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케 하시는 주님 (요한복음 8장 31-36절) |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목마름] 등 영적인 통찰력과 현대적인 감각으로 좋은 글을 써서 우리나라에도 많은 저서가 소개된 맥스 루케이도는 [내 생애 최고의 축복 3:16]에서 자기 행정 비서가 한 목장에서 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미 소가 페인트 통에 코를 들이밀었다가 통에 얼굴이 끼고 말았답니다. 소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물을 마시거나 먹이를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미 소는 물론 어미 소의 젖을 먹어야 하는 송아지까지 위험에 처했습니다. 심각한 사태였습니다. 그 소를 안타깝게 보고 있던 행정 비서의 가족이 그 소를 돕기 위해 나섰답니다. 그러나 자기를 구해줄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소는 목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뒤쫓아 가 보았지만 소는 점점 더 멀리 도망갔습니다. 무려 그렇게 3일 동안이나 소를 쫓아다녔지만 사람이 가까이 갈 때마다 소는 도망쳤습니다. 결국 트럭과 밧줄을 동원하고 연합작전을 펴서 소를 구석으로 몬 다음 페인트 통을 벗겨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페인트통이 주둥이 앞에 끼어 그것을 빼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는 어미소의 모습이 우스꽝스럽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그 무엇엔가 끼어서, 그 무엇엔가 묶여서, 그 무엇엔가 사로잡히고 짖눌려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빼주려고, 그것에서부터 자유케 해주려고 도우시는 주님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본문 36절,“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어 이사야 61장에 있는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읽으심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고, 이는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들은 우리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헛된 것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이 땅에 얽매여 살지 않게 하시는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잔잔케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어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진리, 능력이 있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 내용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무엇 무엇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자유는 구원을 다르게 표현한 말입니다.
여러분, 자유롭기를 원하시지요? 우리가 자유를 누리려면, 먼저 우리에게 짐이 되고, 우리를 속박하고, 우리를 종처럼 부리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책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케 하셨습니다.
34절에,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지, 죄의 멍에를 메고 가는 죄의 종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죄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행복할 것이고, 죄가 없어진다면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는 일도 없을 것이고, 죄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될 텐데 말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음이 오게 되었고,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얼마나 잘 미워하고 싸우고 욕심 부렸는지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왜 그리도 죄를 짓는 일은 배우지 않고도 잘 하는 지... 죄는 항상 우리를 사로잡고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죄는 우리의 행동을 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는 이기주의, 반항심, 소유욕, 역기능적인 사랑, 그리고 습관적인 행동들로 나타납니다. 죄의 짐은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우리 마음이 불안합니다. 죄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평안이 없습니다. 죄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가 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은 죄는 마치 곰팡이 균이나 좋지 않은 벌레처럼, 그냥 놔두면 반드시 더 많은 곰팡이로, 더 많은 해충벌레로 번식을 합니다. 죄가 죄를 불러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의 짐을 빨리 벗어야 합니다.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거나 쾌락을 찾습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이나 쾌락들은 우리들의 마음속의 죄책감을 잠시 잊게 해줄지는 모르나 근본적인 해결을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지은 죄의 죄책감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짖누릅니다. 양심을 짖누르다가 양심이 돌이키지 않으면 양심은 마비됩니다. 죄책감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우울증의 원인 중에 죄책감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죄책감이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죄를 지으면 그것을 꼬투리삼아 계속적으로 더 많은 죄를 짓게 합니다. “괜찮아! 한 번 더 한다고 뭘 어때?” “기왕 지은 죈데 한 번 더 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 있나?” “이번 한번만 더 하고 다음부턴...” “남들도 다 하는 것인데... 너만...” 그래서 자꾸만 죄를 짓게 하고, 그리고 우리를 고소합니다. 사탄의 이름은 참소하는 자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보았습니다. “새를 어떻게 할래?”스펄젼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펄젼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습니다. 이틀 후 부활주일. 스펄젼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속되었습니다. 구속되었다는 말은 감옥에 붙잡혀 들어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몸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함'이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것은 '지불'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시고 우리를 죄의 종에서부터 빼내셨습니다.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절규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절망합니다. 그러면서 8장 1, 2절에 희망의 복음을 전합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직 죄의 종을 자유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사람들을 죄와 속박에서 자유케 할 힘과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느라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책과 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죄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다 용서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범하는 죄를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께 고백하여 용서받고 정결케 될 뿐만 아니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자신을 압박하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예로써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의 주인으로, 우리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는 원죄를 이어받았습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성입니다. 이 자기중심성이 해결되지 않은 우리 자신을 옛자아라고 부릅니다. 이 옛자아는 자기중심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자기중심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행세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둡고 습하면 곰팡이가 생기듯 우리 인간은 여건만 되면 죄가 행해집니다. 우리 안에 죄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죄는 자아를 위한 마음이고, 구원은 자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중심성이란 자기만 아는 성향입니다. 자기 욕심을 먼저 채우려는 성향, 자기만을 향해 있는 태도, 자기만을 위하는 옛자아를 말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습관이나 욕심에 갖혀있는 자아를 말합니다. 그래서 악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중독현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나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그것을 못 끊습니다. 자기 욕망에 갇혀 다른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합니다. 옛날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에는 이웃 아저씨가 손가락이 잘린 아저씨가 제법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아저씨들이 농사짓다가 낫이나 작두에 손가락이 잘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작두에 손가락이 잘린 아저씨도 있기는 있었지만, 누구네 집 아저씨는 노름하다가 다 날려가지고, 다시는 노름 안하겠다고 손가락을 잘랐다, 어쨌다, 그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름 안하겠다고 다짐을 수없이 하느라 손에 손가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또 노름하더랍니다. 