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사람 (골로새서 1장 1~2절) |
두 젊은이가 같은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젊은이가 승진을 했습니다. 진급하지 못한 직원이 불만을 품고 사장의 불공평한 대우에 따졌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그에게 시장에 나가 어떤 물건이 거래되는지 알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는 얼마 뒤 “농사꾼이 감자를 팔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사장은 “양이 얼마나 되던가, 가격은 얼만가?”하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까지 알아 오라고 말하지 않으셨잖아요.”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사장은 불만을 품은 직원 앞에서 승진한 직원을 불러 똑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잠시 뒤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오늘은 감자 90박스가 거래되고 있으며, 가격은 한 박스에 2만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자 하나를 내보이며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합니다. 사두면 큰 이익이 될 겁니다.” 라고 제안했습니다. 사장은 불만 가득한 직원을 향해 말했습니다. “왜 자네가 적은 월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알겠나?”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지를 마침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고 그 평가에 따라 어떤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좋은 평가,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다면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것 같습니까? 시원한 사람? 답답한 사람? 대범한 사람? 쫀쫀한 사람? 멋있는 사람? 아니면 형편없는 사람?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믿을 만한 사람? 못 믿을 사람? 다른 사람들로부터 믿을 만한 사람, 믿음직한 사람,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된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골로새서의 내용을 보면, 골로새교인들이 굉장히 신실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도 아니고, 골로새 교회 공동체의 신앙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 7절에는, 에바브라를 이야기 하면서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4장 7절에는 두기고를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9절에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낸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사람을 소개 하면서 신실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왜 그렇게 많이 썼을까요? 당시 골로새교회에는 거창한 말과 지적인 체하는 모호한 말로 교인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헛된 전통과 허망한 미신을 유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상을 진리인양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거짓을 진실인양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과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그들에게 미혹될까 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진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통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골로새교회에 믿고 보낼 신실한 사람 한 사람이 무척 소중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거짓과 허탄한 것에 휩쓸리지 않는 신실한 신앙인, 신실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편지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실하다’는 말로 사용된 ‘피스토스’라는 헬라어는 ‘믿는다’ ‘의지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또는 ‘믿을만하다’는 피동적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에서는 신실한, 믿음이 있는, 충성된 등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신실하다라는 말을 우리말로 미쁘다는 말로도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진실되어 믿음성이 있다, 믿음직하다, 믿을만 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실한 사람이라는 말은 믿을만한 사람, 듬직한 사람, 의지가 되는 사람, 충성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7장 9,10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 보응하시니라”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2장 13절에는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 입니다. 우리들은 신실함이 없지만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함의 최상의 모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가운데 중요한 성품이 신실함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꼭 지키시는 신실하심, 우리에게 언제나 진실하심으로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신실하심, 우리에게 성실하게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께 언제나 나아갈 수 있고, 우리의 삶을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믿고 누리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렇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신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 신실하심을 본받아야합니다.
성경말씀에, “아버지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버지가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의 내용을 따라 한 가지 더 한다면, “하나님께서 신실하심같이 너희도 신실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표현한 말씀 문장이 없을 뿐이지 뜻으로 보면 그 이상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자녀들이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본에는 시편 18편 25절, “주께서는 신실한 사람에게는 주의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라고, 시편 31편 23절을, “주께서 신실한 사람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사람은 가차없이 벌하신다.”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성경 곳곳에 신실한 사람을 찾으시어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닮아 거짓을 행하지 않고 진실해야 합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신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독교인들이 신실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지만, 세상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이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데 신실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신실하지 못함으로 심각한 비판을 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기 보다는 기독교 진리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을 못 믿겠다, 말뿐이기 때문에 못 믿겠다, 믿는 사람들이 더 하다는 것 아닙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격으로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 믿는 사람 같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보다 더 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들이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강렬히 비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배신감은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할 때 느끼는 것이지 아예 믿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결코 배신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그럴 줄 알았어~’입니다. 신실한 사람인 줄 알았고, 신실하기를 기대하였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니까 더 실망하고 분노하고 비방하고 심지어 안티기독교가 되어 기독교를 반대하고 적대세력이 되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전도를 하다보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 돈 떼인 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실망하여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듭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나 친척 중에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부모에게, 형제에게 잘못하여,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마음을 닫아 버린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독교인들이 신실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거짓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믿지 못할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고 의지하고픈 사람이 아니라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세상 속에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신실한 사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신실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 [마중물]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추리소설처럼 꾸며진 책입니다. [경청]의 저자인 박현찬씨가 썼습니다. 정수기 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회사가 위기를 만나고, 그 위기를 겪는 과정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사랑과 화해, 회사 동료와의 우정과 배신, 위기의 회사의 상황에서의 불안과 불신 속에서 그것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익 추구와 무한 경쟁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신뢰’라는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는데, 신뢰는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덕목이며,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미래 경제를 움직이는 새로운 자본은 신뢰”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는 약속과 믿음이 있다. 그게 무너지면 기업도 이익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러면서 책 제목이 ‘마중물’인 것처럼, 주인공이 마중물이 되어 회사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마중물이 무엇입니까? 마중물은 순수우리말로, 마른 펌프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먼저 붓는 한바가지 정도의 물을 말합니다. 내가 먼저 신뢰의 마중물을 부으면 고여 있던 샘물이 솟아 올라와 물줄기가 되듯이 사람들 사이에 신뢰의 강물이 흐르게 된다는 의미를 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마중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심으로 우리들에게 생명의 물이 솟구치게 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마중물이 되어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마중물이 되어 사랑의 샘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우리 사회 속에 신뢰의 마중물이 되어 진실을 잃어버리고, 신뢰를 잃어버린 세상에 신실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닮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실한 사람은 충성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 달란트 비유의 말씀에서 타국에 갔다고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칭찬하는 말을 하는데, 개역판 성경과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번역되었고, 표준 새번역에는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번역했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씀하는데,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주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그분을 섬기는 이 직분을 맡겨 주셨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실하다는 말은 충성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충성스러운 사람이 될 때, 우리를 신실한 사람으로 일컫는다는 뜻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맡겨진 일에 진실되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합니다.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충성된 사람입니다.
