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의 비탈길 (고린도후서 7장 8~11절) |
어떤 부자 노인이 평생토록 돈 한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돈을 모으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많은 돈을 모으기만 하였지 돈을 쓸 줄을 몰랐습니다. 그 부자가 세상을 떠날 때, 자녀들을 모아두고 상여 네 귀퉁이에 “걸”자를 써 붙이라고 유언을 하였답니다. 자녀들이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부자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 부자의 상여가 꾸며지고 상여가 나갈 때, 어떤 노인이 상여 네 귀퉁이에 써 붙인 “걸”자를 보더니, 그 부자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탄식을 하더랍니다. 자녀들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걸”자의 의미가 “착한 일이나 많이 할 걸” “자녀들하고 잘 살아볼 걸” “쌓아둔 돈으로 베풀면서 살 걸”이라는 후회의 글자라고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후회를 많이 합니다. 장례식장에서 많이 후회합니다. 고인을 향하여 많은 후회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 걸, ~걸”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후회하며 삽니다. 하루 동안에도 얼마나 많이 후회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후회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나, 후회할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인생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생이 한 번 뿐이기 때문에 언제나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물론 완벽한 인생이란 있지도 않습니다.
목사이며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 심리학 교수인 레스 패롯은 “후회는 이루어지지 않은 욕구로 인한 실망이나 상실, 또는 과거에 했거나 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생긴 고민과 같은 하나의 감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부모님께 더 잘했어야 했는데...”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했는데...” “그 주식을 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부부 문제를 겪지 않아도 될 텐데...” “그 일만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을 텐데...” “그 때 이렇게 이렇게 했었어야 했는데...”
아무리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고, 해보지 못했던 어떤 것에 대해 후회를 합니다. 저는 멋진 연애를 못해 본 것이 후회됩니다. 이 말은 조심스러운 말입니다. 제 아내가 잘못 들으면 다른 여자하고 멋진 연애를 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말로 들릴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제 아내하고 연애하던 시절에 멋지게 연애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일이 결혼기념일인데 노회에 참석하러 가느라 같이 있지도 못하는데 이렇게라도 가정 목회 관리를 해야지요. 마무리가 잘 안 되면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대체로 후회는 크게 두 가지 내용 즉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 “그 때 무엇 무엇을 했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합니다. 잘못한 것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실수가 없거나 잘못한 것이 없을 지라도, 어떤 것을 잘 하느라, 다른 그 무엇을 해 보지 못한 것, 더 많은 것을 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후회하며 삽니다.
그런데 후회는 비탈길과도 같아서, 후회를 하면 기분이 위를 향해 업 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갑니다. 우리가 후회를 하게 되면 힘이 불끈 솟는 것이 아니라 힘이 쑥 빠집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거나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자책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럴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통스럽고, 슬프기도 하고, 우울해집니다. 심하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마구 학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회로 시작된 우리의 마음은 평안이 산산조각납니다. 이렇게 후회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오염시킵니다. 후회를 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은 위험한 비탈길로 내려가게 됩니다. 우리의 에너지를 쑥쑥 빼앗아가고 희망을 깨뜨려 놓습니다. 후회를 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지만,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자신이 후회하게 되는 이유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면 그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증오하고 공격하려고 합니다. 지난주 설교의 내용처럼, 불만, 불평, 원망이 진행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후회는 가파르고 위험한 비탈길입니다. 그 내리막길 끝에는 평지가 아닙니다. 초원이 아닙니다. 쉴만한 곳이 아닙니다. 웅덩이입니다. 우리를 빠뜨리고 가두고 괴롭히고 멸망케 하는 웅덩이입니다. 위험한 골짜기입니다. 후회는 우리를 부정적인 골짜기로, 고통의 골짜기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끄는 가파르고 위험한 비탈길이 후회입니다.
세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사람은 각각 두 개의 보따리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세 사람 모두 보따리 하나는 목에 매달아 가슴 앞쪽으로 내려오게 하고, 다른 하나는 등에 지고 다녔습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그가 지고 있는 보따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등에 있는 보따리에는 가족들과 친척들이 한 모든 좋은 것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등 뒤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그리고 목 앞에 달고 있는 보따리에는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나쁜 일들과 내가 한 모든 실수들이 들어 있어요. 나는 종종 멈추어 서서 앞에 달고 있는 이 보따리를 풀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꺼낸 다음 그것들을 살펴보고 또 그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모든 좋지 않은 것들에 골몰하면서 자주 멈추어 섰기 때문에 앞으로 나가는 속도가 느리고 별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보따리에는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좋은 일들이 다 들어 있어요. 나는 그것들을 보고 싶을 때마다 자주 꺼내 보고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며 추억에 잠기곤 해요. 등 뒤에 매고 있는 보따리요? 그 보따리에는 내가 실수한 것과 후회하는 것들을 모두 담아서 언제나 짊어지고 다녀요. 물론 무겁죠. 그래서 빨리 갈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그 보따리를 내려놓을 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앞에 있는 보따리에는 내가 경험한 모든 축복들과 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했던 좋은 일들을 모두 담고 다녀요. 무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실 이 보따리가 저를 앞으로 나가게 해주죠. 등 뒤에 있는 보따리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그냥 빈 보따리에요. 지난날의 모든 실수와 후회거리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거든요.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돼요.”
