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로마서 15장 13절 말씀) |
여인은 이제 너무도 지쳐 버렸습니다. 울 수 있는 힘도, 쏟아지는 눈물도 이젠 말라버렸습니다. 슬픔이 덜 해서가 아니라,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통하다 보니 어느새 몸의 기운이 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미 새가 죽은 새끼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듯 그 여인의 눈은 동공이 풀려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발길질을 해보아도 힘없이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다가 이내 멈추어 버린 새끼를 응시하는 어미새처럼 그 여인은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육체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의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감정이 여기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삶의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구약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수넴 여인이 겪은 일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르던 나인성의 과부의 마음도 똑같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암과 같은 난치병에 걸렸을 때, 불가능한 일을 만났을 때, 예기치 않은 사고로 극심한 장애가 생겼을 때, 자꾸만 실수하고 실패하여 이제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여 모든 의욕이 사라졌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내 편이 없다고 느낄 때,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때, 큰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여 강한 수치심에 휩싸일 때, 자신에 대해 열등감과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여 자신에 대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낄 때, 자신이 노력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렸을 때, 삶이 허무하고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 무관심과 냉담만이 마음속에 가득할 때, 내면 깊은 곳에서 무력감에 시달릴 때, 우울증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오랫동안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절망이란 끊을 절자에 바랄 망자입니다.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미래를 잃어버린 상태의 마음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절망은 ‘나는 끝났다’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정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졌다,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표현합니다.
오늘은 절망감에 관한 말씀입니다. 절망감이란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게 된 느낌, 즉 절망상태의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6주 동안 말씀드린, 두려움, 거절감의 상처, 수치심의 상처, 열등감, 불안감, 죄책감과 같은 내면의 상처와 찌꺼기, 장애물들이 결국 절망감으로 다 모입니다. 절망감은 저수지와 같다고 할까요? 이것저것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다 모여서 절망감이 됩니다.
절망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뒤섞여 이루어진 늪과 같습니다. 절망 속에서 나오기 위해서 혼자서 허우적거리면 점점 더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늪 밖에 있는 나무나 바위에 단단히 묶여진 밧줄을 잡고서 나와야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희망의 밧줄을 잡아야 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구하는 밧줄입니다. 이 밧줄을 잡지 못하거나 이 밧줄을 놓치면 절망의 늪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 허우적거리다가 그곳이 죽음의 늪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열대야가 계속된 한 주간이었습니다. 너무 더워서 밤에 잠을 잘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야외로 나와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동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잠자다가 죽는 사고가 여기저기에서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부산에서도 여러 건이 발생했습니다. 신혼부부가 자동차에서 죽었더군요. 자동차 창문을 조금이라도 열어 놓고 에어컨을 켰더라면 죽는 일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새로운 산소가 공급이 되지 않으니까 서서히 질식되어 죽은 것입니다. 절망은 그런 것입니다. 절망이라는 방에는 모든 문이 밀폐되어 있어서 온갖 부정적인 공기만이 가득합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산소가 없습니다. 희망의 산소가 없습니다.
절망은 사방이 다 막혔다고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 좌절하고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희망이 없습니다. 사방이 깜깜하여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느낌입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공급되지 않으면 삶이 재미도 없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절망감은 우리를 감옥 속에 가둡니다. 그 감옥은 문이 없습니다. 창문도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절망이라는 감옥 안에는 희망의 산소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절망이라는 감옥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결국 질식해 죽습니다.
절망은 미래를 무너뜨리는 적입니다. 절망은 우리의 건강과 영혼과 삶의 미래를 무너뜨리는 적입니다. [시카고 트리분]이라는 잡지에 이런 조사 결과가 실렸습니다. 아주 큰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동맥경화증에 걸릴 확률이 낙관적인 사람보다 무려 20퍼센트나 높다는 조사 결과가 실렸습니다. 이것은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꾸준히 피는 흡연가를 비 흡연가와 비교해보았을 때 관찰할 수 있는 위험에 해당하는 결과입니다. 결국 절망은 하루에 한 갑씩 꾸준히 피는 것만큼 우리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절망은 우리의 건강에 치명적인 병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의 가장 큰 적은 육신의 병이 아니라 바로 절망입니다.
