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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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3370]
· 설교 일자 : 2010년 03월 07일
· 본문 말씀 :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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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어제 아침 뉴스에 이집트에서 발표한 것을 보니까, 수천 년 전의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미이라의 DNA를 연구한 결과, 그는 뼈가 골절되고 말라리아 때문에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할 때에 그 피라미드에서 여러 종류의 씨앗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간, 여러분! 수천 년 된 그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국립수목원은 그 무덤에서 발견된 완두콩 씨앗 5개를 확보해서 그 중 2개를 국립수목원에서 기르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피라미드 완두콩은 2007년 당시 수가 많이 늘어 씨앗은 1500개, 다 자란 식물체는 200개나 된다고 합니다. 피라미드 완두콩은 꼬투리가 진한 보라색이고, 꽃도 분홍으로 흰 꽃을 피우는 보통 완두콩과 많이 다르답니다.
  우리는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된 완두콩 씨앗이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흙에 심으니까 싹이 나와 열매까지 맺었다는 사실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생명이 살아있으면 수천 년이 지나도 싹이 나옵니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약 그 씨앗이 그냥 무덤에만 계속 있었다면, 그냥 씨앗 한 알로만 남아 전시실에 유리관 안에 ‘투탕카멘 무덤 안에서 발굴된 완두콩 씨앗’라고 이름이 적혀 전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땅에 심었더니 생명이 자라나고 많은 완두콩을 열매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24절, 25절에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지 밀알과 같은 씨앗을 예로 들어 생물학을 가르치시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봄의 계절이 시작되는 3월 첫 주일 아침입니다. 겨우내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딱딱한 땅을 헤집고 싹이 터 올라오는 3월입니다. 생명의 신비가 펼쳐지는 3월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따라가는 절기인 사순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십자가에서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앙은 크게 4개의 신앙입니다. 첫째는 창조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과 우리는 상관없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지도 않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인간에게 죄와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둘째, 십자가 신앙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이것이 셋째, 부활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넷째, 재림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곧 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에 종말신앙이라고도 합니다.
  네 가지의 신앙이 다 중요합니다만, 특별히 십자가 신앙을 갖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들을 바르게 믿는 십자가 신앙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이 십자가 신앙을 바르게 그리고 온전히 가질 때, 우리는 복음의 능력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본문 말씀에서 이 십자가에 대해서 오해하고 무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출애굽부터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적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기적적인 표적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너무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맞는 기적만을 요구했기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경멸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다윗왕처럼 강력한 나라를 회복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를 처형하는 형틀위에서 수치스럽게 죽어간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인 즉 그리스인들도 십자가의 도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강조하고, 사변적인 논리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학식과 인간적인 이성과 교만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진정한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사람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았다면,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나타나 있음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지혜의 틀에 갇혀 십자가를 어리석은 일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만을 전한다고 강조하면서,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3-25절,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멸망할 자인지 구원 얻을 자인지를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은 십자가에 대한 태도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깨닫게 된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과 깨달음은 이 세상에 속한 어떤 지혜로도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지혜로만 가능한 것임을 증거 합니다. 이 같은 지혜는 오늘날에도 복음 선포의 현장에서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심령 속에 여전히 역사하는 신령한 지혜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초, 중, 고등학생들에게 모스크바에 있는 무신론 박물관을 견학시킨답니다. 한 안내인이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종교의 해악을 증명하도록 고안된 전시품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 인간이 동물로 진화했나를 설명하는 그림들, 끔찍한 종교재판 장면 등등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내인이 오래된 십자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학생들, 옛날엔 사람들이 무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주려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무식했던 거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 받고 예수가 부활했던 것처럼 자기들도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서 영원히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고 가르쳤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얘기예요.” 그 말을 듣던 열두 살 된 소녀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내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동무, 전 제가 잘못한 일들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 때문에 우시곤 했구요. 전 아버지를 속이고, 학교에선 부정행위를 했어요. 전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다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전 죽는 게 무서워요. 전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언젠간 나도 저렇게 관 속에 눕게 되고 모든 게 끝장 날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전 살고 싶어요. 저는 우리 조상들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똑똑해서 죄에 짖 눌려 살고, 천국을 놓치는 것보단 어리석더라도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게 더 좋아요. 전, 선생님 동무가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겠어요.” 안내인의 십자가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부정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진리는 한 소녀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결단케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진리의 말씀을 말합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멸망하는 자들이란 죄악된 인간의 지혜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구원을 얻는 자들이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죄를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되고 죄에 대하여 죽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어야합니까? 무엇이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 번은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친구가 정신병원을 방문했습니다. 한 시간쯤 돌아다니며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전부 나름대로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는 모습도 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을 가둬두는 거지요?”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에게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이야기밖에는 안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을 먹고도, 점심 먹고도, 저녁을 먹고도 오직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정신병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정신병자입니다. 며칠 전에는 채팅으로 만나 결혼한 젊은 부부가 각각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자기들이 낳은 아이가 죽도록 방치해 두었고, 사이버 상의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경기도에서는 게임에 빠져 사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게임 좀 그만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고, 어머니를 때려 죽이고 피시방에서 며칠을 밤샘하고 지내다가 경찰에 잡힌 사건도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정신적인 문제이고, 심각한 악의 중심입니다.
