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님 (사도행전 2장 1-4절) |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사용하는 용어가 틀렸다든지, 고유명사가 정확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반드시 메모를 써서 지적해주는 권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일예배에도 그 교회 목사님은 이번에는 틀리지 말아야지 하며 안간힘을 쓰며 설교를 끝냈습니다. 이윽고 축도시간. 축도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데 그 권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축도의 첫마디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이제는 ..... " 으로 해 왔는데 잘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할 수 없어 생각이 나는 대로 "요즈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라고 축도를 끝냈습니다. 다음 주 목사님이 설교하려고 강단에 올라보니 "목사님 ,지난주에는 축도 하실 때에 ‘요즈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로 하셨어요. 오늘은 틀리지 마세요." 라는 메모지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권사님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목사님은 이럴 줄 알았으면 "축도문을 적어가지고 올라오는 건데...." 라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시간은 없고 누구에게 적어 가지고 오라고할 수도 없고.... 용케 그날 설교를 잘 마쳤는데 막상 축도를 하려고 하니 또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급하면 뭐도 잘 안 나온다는 옛말이 있듯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고는 두 손을 올렸는데 첫마디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한 참을 뜸을 들이다가 이윽고 "때때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였답니다. 사람은 참으로 실수투성이입니다. 잘 하려고 하면 더 잘 안 됩니다. 온전하지도 못하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인정하시지요?
수다 떨기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수다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전화를 받으면 몇 시간씩 수화기를 놓지 않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녀가 전화를 받은 후 30분 만에 전화를 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놀란 남편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어쩐 일이야? 30분 만에 전화를 다 끊구.”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어요.” 잘못 전화를 건 사람하고도 30분 동안 말할 정도면, 남편은 그 아내의 마음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 여인이 수다쟁이기 때문에 말이 많은 것일까요? 그 여인의 마음이 외롭기 때문에 그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말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은 안 됩니까?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말하고 보이는 데로 평가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지혜롭지 못한지,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외로운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완벽하고, 온전하고, 능력이 넘치고, 지혜롭다면, 자기 혼자의 힘으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롭게 잘 살 것이고, 문제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넘치므로 잘 해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문제,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인생에 풀리지 않는 문제까지도 잘 해결하면서 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됩니까? 우리는 슈퍼맨도 아니고, 슈퍼맨이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신 성령님의 도움을 우리는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과 그 후 하늘로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미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입니다. 모든 만민에게, 주의 남종과 여종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이 예언된 약속이 마침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성을 떠나지 않고 약속을 기다리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유대의 절기로 말하면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처음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났을 때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성령님이 임하신 현상을 1, 2절에,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한 말씀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령의 임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 가야 할 길을 따라 갑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어떤 현상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바람처럼 우리들에게 오셨습니다.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그 성령님을 모셔야 합니다.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르며 나는 독수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바다 갈매기들이 작은 섬에 모여 있으면서 바다 위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독수리나 바다갈매기나 다른 새들도 하늘을 날 때 보면 계속 날개 짓을 하지 않습니다. 바람을 탑니다. 그들은 날개를 쫙 펴고 바람을 탑니다. 자기 몸을 바람에 맡긴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은 표현일 것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힘을 이용해 자기 몸을 맡깁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납니다.
운동을 배울 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힘을 빼라고 합니다. 특별히 수영은 힘을 쓰면 쓸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물속에서 몸이 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라앉습니다. 물에 자기 몸을 맡기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손과 발을 움직이면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빼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힘을 뺀다는 것은 무엇을 빼라는 뜻입니까? 자기 욕심,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 능력, 자존심, 자기 소유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믿고 성령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신앙의 중심 원리입니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님께 맡길 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실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실까요?
