보는 것을 따라하게 됩니다. 특히 자라나는 성장세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심리학에 ‘거울효과(Mirror Effect)’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방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하는 심리를 말합니다.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 있는 대상을 자꾸 바라보게 되고, 자꾸 바라보게 되면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법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받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입니다. 언제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멘토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의 멘토링은 사람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을 것을 권면했습니다. 디모데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를 받아 읽는 모든 교회 교인들에게, 그의 목회적 손길이 닫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 말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에게도 빌립보서 4장 9절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본받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이나 인물됨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본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도록, 예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본을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녀에게, 여러분이 스승이라면 제자에게, 여러분이 선배라면 후배에게, 여러분이 상사라면 부하 직원에게, 여러분이 그 누군가에게 멘토가 되어 멘토링을 해야 한다면, 궁극적으로 여러분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안에서의 멘토링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선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로 돕고, 서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부르시고 세워주셨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본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멘토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그 신앙을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다른 이들에게 본을 보이면 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려는 그 신앙의 자세를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다른 이들에게 본을 보이면 됩니다. 우리는 선하지도 않고 때론 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를 회개하고 날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그 모습을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다른 이들에게 본을 보이면 됩니다. 우리는 지혜롭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성령 충만을 구하여 하늘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워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가는 그 신앙의 본을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다른 이들에게 본을 보이면 됩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해 지기 위해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려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다른 이들에게 본을 보이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 7절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바울과 동역자들을 본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본받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선순환입니다. 주님을 본받는 사람을 보고 내가 그를 본받고, 그런 나를 다른 사람이 본받아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얀 눈이 내린 곳에 먼저 걸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발자국을 보고 뒤에 사람들이 따라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멘토가 된다면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봐야 합니다. 사실 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후배들에게, 성장세대에게, 다음세대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가 되기 전에는 함부로 살았던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자녀가 자신을 닮을까 봐 부모로써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를 거울삼아 닮는 사람이 있다는 것, 바라봄의 법칙에 의해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그가 나를 닮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의 모습과 행실과 삶이 조금이라도 더 바르게 될 수 있기를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본을 보이기 위해 우리 자신이 더욱 성숙해지고, 온전해 지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사람에게라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우리가 한 명의 자녀에게라도 좋은 본을 보일 수 있다면, 우리가 다음 세대 한 사람에게라도 좋은 신앙의 멘토가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희망으로 하나씩 채워져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학교를 위해 부모와 교사와 성도 여러분이 함께 해야 합니다. 디모데에게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사도 바울이 영향을 준 것처럼, 우리 모두 함께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점점 세대 간에 갈등이 생기고 멀어지고 나뉘어지는 세태 속에서 세대 간에 서로 본을 보이고 본받고, 멘토가 되고 멘토링을 하고, 영적 기도 부모가 되어 다음 세대와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음세대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