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할 때 (역대하 20장 1-13절) |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 전체가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 한 채 살아갑니다. 미신을 믿고 점치는 사람들은 늘 두려워합니다. 이사도 아무 때나 못 가고, 손톱도 밤에는 못 깎고, 문턱에도 마음대로 못 올라섭니다. 선원 가족들은 생선 반찬을 뒤집어서 먹지도 못합니다. 자식이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는 점쟁이 말을 믿고 수백만 원짜리 굿판을 벌리라는 사기를 당하면서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꾸역꾸역 굿판을 벌립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당신은 암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까 두려워 병원에 못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직하여 무능력자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정신질환이 되면 이렇게 됩니다. 공포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이성이 분리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마조리 고프라라는 여성은 1949년에 자기 아파트 문을 걸어 잠근 뒤 이후 30년간 딱 세 번만 밖을 나왔습니다. 한번은 수술 때문에, 한번은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서, 한번은 죽어가는 친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조리 고프라의 병은 광장공포증입니다. 즉 트인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녀는 탁 트인 공간을 만나면 끔찍한 두려움이 엄습하여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탁 트인 공간을 만나면 속이 확 트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려움에 의한 공포증은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한 젊은 트럭 운전사는 업무상 날마다 체서피크만 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체서피크만 다리는 미국 메릴랜드 주와 버지니아주를 연결하는 24Km의 긴 다리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 트럭 운전사는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뭔가에 이끌려 트럭을 세우고 밖으로 나가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점점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자신이 뛰어내려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되어 자신을 덮쳤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에게 부탁해서 수갑으로 자기 손을 트럭 핸들에 채워달라고 하여 체서피크만 다리 위에 차를 멈추더라도 차 밖으로 자신이 나가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두려움의 위력은 이렇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장악하면 두려움의 노예가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를 일상생활을 못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길모퉁이의 괴물이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은,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길모퉁이에서 튀어나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괴물처럼, 갑자기 우리를 압도하여 괴롭힙니다. 꼼짝 없이 맞닥트린 두려움이라는 괴물에게 먹히든지, 아니면 괴물을 해치우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경우 그 두려움의 괴물 앞에서 뒤로 도망을 치면서 계속 쫓겨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대개 우리가 불안할 때 찾아옵니다. 불안의 골목길을 걸을 때, 근심 걱정 염려의 골목길을 걸으면 백이면 백 두려움의 괴물을 만납니다.
두려움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현실은 두려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의 인생에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을 만났고, 두려움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요셉은 홀로 이방 나라에 버려지듯 떨어져 있으면서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몹시 두렵고 떨렸습니다.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두려워 떠는 골리앗과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년인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갔다가 골리앗이 호통치며 이스라엘 병사들을 모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병사들의 두려움을 사정없이 자극했고, 그들은 두려움에 지배당해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 두려움의 웅덩이에서 빠져 나오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도 두려움과 맞서야 했습니다.
본문은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들이 극심한 곤경에 처한 사건의 내용입니다.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여호사밧을 치기 위하여 몰려왔습니다. 2절에, ‘큰 무리’가 여호사밧을 치러왔다는 말씀과 3절에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을 통해서 상당히 긴박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은 부정적인 감정인데, 두려움도 사실 믿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부정적인 것에 생각을 집중하여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을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때 두려움에 쉽게 빠집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하는 장애물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믿음을 잃게 만듭니다. 우리 마음에 분열이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지만, 두려움은 하나님과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해결해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을 넘어서야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 마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면서 겪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있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고 풍랑이 일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광풍이 불고 풍랑이 이는 곳입니다.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은 그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나 보다 하고 두려움에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다급하게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잔잔하라고 명령하셨고, 바람도 잔잔해지고 바다도 잔잔해졌습니다. 그러신 후에, 제자들에게 꾸짖듯이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제자들이 두려움을 떨쳐내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이 아닌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을 만난 우리들이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에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을 만났을 때, 그 두려움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훈련하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겪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을 만나게 하실 때가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에 굴복할 것인가,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두려움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을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기회로 삼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것인가, 두려움에 짖눌려 살 것인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계기로 삼아 두려움을 이기는 신앙의 능력을 경험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공격하려는 적들을 대적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는 두려움 앞에서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두려움에만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도우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실제로 큰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대하 17:13-19) 자기 군대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올바른 신앙 자세를 취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 왕에게 믿음의 기도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의 부친 아사 왕은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과 병거 300승을 이끌고 치러 왔을 때, 아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나라와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위기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너무도 미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결의 통로를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는 얼굴을 여호와께 향하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여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도록 했습니다.
