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사울 왕 (사무엘상 18장 6-16절) |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울왕과 함께 이스라엘 군대가 개선행진을 할 때, 그들을 맞는 여인들이 승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이 노래를 들은 사울왕은 오늘 본문 8절에 보니까, 사람들의 말에 사울이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그 후에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다고 했고, 10절에 사울이 자기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었고, 11절에 다윗에 대하여 창을 던졌으며, 12절, 15절에 다윗을 두려워하였다고 했고, 13절에 보니까 다윗을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한 감정이 들쑥날쑥했습니다. 사울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백성들이 사울은 물러가고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까 봐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울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스스로 다윗에 대해 비교와 경쟁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라는 노래는 사울이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하고 화를 낼 성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시에서 ‘천’이나 ‘만’은 아주 많은 수를 비교의 개념없이 단순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91편 7절에 보면,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이런 표현은 많은 수가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엎드러졌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이행시(二行時)는 사울과 다윗의 두 영웅이 수많은 자들을 죽였다는 의미의 뜻으로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왕이 그렇게 민감하게 듣지 않아도 되는 노래였다 그 말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는 왕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소년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자기 밑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둘 수 있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저 친구가 내 경쟁상대다, 나보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지...’ 이러면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항상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교만에 빠지든지, 열등감에 빠지든지 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입니다. 그는 왕으로 세움을 받을 만한 알맞은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이 보다 더 준수한 청년이 없을 만큼 인물이 출중했습니다.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착한 성품의 소유자요, 잃은 암나귀를 찾기 위해 온 이스라엘 땅을 두루 다닐 만큼 성실했습니다. 주의 종을 대접하는 예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안 좋고, 부모 훌륭하고 인물 잘 났고, 키도 크고, 성실했고, 효도 잘하고...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였습니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등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과의 관계에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비교하고, 끊임없이 경쟁하고, 끊임없이 질투하고, 끊임없이 분노하고, 때로는 다윗을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계속 추격하고 죽이려고 노력하다가 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미친 사람으로 끝난 사울 왕!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비참함으로 종치고 막 내린 왕! 성경 중의 인물 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사울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다름 아닌 열등감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울 왕의 내면세계에는 열등의식이 깊게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맥스웰 멀츠 박사는 이 세상 사람들 중 95%이상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떠어떠한 상황에서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이 우리의 내면에 뿌리를 내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열등감이 우리의 사고구조에 자리를 잡아 우리로 하여금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심한 40대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졸이었습니다. 고졸이 뭐 어때서 열등감에 빠졌는지,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학력을 알면 무시할 것 같았습니다. 부인은 재산이 많아서 비싼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책도 많이 읽어서 어휘구사도 아주 지적이었습니다. 남편과 자식들도 자랑할 만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벌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 직장 동료들의 부부 모임에 갔는데 우연히 부인들이 대학 재학 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인은 자기 학력이 탄로 날까 봐 속으로 전전긍긍했습니다. 남편이 역시 고졸인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에도 부부 모임이 있었는데 남편이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참석했다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고, 남편이 고졸인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게 창피해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의 부부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몹시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 모임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풀리지 않았고 우울함과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이후 일주일 동안 잠도 못 자고 부대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은 불과 한 시간 만에 세 번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시장에 가려고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관리소장이 어떤 젊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새로 이사 온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예쁘고 지적이고 아주 세련되어서 물어 볼 것도 없이 대졸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위축되었습니다. 대졸 앞에 선 고졸이었습니다. 마치 여왕 앞에 선 시녀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관리소장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소장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자존심이 팍 상하면서 ‘내가 고졸이라서 인사도 안 받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우를 받고 사는 자신이 싫었습니다. 소장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지가 뭐라고 나를 무시하는 거야?’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관리소장이 이 부인의 학벌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자기 혼자 하는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현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적 현실이고 또 하나는 심리적 현실입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주관적 현실이 심리적 현실입니다. 이 부인에게는 관리소장에게 자신의 학력 때문에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심리적 현실입니다. 아무런 현실적인 근거도 없이 자기 마음에서 만들어 낸 현실입니다. 실제적인 현실은 관리소장이 이 부인이 고졸인 것을 알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실제적 현실보다 심리적 현실에 의해 마음이 지배당합니다. 부인은 시장에 도착하여 과일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과일을 고르고 있는데 젊은 점원이 화를 내며 “과일 주무르지 마세요. 그렇게 주물러 놓으면 과일을 팔수가 없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부인에게 떠오른 생각과 감정이 있었습니다. ‘아니, 손님에게 이렇게 불손하게 말하다니... 내가 대졸만 되었어도 이런 대접은 받지 않을 텐데... 창피하다. 그런데 내가 고졸인 것을 어떻게 알았지?’ 사실 점원이 부인의 학벌을 알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부인의 심리적 현실은 어느 새 학벌 열등감에 도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확 나오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몇 개만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부인은 시장 앞에서 짐을 들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빈 택시가 왔습니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부인을 보더니 멈추지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순간 부인의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고졸인 것을 어떻게 알았지?’ 이성적인 부인은 택시 기사가 자기 학벌을 알 리가 없고 나름대로 멈추지 못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심리적인 현실은 택시 기사가 ‘나는 고졸은 안 태워.’