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잠언 1장 8절~9절) |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랑 함께 했던 예쁜 추억들도 참 많은데 왜 아팠던 모습, 고통스러워했던 모습만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1년 3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옆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해. 엄마 나 보이지? 집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내다가 얼마 전에 취직했어. 취직하고 나 처음으로 많이 울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이라며 맛있게 먹는데 난 그냥 그렇더라. 많이 보구 싶다. 엄마. 나한텐 꼭 살아줄 거라고 그랬으면서 너무 빨리 가서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해. 엄마가 그랬지? 오빠랑 아빠 미워하지 말라고. 그래서 묻어두려고 해. 나쁜 기억 모두. 그러니까 걱정 하지마. 엄마 딸 착하고 씩씩한 거 알지? 막내딸. 눈 감는 날까지 눈 안에 담으려 했던 막내딸. 진짜 잘 살게. 지켜봐 줘. 엄마 뜻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할 게. 죽는 그 날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엄말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 그리고 사랑해. 그 누구보다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막내딸 올림. [가정과 아버지]라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제 부모님들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렸습니까?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보다,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어버이날에 찾아 볼 부모님, 꽃을 달아드릴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이 더 슬픕니다. 우리 양정교회 교우들은 부모님들께 효도를 잘 하고 계시지요? 불효막심한 자녀들은 한 사람도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지금 속으로 “우리 자식들은 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데... 밝힐 수는 없고...”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말씀은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자녀들이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법을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자녀들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지혜로운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함께 인생의 기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과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같은 뜻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이 땅에서 장수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뜻에서 본문 9절은 순종한 자녀들이 얻게 되는 결과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은 영화로운 관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목의 금사슬은 명예, 권세, 위엄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이 얻게 될 영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모 중 어머니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남성들은 왜 어버이주일인데 아버지는 빠져있느냐고 의문을 가지실지 모릅니다. 다음 주에 아버지에 관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서운하게 생각하여 오늘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정에서 어머니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야말로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머니”라는 단어 앞에서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입에서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가이며 정치가이고 평론가인 토마스 매콜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얘들아, 어머니의 자애로운 눈과 부드럽고 온화한 손, 그리고 친절한 목소리가 아직 존재하는 동안에 이것을 존중하라. 사랑하는 어머니는 최대의 선물이므로 특별히 귀하게 여기라. 일생 동안 다정한 친구는 새롭게 많이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결코 다시 얻을 수 없단다.”
“어머니란, / 어머니란 욕심이 없는 분입니다. /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 내 자식이 큰 부자가 되는 것보다 /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주기만을 / 진심으로 바라고 기원합니다. / 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 내 자식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 넘칠 만큼 행복해집니다. / 어머니란 실로 욕심 없는 분입니다. / 그러므로 어머니를 울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일입니다.”
홀로 아들을 키운 엄마와 인생 가운데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아버지. 이 세 사람의 독특한 가족이야기를 쓴 릴리 프랭키가 쓴 [도쿄타워] 자전적 성장 소설에 나오는 글입니다.
동양의 어머니든 서양의 어머니든 모두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그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단순히 어머니라는 뜻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으로 뭉클하게 파고드는 어머니의 사랑, 가슴 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함께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제일 처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음으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돈으로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어머니 품은 이 세상의 가장 고귀한 학교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거짓없는 사랑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머니가 아이를 가지면 자기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공급한다고 하지요? 뱃속 아이가 뼈가 형성되려고 하는데 칼슘이 부족하면 어머니의 잇속에 있는 칼슘까지 아이에게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또한 여성이 아이를 가지면 호르몬 분비가 달라진답니다. 그래서 여성들에게서는 남자들이 가지기 힘든 모성애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철이 덜 든 나이 어린 소녀가 아이를 가져도 호르몬 분비가 달라지면서 모성애가 생겨서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조혼제도가 있을 때에도 나이 어린 소녀가 시집가서 아이 낳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자녀들을 다 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어머니에게 주신 내리사랑입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사랑이 공급되도록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들에게 주셨습니다.
시인 김지향 씨의 “어머니의 기도”라는 시에 이런 시귀가 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싫증이 안 나는 이름. / 아무리 불러도 닳지 않는 이름. / 아무리 불러도 응답을 안 하는 이름. / 부르면 부를수록 그리움이 쏟아지는 이름. /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이 아리는 이름. / 부르면 부를수록 목이 메는 이름. / 오늘도 어머니를 부르며 / 나도 어머니처럼 목이 멘 기도의 그 길을 가고 또 간다.”
