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마가복음 14장 32-42절) |
축구광이 아니더라도 ‘축구 황제’로 불리는 펠레의 이름은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1958년 불과 열일곱 살의 최연소 선수로 스웨덴 월드컵에서 브라질에 우승컵을 안겨 준 선수입니다. 생애 월드컵을 세 번이나 품에 안았습니다. 어릴 때 집이 너무 가난해 그는 맨발로 축구를 했습니다. 아버지도 왕년의 축구 선수였지만 당시는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며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어느 날 펠레는 친구들과 담배를 피다가 아버지에게 들켰습니다. 야단을 맞을 것을 걱정하는 아들 펠레를 감싸 안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축구에 재능도 많고 일류선수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담배와 술을 마시면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90분 동안 네가 뛰고 싶은 만큼 뛸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선택해라!” 그러면서 펠레 아버지는 낡은 지갑에서 담배 살 돈을 꺼내 주셨습니다. 펠레는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바라봅니다. 너무도 가난해 사랑하는 아들에게 축구화 하나 사주지 못하셨지만 아들의 시합이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절뚝거리며 경기장을 찾아주신 아버지, 병원에서 변기를 닦고 바닥에 걸레질을 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으신 아버지, 그날 이후 펠레는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펠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충고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축구 황제의 명성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와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을 더욱 깊이 풍성히 깨닫고 누리기 위해 오늘도 본문 말씀을 통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인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할 것인지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생애 중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예수님 생애의 절정을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십자가와 부활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의 생애의 주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한 사건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의 사건은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가르쳐주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습니다.
첫째로, 고난의 잔 앞에서 예수님은 번민하셨습니다.
34절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민이 되셨는지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같은 현상은 의학적으로 혈한증(血汗症)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극심하게 고민하면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샘으로 소량의 피가 들어와 땀을 흘릴 때 피가 섞여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께서 핏방울같은 땀을 흘리면서 옮겨달라고 하신 잔이란 어떤 잔일까요? 고난의 잔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잔이란 어떤 잔일까요? 그 잔에는 어떤 고난이 담겨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장차 감당할 육체적, 감정적, 심리적, 영적 고통을 아셨기에 고민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을 했던 가롯 유다의 배반,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베드로의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모습, 나머지 제자들도 다 흩어지고 도망 가버리고 마는 마음의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어떤 자는 예수님께 침을 뱉었고, 어떤 자는 주먹으로 예수님의 머리를 쳤고, 어떤 자는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여러분, 침뱉음을 당해 보셨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거나, 손바닥으로 치는 것을 맞아 본 적이 있습니까? 몹시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속에서 확 올라오는 일입니다. 그리고 39대의 채찍질이 있었습니다.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채찍 끝에 달린 동물의 뼛조각과 납덩어리가 살점을 뜯어내는 고통을 예수님께서 견디셔야 했습니다. 온 몸을 휘감는 채찍이 예수님의 온 몸을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이고, 뼈가 보일 정도로 온통 찢겨지고 부어올랐습니다. 빌라도가 채찍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니까 총독의 군병들이 가시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쥐어주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침을 뱉었습니다. 다시 갈대를 빼앗아 그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동안도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과 견디기 힘든 말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며칠 전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던 입으로 말입니다.
오전 9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피는 솟구쳐 흐르고 숨은 점점 가빠옵니다. 피의 양이 적어지면서 혈압이 떨어져가고, 심장 박동도 힘들어집니다. 몸은 점점 축 늘어지고 그래서 더욱 호흡이 어려웠습니다. 유대 땅의 뜨거운 태양 때문이기도 하고, 쏟아낸 피 때문에 타는 갈증이 몰려왔습니다. 십가가위에 달려 계신 동안에도 끊임없이 대제사장과 무리들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믿겠다고 희롱합니다. 같이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도 “네가 그리스도이면 너와 나를 구원해 봐라!”고 조롱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죽으심 가운데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을 겪는 고통이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셨던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당해야 할 철저한 단절과 버림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와 하나됨이 단절 당하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고난의 잔은 십자가와 죽음입니다. 홀로 온 인류의 죄악의 삯을 짊어지셔야 하는 고난입니다. 또한 고난과 죽음의 잔 일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의 잔입니다. 예수님의 극도의 슬픔은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왜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누구를 대신하여 당하시는 고난입니까?