첫째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 17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믿어지게 하시고, 주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믿고 고백하는 순간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그렇게 하도록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내주 곧 안에 거하신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첫 번째 증거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새로운 열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궁금해지고 영적 갈증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지 않거나 성령님이 소멸되고 있거나 성령님이 근심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영을 살리고, 깨우치고, 반응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게 되고, 믿어지게 되고, 영적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기독교 진리가 깨달아지고 이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면, 여러분 안에 성령님께서 계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세상의 현상을 넘어설 수 있는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낙심, 절망 등 부정적인 마음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실 때입니다. 지난번 천안함 침몰사건 직후 침몰 선내에 있는 장병들이 살아있을 것을 기대하고 해군특수부대원들이 잠수하여 수색작업을 했습니다. 그런 중에 한 준호 준위가 순직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살아있을 동료를 생각하니 무리하게 잠수를 한 것입니다. 무리하게 잠수했다는 말은, 바다 밑으로 잠수하면 깊으면 깊을수록 물의 압력 때문에 오랜 시간 잠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산소통 용량이 큰 것을 매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람은 수압 때문에 물속에서 오랫동안 견디지 못하고, 몸에 무리가 오고 목숨을 잃는 상황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은 바닷속 물고기들은 어떻게 견딜까요? 깊은 바다 속 심해물고기가 바다 밑에서 사람이 견디기 힘든 수압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은 자기 몸 안에 수압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물고기들에 부레 및 기타 기관에 기체가 들어 있는 기관을 심해물고기들은 모두 체액 즉 액체로 채운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해물고기들이 고압을 견디는 이유입니다. 만약 심해물고기 기관 중에 기체가 있는 기관이 있고, 그 기체를 이용해서 압력을 견딘다면 심해해서 몇m아래에서도 생활을 못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심해물고기들은 몸속 기관들이 체액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압력변화에도 잘 견디고 심해의 높은 수압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압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스트레스의 강도가 큰 것을 고통, 고난, 시련,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를 문제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가 우리의 생각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할 때 생기는 것이 근심, 염려, 불안, 두려움입니다.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슬픔이라고 하지요.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에게 감정으로 폭발하는 것이 분노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수많은 종류의 압력, 스트레스, 고난과 시련과 환난을 이길 수 있으려면 우리 안의 압력을 높이면 됩니다. 우리 안의 압력을 높이려면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거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심해물고기가 높은 수압을 견딜 수 있는 것이 몸 안에 액체로 채워져 있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삶의 압력, 스트레스를 견디어 낼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쉽게 화를 내거나 쉽게 낙심하거나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짖누르는 외부의 스트레스, 압력을 이겨낼 힘이 내 안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는 아주 작은 것에도 쉽게 넘어지고, 아주 약한 스트레스에도 흔들리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분노합니다. 쉽게 평안이 깨집니다. 쉽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실 수 있도록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하며, 죄를 지은 뒤 곧 바로 회개하여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도록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을 성령님께서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성령님의 또 다른 임재는 우리와 함께 하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 우리가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믿음을 도우십니다. 우리를 도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은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길 원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동행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는 전파가 가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사이클만 맞추면 텔레비전 화면도 나오고, 라디오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 땅에 성령님이 가득하고 충만히 거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말씀을 듣는 시간에 성령님하고 연결이 되어 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는 시간에 연결이 되어 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원리를 잘 배웠다가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데 눈물이 펑 터지면서 성령님하고 연결되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무릎 꿇어 기도하는 시간에 성령님하고 연결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님하고 사이클만 맞추어지면 오늘 바로 이 시간에도 성령님하고 연결되어지고 성령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비게이션으로 설명을 하면, 내비게이션 안에 있는 자료가 없으면 아무리 그곳을 가고 싶어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전파가 많아도 냉장고로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파를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해도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라고 누가복음 3장 22절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49절에도,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에 임하시는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거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임재보다 우리 위에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가 가장 강력한 임재입니다. 임재의 최고의 단계입니다. 우리 위에 임하시는 성령님은 초자연적 힘과 권세를 주시는 임재입니다. 오늘 본문 성령강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3, 4절,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님께서 각 사람위에 임하셔서 그들에게 성령 충만함과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은사와 강력한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각 사람 위에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성령충만, 또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능력, 은사, 치유와 복음을 전하는 권능을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며 지속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한 번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고 그것이 자기의 무슨 자랑이나, 자기 상급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 과정에 있어야 하는 과정이고, 그리고 계속되어야 할 성령충만입니다. 지속적인 변화와 성숙을 이루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지속적인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성령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좋아지려면, 계속 만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듯,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더욱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하게 하려면 한 번 만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곧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 충만하려면 반드시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함 없이 성령충만이란 없습니다. 성령님을 갈망하는 마음없이 성령충만은 없습니다. 토저 목사는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이 있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신다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하도록 우리 함께 갈망합시다. 함께 간구합시다.
그리고 성령충만하려면 성령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계속 충만히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일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어떤 능력도 부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어떤 권능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들이 여러분이 지시한 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잘 한다고 칭찬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들과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습니까? 당연히 그들과 계속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여러분과 손발이 척척 맞아 일을 할 정도가 되려면 여러분의 뜻과 생각과 지시와 계획들을 잘 알아서 순종하고 따를 때입니다. 사람의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 순종 없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기만을 바란다든지, 성령 하나님께 순종 없이 하나님의 은사를 받으려고 한다든지, 성령 하나님께 순종 없이 지속적인 교제와 지속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자기 욕심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실천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입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충만은 여러분 각자가 지속적으로 삶속에서 구하고 유지해야 할 신앙생활입니다. 아무리 어떤 은혜 집회에서 넘치는 은혜, 신비한 경험,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자기 욕심대로 산다면 이윽고 성령님은 떠나시고 성령충만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할 때 성령님은 더욱 크게 역사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왜 나는 믿음이 쉽게 흔들릴까? 나는 왜 마음의 평안이 쉽게 깨질까? 왜 신앙의 기쁨이 없을까? 신앙의 능력을 체험을 못할까? 신앙의 담대함이 없을까? 늘 왜 그 자리를 맴돌까? 아니 뒷걸음질하는 것 같을까?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며 살 수는 없을까?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없을까? 이런 생각,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까? 그런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려고 오셨습니다. 항상 성령충만을 구하십시오.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이 여러분 위에 임하시고, 성령의 권능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능력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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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23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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