저의 어머니를 기억하면 몇 가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어휘력이 풍부하셨습니다. 저희 자녀들을 나무라실 때에는 속담, 격언, 직유법 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눈 먼 장닭 꺼들거리듯 꺼들거리지 마라.” “소금이 쉴 소리 하지 마라.” “소나기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지 마라.” “메기나라에 가서 비늘을 구하지.”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 “큰 소리로 헛웃음 치는 사람은 믿지 마라.” 그리고 커서 성경을 읽으면서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들 중에 성경 말씀이 많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이 기억이 납니다. 등이 가려워 어머니에게 긁어달라고 하면 긁어주시던 그 손. 저희 6남매를 키우시느라 온갖 고생을 하시어 갈라질 대로 갈라진 손으로 등을 긁어주시면서 ‘엄마 손은 가려운데 긁어주는 대는 안성마춤’이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손, 아무리 구루무를 발라도 갈라진 손이 부드러워질 새가 없었던 어머니의 그 손이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이 어느 모임 자리에 가셨는데 허름한 작업복차림으로 가셨더니 들여보내주려고 하지 않자, 손을 보여주면서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이라고 하니까 들여보내주었다는 일화를 말씀하시면서 어머니는 자신의 갈라진 손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손 하나만으로도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 마음속에 새겨주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지만 방학 때가 되면 오전 시간에 어김없이 골방에 들어가셔서 1시간 반 내지 2시간 정도 기도하시는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기도에는 우리 친척까지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셨고, 우리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 은혜를 베푼 분들의 이름, 그리고 기도부탁을 한 교회 교우들의 기도제목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떠나 있을 때에도 오전 시간에는 ‘지금쯤 어머니께서 기도하실 시간이구나...’라고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학교 시험 보는 날이면 어김없이 금식기도를 하셨고,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시험 때가 되면 3일 단식은 기본이셨습니다.
저희 어머님 묘비에 새긴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알처럼 사셨습니다. 여러분, 저희 어머니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어머니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게 살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언제나 간직하고 그 사랑에 보답하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고, 나중에 셋을 낳은 후 800년 동안 자녀들을 낳았고 93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하와도 오래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느냐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환경학자들은 오염되지 않은 환경 탓이라고 했고, 인류학자들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 오래 살 수 밖에 없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해석은 조금 달랐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본래 역사적 인물들은 수명이 긴 법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한 대답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러다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답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하와가 그처럼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이 해석에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비록 우스갯소리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고부갈등과 세대 갈등의 현주소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고부갈등은 요단강을 건너가야만 해결된다는 말도 나온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시집살이 때문에 시자 들어가는 시금치도 안 먹고, 시청에도 안 가고, 어떤 사람은 대형마트의 시식코너 근처에도 안 간다고 합니다.
어느 인질범이 할머니를 납치해서 인질로 잡아놓고,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너의 시어머니를 내가 데리고 있다. 천만 원을 가져오면 풀어 주겠다.” 며느리가 하는 말, “어림없는 소리, 니 맘대로 해라! 절대로 인질협상에 응할 수 없다.” 인질범이 신경질을 내면서, “좋다. 그럼 너의 시어머니를 도로 데려다 놓겠다.” 당황한 며느리가 황급한 목소리로, “잠깐만요. 잠깐만요. 계좌번호가 어떻게 되죠? 바로 입금해 드릴께요.” 시부모도 부모인데 왜 그리 공경이 잘 안 될까요? 하기야 자기 친 부모도 모른 척하는 세상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이 땅의 어머니들은 자기 시어머니에게도 잘 해야 합니다. 같은 어머니끼리 잘 지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기독교 신앙인인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잘 해야 합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의 부인에게 잘 해야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잘 하는 데도 시어머니에게 잘못하는 며느리는 나중에 자기 아들의 부인에게 똑 같이 당할 것이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같은 여자로 태어나 서로 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며느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에게 잘 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시어머니도 어머니요, 며느리 자신도 자기 자식의 어머니요, 같은 어머니끼리 잘 살아봅시다. 룻기에 나오는 모압 여인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을 보면 참 좋은 고부간이었습니다. 며느리를 딸로 부르며 친 어머니처럼 지냅니다.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잘 봉양하고 시어머니의 신앙을 잘 배우고, 시어머니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23장 3절,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모압 사람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압 여자 룻은 시어머니에게 효를 잘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결국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님의 족보에 영광스럽게 오르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시어머니 여러분, 며느리 여러분, 서로 이해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믿는 시어머니가 더 그래! 믿는 며느리가 더 그래! 라는 소리가 나질 않기를 바랍니다.