라고 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부인은 학벌 열등감에 사로잡혀 번번이 이유없이 비참한 자신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 후에도 학벌로 인해 계속 자존심 상하고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가족 신상카드에 부모의 학력을 적을 때에도, 남편의 직장의 부부 모임을 가질 때에도, 누가 ‘사모님 전공이 무엇이었어요?’라고 물으면 그녀의 자존심을 무너졌습니다. 나중에는 딸이 커서 자신의 진로를 아빠하고만 상의할 때에도 딸이 고졸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열등감은 이렇게 자신을 꼬이게 만듭니다.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 부인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학벌이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무시 받고 자란 셋째 딸이었습니다. 뭘 잘못해도 자기만 혼내는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 라는 낮은 자존감이 성인이 된 그녀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낮은 자존감이 ‘고졸은 창피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것입니다. 어릴 때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며 자란 사람은 자존감이 낮습니다. 고졸이 열등감을 가질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은 자존감이 후천적인 학벌 열등감으로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자존감은 자기 존중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존감이란 인격이라는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건물이 아무리 높이 솟아 있어도 기초가 약하면 충격을 받으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이 인격의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집니다. 쉽게 정신 질환이 발병합니다. 의처증, 우울증, 정신 분열증, 사회공포증에 잘 걸립니다.
자존감이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두 가지 면에서 평가합니다. 하나는 자기 가치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감입니다. 자기 가치감이란 ‘나는 가치있는 사람이다.’ ‘나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할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로 평가하고 그렇게 느끼면서 사는 사람은 자기 가치감이 높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은 무가치 하고 쓸모없는 존재이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존재라고 평가한다면, 자기 가치감이 낮은, 자기 가치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기는 무가치한 사람이고 싫증나고 지루한 사람이고, 의존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백이면 백 열등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두 번째 자신감이란 ‘나는 유능한 사람이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잘 할 수 있어’라고 자신을 믿는 감정입니다. 자신감이 있어야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자신감이 있어야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자신감이 있어야 좋아하는 이성에게 프로포즈도 합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증에 잘 빠집니다. 자신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노력해 봤자 별 수 없다’는 상태가 무기력상태입니다. “나는 안 돼요. 되는 일이 없어요. 나는 무능해요.”라고 말하면서 의욕이 없습니다. 무기력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 특히 우울증 환자들의 특징적인 증상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자기 가치감과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열등감이 생깁니다. 열등감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에서 나옵니다. ‘나는 못난이야’ ‘나는 무능해’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눈이 작아서, 키가 작아서, 외모가 그래서, 학벌이 형편없어서, 아이큐가 낮아서... 이렇게 보면 열등감을 가질 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열등감은 매우 주관적이고, 심지어 독선적입니다. 이런 열등감은 인생을 수치심과 패배감으로 채우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심지어 정신질환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존감과 열등감은 외적인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입니다.
자신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 자신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의해 열등감에 빠져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고졸 학력이라고 할지라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떳떳하고 당당하지만,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수치스럽고 창피하게 여기며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자꾸만 작아집니다. 이렇게 열등감은 항상 자신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열등감에 빠져 사는 사람을 검은색 안경을 쓰고 사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항상 모든 사물,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검게 봅니다. 어둡게 봅니다. 우울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는 인간이 실패하게 되는 10가지 장애물 중 제일 첫 번째 장애물은 열등의식이며, 열등의식은 의욕을 저하시키는 독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약과 같은 열등감, 열등의식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울 왕처럼 그렇게 무너지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면, 열등감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부정적인 말,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던 경험들이 있을 지라도 열등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말하기를, ‘조건에 상관없이 자신을 좋아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경험을 반복하면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흑인 혼혈 가수인 빌리 조엘은 어린 시절 자신의 신체에 대해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작은 키 때문이었습니다. 학교나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서 곧잘 놀림을 받을 때마다 그는 다시 태어나기를 바랐을 정도로 심하게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빌리 조엘이 실망해 있을 때마다 늘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빌리,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세상에는 누구나 자기 가 맡은 몫이 있고, 그 사람만의 개성이 있단다. 친구들은 네가 키가 작다고 말하지만 언젠가는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특별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너를 변화시킬 필요는 없단다. 지금 그대로의 네 모습이 제일 좋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이 말들은 늘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마침내 그를 조금씩 변화시켰습니다. 빌리 조엘은 자신을 믿기 시작했고, 세상을 위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수로서의 첫발을 내딛으며 어린 시절 늘 상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Just the way you are]라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가사의 뜻이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너를 바꾸지 말아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네가 제일 좋아.” 영국의 엘튼 존이라면, 미국의 빌리 조엘이라고 할 만큼 유명했던 가수입니다. [어네스티] [업 타운 걸] [마이 라이프] 등 많은 곡들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부모 여러분, 특별히 어머니 여러분!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긍휼과 자애로움으로 자녀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존감을 갖도록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욕심 때문에, 자녀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자녀를 숨 막히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7월 8일 한 외국어고등학교 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워낙 성적 스트레스를 많이 줬던 것이 원인이었고, 그 여학생은 엄마가 요구하는 성적에 도달하자 성적표를 보이고는 바로 자살 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의 유서에는 "이제 됐어?"라는 글이 전부였습니다. 충격입니다. 얼마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고, 얼마나 경쟁을 시키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었으면 그렇게 되었을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격려하고 자존감을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이 복음 인 것은 바로 이점에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조건이나 현재 상황이나 과거나 그 어떤 것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진리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생명을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의 은혜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생명,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삶의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사랑의 메시지요, 기쁜 소식입니다.
