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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주께 맡기라  [3906]
· 설교 일자 : 2009년 09월 27일
· 본문 말씀 : 베드로전서 5장 7~9절 말씀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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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를 주께 맡기라 (베드로전서 5장 7~9절 말씀)

  작년에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저희 집에 도둑이 든 소리가 들렸습니다. 잠결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벗어놓은 안경을 먼저 찾아 썼습니다. 도둑하고 실랑이를 버리려고 해도 뭘 보여야 하니까 말입니다. 모르지요, 안경을 안 써야 뵈는 게 없어서 물불 안 가리고 도둑과 맞설 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머릿속엔 벌써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몇 명이 왔을까? 소리로 봐서는 한 명 같았습니다. 현관문 입구 서재 방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 그 방에는 책 밖에 없는데... 그 방에는 값나갈 물건이라고는 한 쪼가리도 없는데... 사실 우리 집에 오는 도둑은 불쌍합니다. 가져갈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금붙이나 보석이나 돈 많은 예금통장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도둑도 아무 집에나 들어가면 안 됩니다. 언제가 진짜 불쌍한 도둑 사건이 해외토픽에 났었습니다. 도둑질하려고 노부부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만 도둑의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경찰에 인계되었습니다. 그 집의 할아버지가 옛날 복싱선수였던 것을 모르고 함부로 들어갔다가 여지없이 얼굴을 사정없이 맞아 넉 다운 되어 잡힌 것입니다. 여하튼 도둑도 집을 잘 골라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도둑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시지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서재 방 쪽에 들어와 있는 도둑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여유있게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초긴장상태였는지 모릅니다.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워 들으니 조그만 소리로 달그락 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습니다.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섰습니다. 신고를 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일대일로 붙어야 할까? 신고를 해도 내가 문을 열어주어야 경찰이 도둑을 잡으러 들어올 수 있으니 현관문 앞 서재 방쪽으로 가야하고, 일대일로 붙으려니 내 무술실력으로는 도둑이 들고 있을 흉기를 제압할 수 없을 것같고... 그러자 제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잠자고 있는 아내를 헤칠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앞방에 공부하고 와서 골아 떨어져 자고 있는 둘째 아들이 도둑과의 난투극에 깨어나서 섣불리 나를 돕는다고 하다가 다치면 어떻게 하나, 짧은 시간이지만 수많은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짖눌렀습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거실로 살그머니 나가서 불을 확~ 켰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둑이 들었나 봐!’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착각과 걱정으로 뒤엉켜서 만들어진 한 밤중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닥치는 다양한 상황, 사건, 사람들로 인해 근심, 걱정,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스트레스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지난주에 이어 우리를 괴롭히고 무너뜨리는 인생의 지뢰, 스트레스 중에서 생각에 의한 스트레스가 근심, 걱정, 염려입니다. “어떻게 하나” 영어로는 ‘what if’ 라는 상황입니다. “도둑이 들면 어떻게 하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나. 신종 플루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직장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누가 날 공격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과 염려는 상상에 의한 것, 생각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 중에 생각 속에서 “집에 가스 불을 안 끄고 왔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염려는 문제를 부풀려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염려를 하면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게 됩니다. 마음속에 염려를 하면 할수록 어느 순간 작은 것들까지 염려거리가 되어버립니다.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낳고,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불어들입니다. 그러다보면 산더미만한 걱정거리에 눌려 마음은 최악의 상태가 되고 맙니다. 염려는 부정적인 생각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불안, 두려움, 낙심, 좌절, 절망, 의심, 오해, 실패 등 많은 불행을 끌고 들어옵니다. 걱정은 밤 골목의 조폭들처럼 다른 것들과 함께 떼로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는 엔진을 공회전 시키는 것과 같이 어디에도 이르게 하지 못하면서 에너지만 소모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동차를 시동을 켜 놓은 채 세워놓은 상태가 공회전입니다. 공회전이 많으면 엔진도 마모되고 연료는 연료대로 소모됩니다. 이처럼 염려는 나에게 어떤 종류의 이득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염려는 다만 당신을 마비시켜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게 할뿐이다.”라는 말처럼,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근심과 염려는 오히려 당신 자신을 불행하게 할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염려에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흡연이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걱정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잠언 12장 25절에는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잠언 15장 13절에는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했고, 잠언 17장 22절에는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위궤양은 근심, 걱정, 염려가 끊이지 않는 사람들의 병이랍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근심걱정은 심장병, 고혈압, 천식, 류머티스, 갑상선 부전, 관절염, 편두통, 시력감퇴, 목의 통증, 소화불량, 변비, 설사, 현기증, 무기력, 불면증, 알레르기 등 수많은 질병을 일으킨답니다. 어떤 의사는 “질병보다는 질병에 대한 염려 때문에 죽을 확률이 더 높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는데, 걱정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폭력배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염려는 자기 생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놓는 지뢰입니다. 