  자기중심성은 악의 중심입니다. 이 죄의 중심은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고 하나님과 분리되자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았습니다. 자기가 자기 생명과 삶의 주인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거절하고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왜 죄가 되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각자가 여러분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니까 내 인생 내 맘대로 하겠다고 하고 맘대로 해 보십시오. 너도 나도 다 맘대로 해 보세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이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지옥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예로써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는 원죄를 이어받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행세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겨우내 아무런 변화가 없던 개나리가 조금만 날씨가 풀리면 노오란 개나리꽃을 피우듯이, 우리 인간은 여건만 되면 죄가 행해집니다. 우리 안에 죄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죄의 씨앗을 해결하려면, 삶의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에 성경을 읽는 것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이나 기도를 많이 하는 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바꿔 모셔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꾸지 않은 채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아니며, 그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으며,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선택이며, 예수님을 주인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은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과 명령에 따라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과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인으로 계시지 않는 사람의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나의 주인이었던 나를 없애고, 나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4절에, 십자가의 죽으심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나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근거가 되는 구약성경 민수기 21장에 보면, 출애굽하여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가다가 에돔 땅을 우회하여 지나가는 일로 인하여 백성들이 마음이 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이렇게 어찌 원망하는지,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들에게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니까 물린 자들이 죽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에 다시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하나님과 모세 당신에게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으니 하나님께 기도 좀 해서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모세는 또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으라. 물린 자가 그것을 보기만하면 살리라.” 그래서 모세가 든 장대위에 있는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본 사람은 다 살았고, 믿지 않고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뱀에 물린 독에 의해 다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내 죄를 대신 죽으시고, 내 죄를 다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그 곳에 달리신 분이 예수님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달린 자가 바로 죄인인 ‘나’라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죄에 대하여 내가 죽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시 태어난 우리를 일컬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2절 이하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거듭 거듭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옛 자아도 함께 죽었다, 우리 죄의 뿌리인 첫째 아담이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고 죄가 나를 주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던 옛 자아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죄의 종노릇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내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사십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인인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주인이 바뀐 것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 중심적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교우 여러분, 내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던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십니다. 나의 옛 습관이 함께 죽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면 능력이 생깁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고 주인이신 예수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능력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이 능력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있는 죄의 뿌리가 끊어짐으로 주님 안에 있는 나는 날마다 이렇게 인정하고 선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나는 날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셨고, 구원을 이루어 놓았으니 나를 믿고 받아가라! 끝! 복음은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고, 그 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삶,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내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어 내 의지와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복음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이 나 중심으로만 살았던 우리를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해줍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 23,24절에 말씀하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요한복음 12장 25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는 말씀을 사도 바울이 실천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는 젊은 예수의 미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신도 아닙니다.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죄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믿고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오늘도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놀라운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능력과 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0년 03월 0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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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마태복음 7장 7-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머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 일시  2010년 05월 30일
· 말씀  창세기 12장 1-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님
· 일시  2010년 05월 23일
· 말씀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아버지
· 일시  2010년 05월 16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머니
· 일시  2010년 05월 09일
· 말씀  잠언 1장 8절~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린아이처럼
· 일시  2010년 05월 02일
· 말씀  누가복음 10장 21-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인생의 퍼즐 조각들
· 일시  2010년 04월 25일
· 말씀  시편 139편 13~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일시  2010년 04월 18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31~3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유케 하시는 주님
· 일시  2010년 04월 11일
· 말씀  요한복음 8장 31-3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첫 번째 부활절
· 일시  2010년 04월 04일
· 말씀  요한복음 20장 1-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 사랑의 확증
· 일시  2010년 03월 28일
· 말씀  로마서 5장 6~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 일시  2010년 03월 21일
· 말씀  마가복음 14장 32-4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 일시  2010년 03월 14일
· 말씀  로마서 3장 23~26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의 도
· 일시  2010년 03월 07일
· 말씀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