열등감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갖는 것이고, 자존감이란 관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관점이 다르면 전혀 다른 결과의 삶을 삽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의 관점을 하나님 관점으로, 예수님 관점으로 바꾸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의 관점으로 바꾸어 줍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집중하게 합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에는 이런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칼리라는 여성은 어느 모로 보나 인생이 꼬여있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뚱뚱하고 한쪽 다리마저 약간 짧아서 절뚝거렸습니다. 더군다나 남성 중심의 직장에서 유일한 여직원이어서 매일 편견과 싸워야 자기 몫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칼리의 외모나 절뚝이는 모습을 보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녀의 등 뒤에서 비웃기도 했고, 어떤 이는 그녀의 얼굴도 보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잘 알고 있었고, 하는 일에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깔아뭉개려는 사람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장애가 있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비웃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겼습니다.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칼리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독특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도, 상사나 동료의 칭찬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밝고 친절하고, 똑 부러지고 누구보다도 유능한 칼리의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내던 어떤 성도의 고백입니다. “나에게는 수치심과 열등감이라는 태산이 있었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을 거의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했고, 친구들이 수영하러 갈 때나 또 파티나 여행을 갈 때도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조개 속에 갇힌 듯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내가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연구과 기도를 통하여 내가 특별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참된 가치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나에게 있던 태산 같은 열등감과 수치심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래만큼, 다음에는 돌맹이만큼, 그리고 또 바위만큼씩 나에게 있는 태산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그분을 믿었던 결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약점만을 보면 열등감에 빠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약점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가 약할 때 우리 안에서 강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자신감이 생기고 열등감을 내 던져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 우리는 반드시 ‘나는 무가치하고 나는 무능력한 사람이야!’라고 느끼게 됩니다. ‘나는 그에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해!’ ‘나는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렇게 못해!’ ‘나는 보잘 것 없어’ 이렇게 열등의식에 빠져 삐딱하게 꼬이고, 상처 받고, 포로된 마음으로, 갇힌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열등감의 치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우리 자신의 소유나, 행동이나, 직위나, 학벌이나, 외모에서 찾으려고 하면 그것은 끝없는 열등감의 연속이 됩니다.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이면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여러분을 살리려고, 그것도 살렸다가 금방 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생하도록 구원해 주셨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이면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이면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일꾼으로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겠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게 합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약점이 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흠이 있습니다. 죄도 짓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 다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겸손이 됩니다. 자신의 열등함에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자꾸 덮으려고 하고 숨기려고 하니까 거기에 문제가 꼬이게 됩니다. 하나님께 그대로 내어놓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고, 날마다 고치시고 다듬으시고 온전케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에 참여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동참케 하십니다.
우리는 아직 공사중이기 때문에 부족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존중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셨고, 우리의 친구요, 상담자요, 인도자요, 돕는 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솔직하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다 드러내듯,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도록 내어드리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밀려들어 올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가득 차고, 평안한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열등감에 빠져있던 내용과 상처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그 상처와 사건, 조건들을 향한 자신의 관점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출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느끼고,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교만이나 열등감이 없고 평안과 감사와 사랑이 있습니다. 자신만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가치 있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존중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뜻을 잘 살펴보십시오.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여 자기 안에 사랑이 없는데 어찌 자신 안에 있지도 않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자존감이 낮은 사람, 즉 자기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없는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삐뚤어진 사랑, 병든 사람을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을 보십시오.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했습니다.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 치유 받지 못하여 결국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 끊임없이 다윗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늪에 빠졌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등감에 포로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열등의식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열등감은 많든 적든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등감을 치유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이 얼마나 가치있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늘 깨닫고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감을 갖고 자존감을 높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며,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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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1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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