KBS방송국의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의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그 코너는 술에 취한 두 남녀가 경찰서에서 벌이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합니다. 그 코너에서 남자 개그맨은 자신이 술에 취하게 된 이유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을 내뱉으며,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 시청자들에게 큰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은 정말로 1등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1등만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것처럼 평가합니다. 1등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1등만이 성공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1등한 사람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실한 사람들을 기록하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한 사람들,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에게도 신실한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험문제로 말하면 100점 맞은 사람만을 성경은 칭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한 사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완벽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우리들에게도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와 약점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업적을 많이 세운 사람을 높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작을지라도 충성하는 사람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충성되고, 맡겨진 일에 충성된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지난 금요일 국민일보 31면에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이신 장 영일 교수가 [성경인물 탐구]란에 쓴 “여호수아의 동역자 갈렙”이 실렸었습니다. 장 영일 교수는 구약학 교수입니다. 그 글에서 갈렙이라는 이름이 켈렙이라는 단어와 비슷해서 갈렙이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켈렙’의 뜻은 ‘개’(dog)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 뭐라고 놀림을 받았고, 그의 별명이 무엇이었을지는 금방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개를 숭배한 애굽사람들과는 달리 개를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한 유대인들로부터 때때로 ‘개’(켈렙)처럼 비하되고 멸시당할 때마다 아마도 그는 엄청난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본래 이방민족, 즉 에돔족속의 그나스 가문 출신입니다. 에돔 족속은 야곱의 자손이 아니라 에서의 자손입니다. 그는 어떤 동기에서 이스라엘에 귀화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일로 인해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장교수는, 그러나 갈렙은 그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죽은 개만도 못한 놈입니다. 그러나 저는 충견처럼 주인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습니다. 전능의 주께서 제 곁에 계신다면 저는 아무도 두렵지 않습니다. 마지막 공의의 심판으로 상 주실 주님을 믿기에, 저는 원망없이 주님과 이웃을 기꺼이 섬기겠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쌍두마차의 말처럼 콤비를 이루며 주목을 받았지만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했을 때에 이를 기꺼이 수용하고 기꺼이 2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1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민족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렙은 이렇게 모멸감과 열등감을 극복하고 겸손과 충성으로 살았습니다. 갈렙은 끝까지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가나안 정복 후 땅을 분배할 때, 갈렙은 8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45년 전 가나안 땅을 함께 정탐하고 온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이 공포의 대상으로 거론했던 거인들의 요새 헤브론을 결코 잊지 않고, 여호수아에게 자신에게 헤브론을 배당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결국 헤브론을 정복시켜서 이후 이스라엘 남부의 최고 도시 헤브론은 7년 반 동안 다윗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성실히, 진실되게, 충성되게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갈렙은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한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했고, 여호수아와의 관계에서도 신실했고, 백성들에게도 신실했습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일을 맡으면, 그가 전쟁에 나가면, 그가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사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그는 나이가 젊은 때나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자신의 삶에 신실했습니다. 그는 여호수아처럼 모세의 후계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함으로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갈렙처럼 신실한 사람이 되어 충성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큰일은 열심히 하지만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신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생활도 보면, 툭하면 삐껴서 교회 안 나오겠다고나 하고, 기분 나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기면 맡은 일 안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신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하긴 다 합니다. 그러나 하긴 다 했어도 신실한 사람은 아닙니다. 신실한 사람이란 믿음직 한 사람입니다. 맡겨진 일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변덕스럽지 않고, 충성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여러 직분자들, 봉사자, 사역자들 가운데 신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굴만 내미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보든 안 보든,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신실하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로 인해 교회가 든든히 서고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우선인 사람이 신실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일, 거창하고 화려한 업적을 이루는 것에 우선순위가 있는 사람은 신실함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일을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우선순위가 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일을 맡았어도, 일이 잘 진행이 되지 않더라도, 비록 실수하고 잘못 되었을지라도 신실하게 그 일을 감당합니다.
교우 여러분, 기독교인 즉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법에 의해서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법 때문에 법과 질서를 지키고, 범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위에 있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 나라의 시민법,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법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물결이 흘러가는 데로 휩쓸려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사람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신실함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도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세상 속에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요? 신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오늘도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바로 이 세상의 마중물입니다. 여러분이 신뢰의 샘물이 솟아오르게 하는 마중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신실함을 회복하고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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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0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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