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닥다리 (창세기 28장 10-22절) |
먹이를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던 개미가 몸만 꾸물꾸물 할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번데기를 보고 매우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멸하는 말투로 “불쌍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구먼! 나는 다니고 싶은 곳을 맘대로 다니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 갈 수 있는데. 쯔쯧!” 하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개미는 번데기를 만났던 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번데기의 빈껍데기만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멋진 날개를 가진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개미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어이, 개미 친구. 지난번처럼 또 자랑 좀 해보시지.” 그 번데기는 나비가 되었습니다. 개미는 번데기가 나비로 변화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함부로 보이는 데로 말했던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어떤 신앙인이 지금 고난 가운데 있다고, 고통 한복판에 있다고 해서 그에 대해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라는 둥, 징계를 받는다는 둥, 죄 지은 것이 있어서 값을 치른다는 둥, 신앙이 약하여 시험에 들었다는 둥, 말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대로만, 아는 대로만 말하지 마십시오. 그 말들이 당신의 속물근성이나, 당신의 수준이나 믿음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지금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여러분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빈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된 번데기처럼, 지금 여러분에게 껍데기를 벗으려는 노력이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믿고, 자신감과 담대함을 가지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실수 했던 것은 보이는 것만 보고, 지금 당장 느껴지는 것만 느끼면서 판단하고 불평하고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위치가 아니고 방향입니다. 신앙은 지금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고 미래의 모습으로 어떻게 변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야곱의 모습은 참으로 번데기 모습 같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에서와 야곱 쌍둥이는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에도 야곱이 몇초 차이로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먼저 나오려고 했는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발뒤꿈치를 잡았다”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자라나 형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면서 어머니의 일을 돕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그 속에는 욕심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형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자기가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 나갔다가 허기져서 돌아온 형이 팥죽을 쑤고 있는 야곱에게 죽 좀 먹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다 싶은 야곱은 형에게 형의 장자의 명분하고 죽하고 바꾸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에서는 아주 쉽게 “그래!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어!” 그리고는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어느 날, 야곱은 형이 없는 틈을 타 어머니 리브가와 모의하여 나이 들어 눈이 흐려진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아냅니다. 형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요리해 온 것처럼 염소새끼를 잡아 요리하고, 아버지가 야곱에게서 에서의 몸 냄새를 느낄 수 있도록 에서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에서처럼 염소새끼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에 분장을 하여 교묘히 속여 축복을 받습니다. 나중에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께 들어오자 모든 일이 들통이 납니다. 이제 이삭과 리브가와 에서와 야곱의 가정에는 불화의 바람이 휘몰아치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안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에게로 보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형의 분노가 사그라질 때까지 밧단아람이라는 외가 쪽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도망자 야곱이 자기 집 브엘세바에서 출발하여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서 몇 곳을 거쳐 어느 곳에서 밤을 지내는 장면의 말씀입니다.
야곱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 형의 분노를 샀습니다. 자기 형의 손에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려움에 가득 찬 신세로 야곱은 도망쳤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얼마나 오래 집을 떠나 있어야 할까? 집 떠나는 그에게 부모가 외삼촌 집에 가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외삼촌 집에서 나와 결혼할 만한 상대가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닙니다. 도망치고 있는 야곱의 두려움속의 고민입니다.
야곱은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거짓말과 속임수로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야곱은 우리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제일 우리들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인물이 야곱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 보다는 자기 힘으로 자신을 의존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목표, 자기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자기 성공, 자기 욕심,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야곱은 도피자입니다. 자신이 지은 잘못과 죄를 다 털어내고 용서를 구하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보다는 형을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피해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러분, 과속방지턱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학교 앞 도로나 골목길에 보행자나 어린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주행속도를 늦추어 과속하지 말라고 턱을 만들어 놓고 황색선을 칠해 놓은 것입니다. 과속방지턱이 나오면 달리던 차는 속도를 늦추어야 합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냥 달려 지나가면 차체의 쇼바라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Shock Absorber라는 것이 손상되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타이어가 인체로 말하여 발에 해당한다면 쇼크 업소바는 다리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특히 다리의 연골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과속방지턱 앞에서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달리던 속도와 차의 무게 때문에 쇼크 업쇼바가 망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차의 안전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커브 길에서 전복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욕심과 목적 지향적 삶의 속도에 과속방지턱을 놓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경쟁과 조급함과 욕심 때문에 바쁘게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과속방지턱과 같은 사건을 만나게 하십니다. 때론 질병으로, 사업실패로, 가정의 문제로, 여러 장애물로 우리에게 과속방지턱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브레이크를 밟게 하십니다. 만약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무시하고 그냥 달려가면 반드시 인생에 탈이 나게 됩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야곱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밤을 지내야 하는 곳은 쓸쓸한 광야, 고통의 광야, 이별의 아픔을 품고 누워있는 고독한 광야였습니다. 야곱에게는 생애에 처음으로 고독을 느끼는 밤이었습니다. 어머니 치마폭에서 자라난 야곱, 거친 광야에 사냥을 나와 본 적도 없는 야곱, 지금까지 한 번도 집에서 멀리 떠나 본 적이 없는 야곱은 일생 처음으로 낯선 상황 속에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광야 한복판 어느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번데기 같은 야곱의 신세였습니다. 사람은 철저히 고독해질 때,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립니다.