염려는 스스로 자신을 헤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스트레스로 인해 분비되어 소비되지 않은 아드레날린처럼, 해결되지 않은 염려는 믿음과 소망과 평안을 잃어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심하면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인 불안 증세를 가져다줍니다. 걱정이 불안 증세로 발전할 위험성은 20%에 이르고, 여성인 경우는 50%로 늘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걱정하고 더 친하지요. 특히 엄마들이 그렇습니다. 자녀를 삐뚤게 사랑하여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그 불안은 염려하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걱정을 하면서 마음의 평안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물과 불이 함께 섞이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동시에 마음의 평안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염려라는 지뢰를 우리 마음속에 놓습니다. 마귀가 슬그머니 염려라는 지뢰를 우리 생각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 지뢰를 밟으면 연기가 피어올라 점점 사방을 혼미하게 만들어,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염려라는 웅덩이 속으로 점점 더 들어가게 합니다. 그 염려라는 웅덩이 속에는 염려의 친구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불안, 두려움, 낙심, 좌절, 절망, 의심, 오해, 실패 등이 염려와 어울려 다니며 우리를 괴롭히는 조폭들이 다 모여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근심, 걱정,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원수 마귀는 이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걱정거리를 자꾸 우리 마음에 넣어줍니다. 우리 생각에 떠오르게 합니다. 염려는 사탄이 우리 마음에 걸어오는 공격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릇된 생각들로 정신을 분주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대로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염려로 우리의 삶에 우리를 망가뜨리는 공회전만 일어나도록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걱정하고 염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죄입니다. 불신앙의 죄입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시고,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고, 이 세상의 통치자이시란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하나님의 통치를 믿지 못하여 염려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듣기는 들었지만 잊고 살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꿔주실 수 있는 분임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임을,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들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임을 잊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불신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한계를 느끼고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눈을 떼고 상황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염려는 불경건의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건치 않은 사람에게는 근심, 걱정, 염려가 그 마음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경건한 사람은 염려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반대는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염려를 다루지 못하면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염려하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근심, 걱정, 염려가 생겼을 때 곧 바로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걱정, 염려를 멈추기 위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내가 지금 왜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거야? 내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가득 찬 거야?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염려를 내가 지금 왜 하면서 괴로워하는 거야? 이 염려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 근심, 걱정, 염려는 마음이 나뉘어져서 생기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단어의 뜻이 ‘마음을 쓰다, 조심하다’라는 뜻이지만, 얼른 보면 좋은 뜻인 것 같지만 헬라어 단어에는 마음이 나뉘어졌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은 현실과 가상 사이에, 당면한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사이에 마음이 끼어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은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살기보다 부정적인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나뉘지 않도록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수많은 거북이들이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사막을 향해 기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를 향해 기어가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이들은 바닷가와는 정반대 방향인 사막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어가는 주변에는 뒤집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거북이들도 있고,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열 아래서 말라죽은 거북이들과 그들의 뼈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사막을 향해 낑낑대며 기어가고 있습니다. 곧 뼈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방향만 돌려서 해안가로 기어가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과거에 태평양 어느 무인도에서 핵실험 후에 거북이들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거북이들은 해변가로 나와서 알을 낳은 후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막으로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가야할 방향이 잘못 잡히면 죽음의 방향으로, 멸망의 방향으로, 불행의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삶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습니까? 생각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방향을 바로 잡으십시오. 예수님을 통해서 방향을 바꾸십시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 쪽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걱정하며 염려하지 말고 관찰하라는 말씀입니다. 관찰하여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하게 되면 공중의 새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 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피는지 깨닫게 될 것이고,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생들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라는 생각과 믿음이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걱정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에 이렇게 명령합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렇습니다. 