둘째로, 고난의 잔 앞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확정되어 있고, 자신의 죽음은 예정된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성취될 일이 무엇인지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으로써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도 힘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중압감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께 있어 하나의 생활 방식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습관적을 따라 기도하시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명의 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습니다. 겟세마네라 불리는 곳은 감람산 서쪽 능선에 위치하여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올리브 나무, 즉 감람나무가 많아서 감람산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감람산의 한 부분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겟세마네’라는 뜻은 ‘올리브기름을 짜는 기계’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곳에는 올리브나무 숲과 기름 짜는 기계가 놓여 있었을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올리브기름을 짜는 동산에서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피 섞인 땀을 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자세는 35절에,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셨습니다. 벌써 무거운 고난의 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땅에 고꾸라지듯이 엎드리어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도의 자세는 간절한 소원을 아뢸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하고,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무엇을 하십니까? 누구 때문에 고난이 오게 되었는지를 찾아 그를 비난합니까? 조상 탓으로 돌립니까? 불평하고 원망할 대상을 찾느라 온 마음을 쏟습니까? 고난을 피하기 위해 애씁니까? 어려운 일을 당하면 곧 바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슬프고, 괴롭고, 번민스럽고, 고난의 잔이 너무도 써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던 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신앙이 좋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잘되는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뜻 아닙니까?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어떻게 반응하는 것입니까? 기쁘고 즐겁고 잘 되는 일에는 하나님께 감사 고백으로 기도하고, 슬프고 괴롭고 어려운 일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믿음의 반응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순종하는 것 아닙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정말 있는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은 그 신앙이 껍데기 신앙이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한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면서도 범사에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에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가 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있는 믿음조차도 모래알처럼 부셔져 점점 쓸려내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동안 제자들에게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기도의 임무를 부과하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과 사탄의 활동이 재개되어, 제자들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난달에 성도의 교제를 강조하는 말씀을 몇 주 동안 계속 전했습니다. 모여서 한담만 하는 교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기도를 통해 서로를 강하게 해 주는 성도의 교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서로의 삶의 고난의 문제를 놓고, 기도의 힘을 보태고, 중보 기도를 통해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천사들의 돕는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성도들의 영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부탁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자신도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힘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고난의 잔 앞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실 때마다 특별한 기도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아셨고, 그 잔을 마셔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솔직한 기도였습니다. 정직하게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감정으로 진실하게 표현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거나 반역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고통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다른 길을 찾고 싶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니까,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 사역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시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내용으로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하시도록 하고,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일이 쉽지 않으셨나 봅니다. 너무도 힘드신지 세 번씩이나 기도를 하셔야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3절에, 예수님의 기도에 힘을 더하기 위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든 기도를 하고 계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기도의 목적을 우리들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열망과 의지와 목표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바꾸고, 하나님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열망과 의지를 바꿔나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맞추어 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 내용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신앙 자세입니다. 언제나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원대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감정이 가는대로, 자기 욕심이 솟구치는 대로, 자기 생각이 가는대로 살다보면, 종착역은 불행입니다. 허무입니다. 멸망입니다. 에드몽드 프리상사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대로 되어져야겠나이다.’ 라고 하면 천국이 사막으로 바뀔 것이요,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 사막이 천국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가 잘 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 내가 주장한 의견, 내가 경험한 내용,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 이것을 포기하는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항상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가 잘 안 되어서 부딪히고, 싸우고, 죄를 범하고, 하나됨이 분열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모 교단은 감독회장, 우리 교단으로 말하면 총회장이지요, 작년 감독회장 선거후 계속적인 진통을 겪으면서, 처참한 몰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서로 자신이 감독회장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양측의 대립이 수습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라고 기도하기만 한다면 결론이 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사순절 기간 동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알고는 있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하는 것은 고난의 쓴 잔일 수 있습니다. 마시기 힘든 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나의 원대로’하기만을 주장한다면, 그곳에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사라지고 맙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은 오직 내 원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천박한 신앙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것은 내 원대로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 병든 신앙, 연약한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내 원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복음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내 원대로 마시옵고’라는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의 고백이고, 기도이고, 모습이며, 신앙의 중심입니다. 십자가 신앙의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의 기도 끝에 마침내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자신의 원하는 것은 모두 정리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려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더 선하고 온전하고 거룩한 것임을 믿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인간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 것이 곧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선한 것이고, 온전한 것인지를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5장 8,9절,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못하다고 판단이 되면 누가 순종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길이 내가 가는 길보다 불행한 길이라면 누가 그 길을 가겠습니까?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는 일이 내 원대로 하는 것보다 헛되고 잘못된 것이라면 누가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도록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 전적인 신뢰, 확고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하나님 앞에 당신의 간구를 펼쳐 보이고 ‘나의 뜻대로 마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 내가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운 가장 달콤한 교훈은 주님이 나 대신 나를 위해 선택하도록 내어드리는 것이다.” 무디 목사님은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보다 항상 선하고 온전하심을 확신했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기도하고 난 후, 자신은 그렇게 원하지만 전지 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실 것을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번민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 온 인류의 죄를 씻어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구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고난 후에 있을 영광을 보심으로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결말은 영광의 결정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 말씀처럼,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합니다. 로마서 5장 3절 이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환난이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릴 영광으로 이끄실 것을 믿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고난을 겪게 될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의 목적이 내가 원하는 것에 하나님을 끌어다 맞추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나를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이며, 고난을 이기는 자세입니다. 교우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을 믿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가 우리의 삶의 중심 자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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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3월 2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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