이어령 교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에 “낙타의 눈물”이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낙타가 눈물을 흘리느냐 흘리지 않느냐는 얘기로 시작합니다. 낙타는 아주 큰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슬피 운다고 합니다. 몽골의 여자 감독이 찍은 다큐멘터리에 낙타이야기가 나왔답니다. 낙타들 중에는 자기 새끼를 낳아놓고서도 간혹 돌보지 않는 모성애 없는 이기적인 낙타들이 있다고 합니다. 새끼가 굶주려 죽게 되었는데도 젖은 물론이고 가까이 오면 발로 차 얼씬도 못하게 하는 낙타가 있답니다. 그러면 결국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낙타는 불쌍하게도 죽고 만답니다. 가열한 불모의 땅, 사막의 환경에서 살다보면 그렇게 비정한 낙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몽골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런 매정한 어미를 다스리는 독특한 비방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주 놀랍게도 그 어미 낙타에게 마두금이라는 현악기 연주 음악을 들려주는데, 특별히 잘 연주하는 악사를 먼데까지 가서 초대해 온답니다. 그리고는 낙타를 앞에 놓고 마을 사람이 모여 연주회를 엽니다. 마두금 연주에 맞춰 그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할머니가, 즉 자식 손자를 많이 키워 본 여인이 노래를 부릅니다. 자장가와 같이 다정다감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구슬픈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마두금 연주와 할머니의 구슬픈 가락을 듣고 낙타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립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낙타는 모성애를 되찾아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정을 들여 키운다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에 진정한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자녀들을 공부하라고 달달 볶는 개인교사나 공부 스케줄 관리해주는 공부 매니저 같은 어머니가 아니라 깊은 모성이 담긴 노래를 불러 메마른 낙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사랑의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가슴이 메마르고 강팍해져가는 세태에 잃어버린 감정과 사랑을 회복시킬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무디어진 가슴을 일깨울 사랑의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어머니들이 자기 자녀들을 공부만 잘 하게 하면 어머니의 역할을 잘 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자녀가 공부만 잘 하면 자녀의 신앙이 헛 껍데기뿐인데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보여주는 신앙의 모습이 곧 그 어머니, 그 부모의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가 잘못 되어 있는 가정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머니 여러분, 부모 여러분, 세상의 가치관대로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자녀교육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교회 청년부가 4부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청년부에 대학생들 중에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기간 앞의 주일에는 출석이 확 떨어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의 젊은이들이 고 3때까지 공부 때문에 주일 빠져도 되고, 시험 앞에는 하나님도 뒤로 제쳐두는 것이 몸에 배어서 그렇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시간, 길어야 오고 가고 합쳐서 2시간인데 그게 아까워서... 중등부, 고등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스라엘의 교육 관례상 실제적인 생활 지침 즉 훈계는 아버지의 몫이었으며, 일반적 교훈이나 율법 등의 가르침은 어머니에게 속하였습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에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해야 하는 역할이지만, 특별히 어머니가 해야 할 자녀 양육의 책임과 역할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양육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양육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언제나 기억하며 살도록 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뉴멕시코 주에 열두 살 된 흑인 소년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쁜 숨을 내쉬며 어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나도 너를 돌볼 수가 없단다. 이제 내가 죽으면 너를 할머니 손에 맡겨서 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꼭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이 세상에 다른 것은 다 잊어 버려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가져라.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속에서 잊어버리지 마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주님을 통해서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라.” 그리고 그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소년은 자라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흑인으로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소아마비 장애까지 있어 인종차별과 가난과 병마로 인해 괴로운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늘 어머니의 유언을 생각했습니다. 부모님 대신 예수님을 늘 생각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모든 장애를 극복한 결과 1950년 그는 흑인으로써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정치학자 랠프 번치 박사입니다. 어머니가 남겨준 신앙의 유산으로 절망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였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아버지요, 어머니였습니다.
요셉도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였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어머니 라헬이 죽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 아버지와도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잘 컸습니다. 인생의 많은 역경과 고난을 잘 이겨냈습니다. 형들로 인해, 애굽 생활로 인해 마음에 수많은 상처가 있을 법도 한데 정신도 건강하게 잘 컸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혼자서 자녀를 키우시는 분들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혼자 키우려고 하지 말고,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키워주시도록,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아버지의 사랑을 넘치게 받고 느낄 수 있도록 신앙 안에서 바르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잠 19:26)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 여러분,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말고 살아계실 때에 효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들이여, 어머니의 역할과 책임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양육하는 어머니, 자녀들에게 바른 인생의 법을 가르치는 어머니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들, 딸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는 것이요, 영광을 얻는 일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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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09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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