염려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아버지십니다. 모든 것을 만드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고,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19장에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북 이스라엘 왕국을 포로로 사로잡아 흩어지게 했습니다. 산헤립은 남 유다 왕국마저도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대장관을 보내어 엄포를 놓기도 하고, 겁을 줍니다. 그리고 남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비방하고 엄포를 놓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받아들었을 때, 앗수르 군대가 금방 공격해 올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편지를 들고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천지를 만드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 산헤립이 하는 말을 들으시옵소서. 이 편지를 보시옵소서. 그들의 신은 나무요 돌뿐인 신 같지도 않은 우상들뿐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오천명을 쳐 다 송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였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주저앉아 걱정하고 염려하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 벌벌 떨고 있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 근심거리를 들고 가서 근심과 불안의 근거인 편지를 펴 놓고서 하나님께 보여드리면서 아뢰고, 간구하였기에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남유다 왕국의 염려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한다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로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염려를 하나님께 들고 가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말씀에,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여기서 “맡기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말 위에 얹는 담요처럼, 어떤 물건 위에 다른 무엇인가를 걸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은 후에 젖은 수건을 들고 다니지 않지요? 그 수건을 수건걸이에 걸쳐 놓지요? 그것이 맡기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7절은, 하나님께 젖은 수건을 수건걸이에 걸쳐 맡기듯 우리의 근심, 걱정, 염려는 다 주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 한나라는 여인이 자식이 없어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습니다. 한나가 너무도 힘들고 괴로우니까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오래 동안 기도를 하였습니다. 마치 술취한 사람으로 보일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을 움직이며 간절히 열심히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와서 술을 끊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나가 “저를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제 심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느라 그렇습니다. 제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니 그 말을 들은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 축복의 말에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고 18절에 보면 한나가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한나는 온갖 근심과 괴로움과 스트레스로 가득 찬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엘리 제사장의 축복의 말로 마음속을 채웠습니다. 제사장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 마음속에 근심을 내어 쫓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스트레스와 근심, 걱정, 괴로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을 가득 채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자식을 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근심, 걱정, 염려를 쏟아 내고,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채우고, 믿음으로 그 말씀을 붙잡고 뿌리내리게 할 때, 우리에게 근심, 걱정, 염려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죽으면 “서두르다, 걱정하다, 그리고 묻히다”라고 묘비명에 써야 할 사람들이 허다하다고 합니다. 나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를 한번 깊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느라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상하고 무너지고 흔들리는 신앙인되지 마십시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근심, 걱정, 염려라는 지뢰가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근심, 걱정, 염려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평안과 담대함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09월 27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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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 일시  2009년 06월 14일
· 말씀  사도행전 7장 54~6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생수의 강
· 일시  2009년 06월 07일
· 말씀  요한복음 7장 37-3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성령님 임재하소서 !
· 일시  2009년 05월 31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15~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
· 일시  2009년 05월 24일
· 말씀  야고보서 1장 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항상 기도 하십시오
· 일시  2009년 05월 17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18~20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
· 일시  2009년 05월 10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2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십시오
· 일시  2009년 05월 03일
· 말씀  잠언 22장 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성령의 검 - 하나님의 전신갑주(VI)
· 일시  2009년 04월 26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13~1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복음의 신 - 하나님의 전신갑주 (V)
· 일시  2009년 04월 19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13~1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