손가락이 없으니까 화투장을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으로 화투를 들고 쪼으고 있더랍니다. 자기중심성에 갇혀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자존심 또한 자기중심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숙한 자존심은 자기를 발전시키지만, 그렇지 못한 자존심은 스스로 쉽게 상처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쉽게 분노하고 쉽게 삐끼고, 쉽게 관계를 깨고, 쉽게 문제를 만듭니다. 결국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자존심을 조금만 죽였더라면...” “자존심만 버리면 잘 될텐데...”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거나, 쉽게 분노하고, 상대에 대한 증오심, 복수심을 품고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자기중심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감정을 풀지 못해 괴롭습니다. 괴로움을 준 사람보다 그를 용서하지 못하여 분노와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고 사는 사람이 더 힘듭니다. 분노와 증오심에 노예가 되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성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우리를 압박합니다. 악한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집착을 버리지 못해 번뇌하게 되고, 고통이 오게 된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 집착을 버리려고 무수히 노력합니다.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합니다. “비워야 하느니라!”고 수없이 이야기합니다. 비워야 평안하고 비워야 행복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비우기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비우고 채우는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옛자아를 죽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비우고, 자기중심성에서부터 자유케 되어 예수님의 새생명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기독교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 내 욕심을 내려놓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이고,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우리는 내가 아닌 주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자기중심성에서부터 자유케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우리는 자기중심성에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를 부인하고, 주님의 생각과 뜻을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자기중심성에서부터 자유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가 없어서 지나가는 빈 트럭을 세워서 올라탔습니다. 타고 보니까 빈 관들이 있었습니다. 트럭 뒤에 타고 가는데 소나기가 오더랍니다. 그 사람은 얼른 빈 관의 뚜껑을 제치고 그 안에 들어가 누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에 다른 두 사람이 올라타고 가는 도중에, 관 속에서 잠들었던 사람이 깨어나 뚜껑을 열고 “비가 그쳤나?”하고 일어났습니다. 이를 본 다른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차에서 뛰어 내리다가 한사람은 죽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죽었습니다.
인도 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 한 사람이 쥐 한 마리를 관찰합니다. 그런데 이 쥐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벌벌 떱니다. 이 쥐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고양이입니다. 그래서 한참동안 쥐를 관찰하던 이 마술사에게 이 쥐가 불쌍해지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술을 부려서 이 쥐를 변하게 해서 고양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변신한 고양이는 또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개를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더 불쌍하게 느낀 마술사는 다시 한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이고양이는 개가 되자마자 또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합니다.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또 한번 마술사는 마술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자마자 호랑이는 또 무서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사냥군의 엽총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마술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언합니다. '내가 아무리 해보았자 이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그래서 다시 쥐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설화는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피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인간의 모습을 빗댄 우화일 것입니다. 근본적인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계속됩니다.
두려움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언제나 인간을 압박하고 괴롭히고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천둥만 쳐도, 번개불이 보이면 그 무엇인가를 두려워하여 제사를 드리고 노여움을 달래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적을 가지고 다닌다든지, 집에 부적을 붙여놓는다든지, 점이나 운명철학관에 가거나, 굿을 하는 행위의 밑바닥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리석은 무속으로, 기복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라고 하는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일곱 가지로 분석하였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성에 대한 두려움, 자기 약점이 드러날까 하는 공포에서 오는, 자기 방어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하는 것에 실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 홀로 있는 두려움입니다. 수많은 다양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이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자신에게는 두려움이 되어 괴롭힙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게 되면 두려움이 우리의 지식이나 분별력이나 판단력을 마비시킵니다. 잘 하던 것도 잘 못하게 만들고, 이상하고 어색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실수하게 하고, 나중에는 낙심하고 포기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인생이 뒤바뀌는 일이 허다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려움과 정면으로 싸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에게 온갖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두려움이 떠나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근심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안할찌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평안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세상 모든 권세에 대한 승리입니다. 우리를 괴롭힐 수 있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21절 이하에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들이 예수님의 발아래 복종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3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자유와 속박의 차이는 그가 아들이냐 아니면 종이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아무리 주인에게 신뢰를 받고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종일지라도 종은 종입니다. 장래에 상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주인인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이 임마누엘의 신앙이 우리를 두려움에서부터 자유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기게 해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옛날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남자아이들에게 담력을 키워 주는 여러 가지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맹수가 우글거리는 숲 속에서 혼자서 밤을 지내게 하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칠흑 같은 숲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소년의 두려움과 외로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소년은, 아버지가 밤새도록 나무 뒤에서 화살을 뽑아 들고 자신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들이 밤새도록 두려워한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보호의 손이 언제나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사는 사람과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자유케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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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1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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