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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하기 위해 삽니다.  [3192]
· 설교 일자 : 2009년 04월 12일
· 본문 말씀 : 로마서 6장 4~11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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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하기 위해 삽니다. (로마서 6장 4~11절)

  제레미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아였습니다. 열두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2학년이었으며 학습능력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의 담당 교사는 도리스 밀러였는데, 제레미 때문에 종종 속상할 때가 많았습니다.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꿈틀대거나, 침을 질질 흘리며 동물과 같은 이상한 소리를 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 부활절이 다가오는 봄, 밀러 선생은 학생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서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커다란 플라스틱 모형계란에 새 생명을 의미하는 물건을 담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19명의 학생들이 숙제를 제출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커다란 플라스틱 계란 안에 꽃을 담아왔고, 어떤 아이는 나비를 담아왔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계란을 열었을 때, 밀러 선생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커다란 플라스틱 모형 계란 안은 텅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레미의 계란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음 계란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그때 갑자기 제레미가 “밀러 선생님, 제 계란에 대해서는 왜 아무 설명도 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당황한 밀러 선생은 “네 계란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레미는 “맞아요. 하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밀러 선생은 “예수님의 무덤이 왜 비어 있었는지 아니?”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서 무덤에 묻히셨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죠.” 제레미의 대답을 듣고 밀러 선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제레미에 대한 그녀의 냉랭했던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3개월 뒤, 제레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레미의 장례식장을 찾아온 조문객들은 그의 관위에 19개의 빈 계란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레미를 포함한 같은 반 친구 들의 19명의 빈 계란입니다. 그 빈계란은 부활을 소망하는 계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빈무덤을 통해서 부활의 소망을 갖습니다. 나도 부활하여 나의 무덤도 빈무덤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부활주일 아침 축하 인사드립니다. 부활의 믿음과 부활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으로 기쁨이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가정 안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비아냥거렸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물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얼마든지 손에 박힌 못 정도는 간단히 뽑으시고 내려오실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붙들어 둔 것은 세 개의 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붙들어 둔 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모든 것이 다 끝날 줄 알았습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산헤드린 공의회원들, 그리고 아우성치던 수많은 무리들, 빌라도와 로마 군병들은 다 끝났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이젠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축배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무덤에 장사지내고, 큰 돌문으로 막고, 돌문에 봉인을 하고, 경비병을 세워 그 무덤을 지키도록 하면, 시신은 며칠 지나면 썩어 버릴 것이고, 그러면 끝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비참하게 끝나는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에, 죽음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무덤 속에 가두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결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과, 예수님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서 큰 돌로 봉인까지 하고서 경비병을 두어 지켰지만, 그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파멸당하고 패배하고 저주에 영원히 던져지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신 죽으시고,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장사지낸 무덤은 부활의 무대였습니다. 십자가가 절정의 무대가 아니라 빈무덤이 절정의 무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클라이막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클라이막스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에는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죽음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살긴 살지만 결국 죽기위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죽기 위해 삽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인생을 삽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의 삶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이라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여러분, 이름을 남기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산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기 위해 삽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기 위해서 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상한 취미생활을 하거나, 교양강좌에 참석하거나, 문화센터에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죽음이라는 고통을 부셔버리고, 죽음이라는 저주를 사라지게 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부활하여 다시 사는 것과 그리고 영원히 살기 위해 신앙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말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죄와 함께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 함께 죽은 것이며,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관계는, 접붙여진 줄기가 접 붙은 나무와 연합하여 어린 가지의 모양과 그 나무의 성질을 이어 받듯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것처럼 우리도 나의 혈기, 정욕, 죄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케 되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날마다 십자가 안에서 죽고, 날마다 부활의 새 생명을 맛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씨앗이 썩어야, 씨앗이 죽어야 새 싹이 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부활한 삶을 새롭게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합니다. 날마다 변화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셔서 우리들도 그 다음 열매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부활의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심판하러 이 땅에 다시 오시면 살아있는 채로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부활하기 위해 죽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곧 부활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확신은 우리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놀라운 차원의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부활하기 위해 삽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부활하기 위해 예수님 안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준비하고, 천국 백성 훈련을 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이 땅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갑니다.
  부활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거짓에 끌려 살지 않습니다. 부활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부활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부활의 소망을 붙잡고 담대히 살아갑니다. 부활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쉽게 낙심하고 쉽게 절망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절망을 이기고 부활의 소망으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암이 재발했습니다. 재수술 받으셔야 합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답니다. 2001년 3월 방광암 진단으로 첫 수술을 받고 8개월여 항암치료를 마친 지 3개월, 임재윤 집사는 또다시 절망의 늪으로 떨어졌습니다. 2002년 2월 재수술을 받고 고통 속에서 항암치료를 받던 어느 날, 사랑의 교회 박남규 목사가 말기암환자를 위해 봉사해 달라는 권유를 듣고 ‘아니 암 환자한테 암 환자를 돌보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짐을 싸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3일간 금식하며 그곳에서 고난주간을 보냈고, 그리고 부활절 아침, 그는 충만한 은혜를 가슴에 안고 말기암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선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벌써 63세가 되어 7년간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완쾌된 몸으로 사역을 하는 게 아니랍니다. 두 번의 수술 뒤에 생긴 급성당뇨로 5년째 하루에 두 번 인슐린을 직접 주사하고 있답니다. 2007년 2월엔 직장암 수술까지 받고 매달 한 차례씩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습니다. “재발하지 않을까, 병원에 갈 때마다 걱정해요. 하지만 제게는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신앙이지요. 주님의 부활은 저에게 더 큰 소망을 꿈꾸게 합니다.” 그가 요즘 돌보는 환우는 췌장암 말기의 함경남도 함흥 출신 탈북인입니다. “형제님, 저도 투병 중이예요. 언제 재발해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하지만 그런 두려움보다 저에겐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평안과 기쁨이 있어요. 형제님도 하루빨리 그것을 체험하기를 바래요.” 이렇게 말하는 임 집사님의 간절함은 결국 닫힌 말기암 환자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임재윤 집사님이 자신도 투병 중이면서 암 말기 환자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질병이나 그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부활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 부활하기 위해 사는 신앙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죽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부활하기 위해 죽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은 부활하기 위해 삽니다. 언제나 잊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믿는 자들은 부활한다는 사실과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부활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활하기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04월 12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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