5-12절은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여호사밧은 기도 속에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만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손에 모든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환난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사밧은 솔로몬 왕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하나님께 올린 기도, 즉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임했을 때 주의 전에서 부르짖으면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는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환난 중에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의 권세와 능력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그가 “하나님만 바라봅니다.”라고 고백한 기도 속에는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이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바라봄의 법칙이고, 두 번째는 집중의 법칙입니다.
믿음이란 바라보는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나만 바라보고, 내 능력만 바라보고, 세상의 힘만을 바라보고, 세상의 방법만 바라보고, 아무짝에도 못 쓰는 우상만 바라보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바라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는 아주 중요합니다. 바라보는 대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해도 틀림없습니다. 인생에서 더러운 것만 바라보는 사람은 더러운 것에 감염되어 더러운 생각과 더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문제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끊임없는 문제 속으로 끌려들어가 문제투성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부정적인 것만 바라보는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하고 부정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선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의 인생이 선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바뀌어져 갑니다. 바라보는 대로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바라보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바라보는 대로 꿈을 꿀 것이고, 바라보는 대로 닮아갈 것이고, 바라보는 대로 이루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면 두려움은 줄어들고 믿음은 강해집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끊임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골리앗을 맞은 다윗은 두려움 속에 있는 형들과 이스라엘 병사들의 소심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에게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만 집중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시는 손길을 믿고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불안과 답답함과 두려움의 감옥에 꽁꽁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평안과 확신에 찼습니다. 로마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바라봄의 법칙을 실천할 때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난관을 헤쳐 나갈 아무런 능력이 없을 때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도 큰 군대가 쳐들어와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 무엇을 하십니까? 곤경에 처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겠고 두려움이 엄습할 때 무엇을 하십니까? 그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십니까? 그것이 신앙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신앙생활이 아직 바르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도 거둘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연약한 존재이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나 방법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일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존재에게 뭘 구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여호사밧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며 그것이 자신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 힘듭니다. 두렵습니다.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믿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지속적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언어이며, 구조 요청 신호입니다.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깨닫는 것은 모든 일이,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가벼운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함께 하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이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께 상의를 드려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 하십니까?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는 생각을,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나씩 하나씩 바꾸어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있긴 있어도 나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신이라는 생각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전에는 자신의 삶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자신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거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 자신의 지혜, 자신의 능력,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도움을 빌어서 해결해 보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던 사람이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생각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문제에 집중합니다. 두려움을 주는 그 무엇에 대해 집착합니다. 그러니 그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이것이 집중의 법칙입니다 집중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해 줍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하게 해 줍니다. 여러분, 성경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전하도록 주신 말씀이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두려움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을 괴롭히는 두려움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에워싸고 여러분을 꼼짝 못하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까? 암이나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이 여러분을 두려움 속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까? 직장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실패할까봐 두렵습니까?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지 두렵습니까? 지난 금요일이 6.25 전쟁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요즘 북한이 하는 짓을 보니까 전쟁이 날까봐 두렵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크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할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어도 여러분을 도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는 여러분을 사망의 두려움에서부터 건져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믿음이란 어떤 위기 상황이나 한계 상황이 닥쳤을 때 그것을 단순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으신 언약,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능력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다, 믿음이 강하다, 믿음이 크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집중력이 좋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약하다, 믿음이 작다는 말은 하나님께 집중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고, 집중력이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루마니아가 공산주의 치하에 있을 때, 박해를 받던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며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의 말씀이 몇 번이나 있는지 세어보았답니다. 그가 세어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의 말씀이 꼭 365번 기록되어 있더랍니다. 일 년 365일,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느라 365번 말씀하셨으니 하루에 한 번씩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라는 뜻이 아닐까요?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처럼 매일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외우면 집중력이 더해집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편 1,2절 말씀입니다. 또 시편 118편 6절 말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집중하여 여러분을 괴롭히는 문제와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삶 속에서 자신이 너무도 미약하고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면초가의 상황은 우리를 점점 미궁으로 빠뜨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매일 인생의 전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사탄은 날마다 이 인생의 전장에 두려움을 깔아놓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타를 먹이려고 합니다. 우리를 두려움의 손길 아래로 들어가게 하여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두려움에게 짖 눌려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호사밧처럼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나는 두렵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기 때문에 안전하다. 평안하다. 두렵지 않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온갖 모든 두려움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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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2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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