사탄은 파괴자입니다. 우리를 불행과 고통과 멸망으로 끌고 가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 사탄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서 희망을 파괴하고 빼앗아 가는 일입니다. 절망은 사탄이 사용하는 아주 강한 무기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사소한 문제를 크게 부풀립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 큰일 났구나!”하고 먼저 낙담부터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 마귀는 항상 “아, 이제는 희망이 없어...네 인생은 이제 끝장이야!”라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절망의 늪에 빠지게 하고, 절망의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절망의 질병에 걸려 꼼짝 달싹 못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게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과는 반대로 희망은 신체적으로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혈액 순환, 호흡을 돕고 가장 중요한 점은 통증을 완화시킵니다. 희망 자체가 암을 치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서 믿음과 기대를 갖는 사람의 뇌에서는 도파민이라는 화학물질이 나옵니다. 도파민은 뇌의 중요한 방아쇠로서 동기 유발, 목표 추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뇌에서 도파민의 경로는 엔돌핀, 엔카파린의 경로와 연결되어 있는데 엔돌핀과 엔카파린은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고 통증을 경감시킵니다. 뇌에서 모르핀과 아편이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유사한 경로를 거쳐서 작용합니다. 통증의 경감은 암을 치료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한 과학자가 캄캄한 독 속에 쥐를 넣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쥐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죽고 말았습니다. 체력이 다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독에 한 줄기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그러자 쥐는 36시간을 버티다가 죽었습니다. 그 쥐에게 있어서 빛은 한 가닥 희망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포로가 된 미군 포로 중에 말 잘 듣는 포로를 살려주겠다고 한 말을 믿고 잘 버티다가, 월맹군의 말이 거짓이고 살 소망이 없어지지 며칠 지나지 않아 죽은 병사가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 그를 죽게 한 것이 아니라 절망이 그를 죽게 한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반드시 매일 섭취해야 할 비타민이 있는데 그중에 중요한 비타민은 비타민 H와 비타민 V랍니다. 비타민 A, B, C, D, E 등은 들어보셨겠지만 비타민 H와 비타민 V는 처음 들어보실 것입니다. 비타민 H는 영어로 희망이라는 Hope의 H이고, 비타민 V는 영어로 Vision의 V입니다. 희망 비타민과 비전 비타민을 매일 매순간 가슴속에 섭취해야 몸과 마음과 삶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과 희망과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희망이 가득하면 절망이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에 절망이 가득하면 희망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절망감을 떨쳐버릴 수 있으려면 희망을 선택해야 합니다. 희망의 밧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냥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좌절하고 체념하고 있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죄인과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죄인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죄인은 절망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있는 소망을 붙잡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희망을 소망으로 번역했습니다.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낙천주의자가 아닙니다. 낙천주의자는 근거도 없이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낙천주의는 염세주의나 비관주의보다 정신 건강에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관적으로, 낙천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근거가 없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짓된 소망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참 소망이 있고, 거짓된 소망이 있습니다. 거짓된 소망은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는 소망이지만 그 근거는 실제로 아무런 성취를 이룰 수 없는 거짓 근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근거 있는 소망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이룰 수 없는 근거를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근거로 한 소망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당면한 문제와 시련이 여러분의 미래를 처참하게 부셔버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불행으로 끝장나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잘못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고 거절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절망속에 있는 여러분을 버리시고 포기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지금의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서 부끄러워하실 것이고, 여러분은 이런 일로 또다시 사람들 앞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은 무가치한 존재이고, 쓸모없는 인간이며, 여러분이 하는 일이 늘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시지 않고 외면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지은 죄로 인해 여러분은 불결하고 추악하다는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결하게 여기실 것이고, 여러분을 가까이 하지 않으시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절망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서에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에 소망과 미래를 주시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너희 소망을 두라. 그러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죄와 죽음으로 절망 가운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인간을 십자가의 보혈로 승리케 하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영혼 깊숙이 살아있는 소망을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절망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불가능한 일로 절망할 때, 믿음과 소망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꾼 믿음의 선조들을 보여줍니다. 진노와 죽음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부활의 소망, 영원한 생명의 소망, 영광의 기업의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서울에 있는 성안교회 장학봉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는 데, 그 교회 성도 중의 한 분이 정말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계시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후 장목사님께 이렇게 묻더랍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믿으세요?” 장목사님은 그 물음이 하도 의아해서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럼 목사인 내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안 믿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다시 장목사님께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은 모르실 겁니다.” “아니, 제가 도대체 뭘 모른다는 겁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나님은 그냥 살아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절망 속에 있는 우리를 도우시려고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절망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계십니까?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소망이십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절망은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고,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법과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오던 삶이 벼랑 끝에 서게 되고, 절망하게 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에는 하나님 바라보기는 보되, 가끔, 어쩌다가, 필요할 때만, 힐끔거리며 하나님의 눈치를 보느라,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았지만,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는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절체절명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은 곧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신하는 계기가 됩니다. 절망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출발이요, 체험 삶의 현장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 삶의 절망을 경험해보고 절망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희망이며, 도움이며, 구원임을 깨달아 자아를 깨뜨리는 경험이 있어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 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복음이 왜 복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왜 은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절망에 빠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절망은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둘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절대 망하지 않는다!” “나는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절망은 새로운 영성의 디딤판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쉽게 절망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자기 자신만 바라보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우리가 주위 환경만 바라보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우리가 사람만 바라보고, 이 세상의 물질세계만 보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과학과 상식과 이성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상황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고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말로 질식되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기대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이상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크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는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망은 희망의 전주곡입니다. 절망이 시작되면 어떤 사람은 포기와 파멸과 죽음으로 끝나는 가하면, 어떤 사람은 절망은 희망의 전주곡이고 절망을 통해 극적인 희망의 새출발이 이루어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되신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결론을 내리시기 전까지는 자신이 먼저 절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삶을 절망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절망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인간인데 왜 절망할 일이 없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만사를 포기하고 싶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왜 없겠습니까? 절망하고 싶지 않지만 환경과 사건들이 절망하게 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좋다는 다윗도 절망으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영혼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고 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절망으로 푹 빠져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절망할 일은 있었지만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실 것을 믿기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 차려 놓으신 상을 받을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삶의 문제나 장애물이나 고난이나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난과 시련 뒤에 준비해 놓으신 구원과 복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을 극복한 후에 얻게 될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영광과 열매가 있습니다.
로키산맥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수목한계선이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서 있습니다.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도 생존을 위해 무릎을 꿇은 듯 구부러진 채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의 재목들입니다. 가장 선율이 아름다운 공명을 내는 바이올린은 이렇듯 매서운 바람을 이긴 나무,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티며 자란 나무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와 고난과 시련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이겨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더욱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겨울과 같은 절망의 계절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하루 중 절망의 밤과 같은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에는 절망의 골짜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울을 지나면 봄이 오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골짜기를 지나면 산마루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툭하면 절망감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망감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충만히 거하셔서 내 마음이 어두운 감옥이 되지 않도록,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함며 인내함으로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살이를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 하나도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과 위기를 만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슬퍼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망감을 떨쳐버리고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이유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으며, 소망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둔 소망으로 절망감을 떨쳐낼 뿐만 아니라 참 소망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여러분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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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0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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