이어령 교수가 2004년에 1년간 일본에서 혼자 공부하던 시절, 혼자 자취하면서 밤마다 절대 고독 속에서 내 한계를 절감하고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며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시를 썼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중략) 좀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이렇듯 캄캄해 보이기만 하는 절규는 다음에 나오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에서 빛을 만납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 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지라도 용서하소서’ //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에 있느냐고/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올로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버려진 것 같고, 외면당한 것 같고,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맬 때에 사람은 하나님, 절대자에게 손을 내밉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음과 군중 속에 휩쓸린다.”고 영성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말했습니다. 아무 뜻 없는 말이라도 계속 흐르도록 해야 하고,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계속 틀어 놓아야 하고, 라디오라도 틀어 놓치 않으면 허전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수많은 군중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고독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라디오, 텔레비전 소리가 여러분의 빈 곳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 물질, 권력, 명예, 다른 어떤 쾌락, 취미생활 등으로도 그 빈 곳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내면속에 있습니다. 아내도, 남편도, 부모도, 자식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절대 고독의 빈 곳이 있습니다.
떼제공동체의 로제 수사는 “모든 사람 안에는 인간의 친밀함이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의 지대가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신다.”고 했습니다. 폴 스티븐스는 야곱처럼 혼자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보는 필수조건이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혼자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홀로 되자, 복음이 그에게 다가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도망자 야곱에게 진실로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프로젝트는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욕심꾸러기인 지렁이 같은 야곱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긍휼로 그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긍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그 날 밤 꿈에 본 것은 12, 13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이 꿈속에서 본 처음 것은 사닥다리였습니다. 사다리라고 말하지요. 높은 곳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기구입니다. 사닥다리는 낮은 곳과 높은 곳을 이어줍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는 하나님과 이어짐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어졌고, 지금 자신은 외롭고 고통스런 절대 고독 속에 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닥다리 환상을 통해, 광야의 한 쪽에서 두려움과 고독의 돌베개를 베고 누워있는 야곱과 그를 긍휼과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사닥다리 제일 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야곱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사닥다리 없이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최첨단 문화를 만들고, 나름대로 고급학문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닥다리 없이 살아간다면, 결국 절망, 무의미, 자살, 불합리한 행동, 방향 없이 허무의 물살 위를 떠내려가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와 사닥다리를 보여주시고, 그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도망자, 도피자, 거짓말쟁이, 속이는 자, 고독한 자, 욕심으로 살아가는 자를 긍휼로 붙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 하늘에 잇댄 사닥다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생관이 다르고, 삶의 내용이 다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닥다리가 있어야 합니다. 땅의 일들만 생각하고, 땅의 것들만 바라보고, 땅의 소리만 듣고, 땅의 힘만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늘에까지 닿는 사닥다리가 놓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위를 쳐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위엣 것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혼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닥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까? 사닥다리는 내가 놓는다고 놓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과 삶에 놓을 수 있는 사닥다리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하는 사닥다리입니다.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닥다리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입니다. 죄 많은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어주는 분이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마음에 십자가 사다리가 세워집니다.
상처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날기 시험에 낙방한 독수리, 짝으로부터 따돌림 당한 독수리, 윗 독수리로부터 할큄 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들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는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이때, 망루에서 파수를 보고 있던 독수리 중의 영웅이 쏜살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습니다.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괴로워서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가?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영웅 독수리가 날개를 펴자 여기저기 빗금 진 상처 흔적이 보였습니다.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윗 독수리가 할퀸 자국이다. 그러니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리고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어디 있으랴!” 정채봉 씨의 ‘상처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라는 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 땅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온갖 공격과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버림 받고, 고통을 당하고,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깊숙이 찔리시고, 마침내 몸 안에 있는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땅의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과 온갖 상처를 이겨내야 합니다. 땅에 묶여 살지 말고, 하늘과 잇대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늘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닥다리입니다. 십자가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닥다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십자가 사닥다리를 세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품고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품고 사는 사람과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은 다릅니다. 십자가를 장식품이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품고 사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가슴 속에 세우고 사는 사람은, 십자가를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맺고, 십자가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는 말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은혜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은혜가 흐르게 합니다. 십자가라는 사닥다리 없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가슴에 세우고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떻게 말하실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도망자요, 나그네인 야곱은 벧엘 사건을 통해 순례자 야곱이 되었습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고 난 후, 그 다음날 아침, 나그네 야곱은 순례자 야곱이 되었습니다. 도망자요, 도피자인 야곱, 나그네 야곱은, 집을 떠나와 외삼촌의 집을 향해 가면서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만나고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깨닫고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본 야곱,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순례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그냥 끝나는 인생이라면 나그네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 모르고 남들하는 데로 살다가 죽는 인생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은 순례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벧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것과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라고 서원하였습니다.
야곱에게 이 벧엘 체험은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야곱은 그날 밤, 아무런 특징이 없는 광야의 한 곳에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신성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 줄 사건을 겪게 됐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번데기처럼 보였지만 마침내 나비가 되었습니다. 당장은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야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루셨습니다.
이 벧엘 체험은 다양한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양한 상황과 사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베드로는 밤새 허탕 친 그물을 씻는 중 다시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려 끌어올리면서 체험했고,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어린 사무엘은 성막 안 잠자리에 누워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고,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길 위에서 벧엘 체험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 독방에서 쇠약해지고 있던 중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최정범 씨( 미국명 스티브 최)는 1997년 운영하던 여행사가 부도를 맞아 절망하고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1998년 2월 스리랑카에 가서 그들의 삶을 목격하면서 벧엘 체험을 하였습니다. 남서울교회 찬양대 지휘자 권 명선씨는 원일 모를 병으로 1년 반 고통 속에 쓰러져 사망선고를 받은 뒤에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는 벧엘 체험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인생에서 자신의 삶을 전과 후로 나뉘게 했던 극적인 사건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까지 가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의 터닝 포인트, 그 위기를 전환점으로 삼아 새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때는 다짐을 해 놓고, 얼마 되지 않아 다 잊고 과거처럼 살아갑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지금의 모습만 보지 말고, 마음에 십자가라는 사닥다리를 세우고,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변해가고, 새로워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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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23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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