여러분은 이 세 사람 중에 어떤 사람과 같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마지막 세 번째 사람처럼 살고 있다면 대단한 경지에 오른 사람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후회거리들이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모두 짊어지고 다니기 일쑤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교회를 책망한 바울이 자신이 책망한 것을 후회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그 책망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회개하는 기회를 주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중요한 내용을 두 개의 단어로 말하면, 후회와 회개입니다. 본문에서 ‘근심’은 후회와 감정적 아픔 즉 ‘슬픔’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더 잘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자책하고 우울해지도록 하는 슬픔을 가져오는 후회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슬픔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근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슬픔을 품는 회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이라고 표현한 내용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말하는 것이고, 세상 근심은 후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표면적으로 세상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유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함이 없는 후회는 그냥 세상의 슬픔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무익한 후회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를 인생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변화시키지 못할 때, 그것은 무익한 후회가 됩니다. 아니 무익한 후회가 아니라 해를 가져오는 후회가 됩니다.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어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어 바른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돌이킵니다. 후회의 비탈길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항상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 자신이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에 빠져 있지 말고, 자신의 허물과 죄와 실수와 과거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길에서 돌이킬 힘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허물과 실수와 과거에서 돌이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도록 회개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경건한 근심이고, 거룩한 근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후회하며 살지 말고 회개하며 살아라! 이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가롯 유다는 뻔뻔스럽게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버린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등진 것은 둘 다 똑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행한 죄 때문에 슬픔에 압도당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해 ‘스스로 뉘우쳐’ 즉 후회하면서 가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후회만 하다가 죄책감에 짖 눌려 결국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이 산란하고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심히 통곡하고 자신의 타락을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후회가 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후회가 될 때 그 후회를 통해서 무엇을 하기를 바라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후회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먼저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죄와 허물과 실수에 대해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후회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28장 13절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1장 7하, 9절 말씀입니다. “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우리가 후회하고 있는 그것을 깨끗이 정리해 주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주님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18세기 찬송가 작사가로 잘 알려져 있는 시인 윌리엄 카우퍼는 평생 주기적으로 우울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몇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33세 때에는 18개월 동안 정신 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가롯 유다보다 더 저주받은”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성경을 읽던 그는 로마서 3장 25절에 의해 죄 용서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찬송가 258장, “1절,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 4절, 날 정케 하신 피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그 사랑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살 동안 받은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피, 그 보배로운 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90번이라는 숫자는 단지 490번까지의 횟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서해 주라는 뜻의 숫자입니다. 용서를 잘 못 해주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그 이상으로 용서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며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잘못과 허물과 죄악을 또 다시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후회의 비탈길로 내려가지 않도록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위에 세워진 십자가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새로운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어떤 허물일지라도, 어떤 죄일지라도, 어떤 잘못일지라도, 어떤 실수일지라도,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더라도 용서해 주시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항상 죄인이고, 쓸모없는 존재이고, 불완전하고, 허물 많고 실수와 실패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후회하지 말고 하나님께 들고와 회개하십시오. 그리하여 용서받으십니다.
교우 여러분, 후회의 비탈길을 걸어가지 마십시오. 회개함으로 새로운 시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농가에 강한 폭풍우가 몰아쳐 농가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섯 그루의 늠름하게 서 있던 배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 나무를 타고 놀았고, 그 나무에서 열리는 배를 따서 평생 먹으면서 살았던 농부는 그 나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이웃이 그 농부에게 배나무가 다 쓰러진 것에 대해 애석한 마음을 전하면서, 쓰러진 배나무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하던 농부는 “열매는 거두어들이고 나머지 배나무는 태워버릴 것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농부의 말에 비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남은 것은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할 교훈들을 배우고, 좀 더 지혜롭게 그리고 좀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농부와는 달리 쓰러진 나무를 헛간이나 마당으로 끌어다 놓고 화려했던 과거의 열매 맺던 시절을 붙잡기 위해 헛된 수고를 계속하는 농부가 될 것입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의 열매는 상하고 역겨운 냄새를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는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들 끓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후회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리고 후회의 뿌리를 밝혀내어 거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찾아서 자신을 고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를 통해 배우는 것과 과거 속에서 머물러 뒹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회개하고 새롭게 되시고, 후회하며 과거속에 뒹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교우 여러분, 과거를 통해 배우시기 바랍니다. 과거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미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서 있게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과거의 방향에서 등을 돌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과거에 붙잡혀 있지 않고, 실수와 잘못과 죄에게 발목이 잡혀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시길 원하십니다.
가롯 유다는 자신의 죄로부터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후회만 하다가 죽음의 길을 선택하여 인생을 끝냈고, 베드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행동을 고치며 예수님께 삶을 다시 헌신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인 것에 대해 후회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것, 죄 지은 것을 분명히 회개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분명한 복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실수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라 실수하고 죄를 짓고, 허물 많고,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시작한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다시 회복되어 새롭게 살아간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후회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한 사람들은 기독교 역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여러분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시간 낭비입니다. 이 세상에 후회할 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후회의 비탈길로 내려가지 말고, 용서와 은혜의 십자가 언덕에 서서 회복되고, 새로워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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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8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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