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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소금 (ii)  [3729]
· 설교 일자 : 2012년 01월 08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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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소금 (ii)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루이지 라리시오라는 사람은 자기 집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통해 명품 바이올린들을 무려 246개나 수집하여 다락방에 보관하였습니다. 바이올린 수집하는데 일생을 바친 그가 그 바이올린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동안 세상은 아름다운 음악을 도적질 당한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 전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장했던 바이올린 중 가장 깨끗한 음질을 가지고 있었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처음으로 연주되기까지 무려 147년이나 걸렸습니다.
  바이올린의 정체성은 아름다운 선율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연주되지 않고 보관만 되어 있는 바이올린은 엄밀히 말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악기는 소리를 내며 연주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만약 그 악기가 소리를 내야 할 때 소리를 내지 못하고, 소리를 내긴 냈지만 이상한 소리를 낸다면 그 악기는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악기는 목적대로 사용될 때 악기로써 가치가 있습니다. 소금도 목적대로 사용될 때 소금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대로 살아갈 때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루이지 라리시오가 바이올린을 수집하여 자기 혼자 보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받아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자녀는 되었는데, 복음을 세상에 전하지 않거나,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고 그냥 부뚜막 위에서 빈둥거리고 있기 때문에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명령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밝히셨고, 인식시키셨습니다. 이제부터 세상의 소금이 되도록 준비하고 노력해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소금과 관계된 특별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창세기 19장에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 성 심판을 피해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된 사건입니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의 이야기에서 소금은 폐기 처분되고 쓰지 못하는 아무런 가치도 용도도 없는 버려진 소금입니다. 또 하나는 엘리사의 소금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지방의 한 농촌에 수질이 나빠서 농작물이 결실하지 못하고 여인들이 임신해도 유산하고 그 고장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사정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호소하자, 엘리사 선지자가 그 현장에 가서 소금을 물의 근원지에 뿌려 수질을 회복시켜 주고 그곳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소금은 환경을 살리고 농민을 살리고 여인들을 살리는 쓸모 있는 소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 쓸데없이 버려지는 소금이 아니라 쓸모 있는 소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원어에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세상의 소금’으로 번역된 원어가, 영어성경은 원어의 의미에 맞게 ‘the salt of the earth’로 되어 있습니다. 'the salt of the world'가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 ‘세상’으로 번역된 ‘earth’는 ‘세상’ 과 ‘땅, 또는 흙’을 모두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흙’이 아닌 ‘세상’으로 번역함으로써 원어 속에 담긴 문화적 포인트를 놓치고 말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게(γη)’ 는 땅에 있는 흙을 가리킵니다.
  조정칠 목사님은 ‘땅의 소금’이라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의 씨앗 파종 장면을 보면, 유대인 남자들이 씨앗을 밭에 뿌리면 그 뒤로 아낙네들이 소금 자루를 들고 밭고랑에 소금을 한 줌씩 뿌렸다고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땅의 소금’을 말씀하신 것은 단지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의 의미만이 아니라 쓸모 있는 소금을 말씀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사해 바다 근처에 있는 소금산, 롯의 아내 소금 기둥이 서 있는 산, 즉 풀도 나무도 한 포기가 없는 벌거숭이 소금산이라 불려지는 산, 저주받은 땅이고 버려진 땅의 소금과 대조적으로 땅속에 뿌려져 소금의 역할을 하는 쓸모 있는 소금을 말씀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소금의 용도는 약 1400가지가 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쓸모가 많은 물질입니다. 소금은 집집마다 비치해 둡니다. 날마다 먹는 친숙한 소금입니다. 음식의 맛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소금으로 양치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소금을 풀어 뜨거운 물로 찜질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금으로 생선을 절이기도 하고, 부패 방지용으로 소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공업용으로 사용하여 비누, 합성고무, 액체연료, 화약제조, 화장품, 접착제, 페인트 제조 등에 사용됩니다. 의료품으로는 소독용으로 사용되었고 감기 예방과 치료를 위해 소금으로 가글을 하기도 합니다. 농업용으로는 비료, 농약을 만들 때 사용하고, 종이를 만들 때, 땅이 얼지 말라고 동초방지제로 사용하기도 하고, 눈을 녹일 때에도 사용합니다. 배수구 싱크대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진한 소금물을 흘려보내면 좋다고 합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생활 곳곳에서 사용됩니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라고 가정 방문 전도를 하면 간 후에 자기 집 문 앞에 소금을 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왔다 갔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되는 소금은 쓸모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금은 자기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소금의 생명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파송된 류 모세선교사가 쓴 책 [열린다 성경] -생활 풍습 편 하권에 보면, ‘세상의 소금’을 성서 시대의 여인들이 빵을 굽는데 사용하던 ‘화덕’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헬라어 원어에 관한 말씀을 드린 것처럼, 류 모세 선교사는 ‘세상의 소금 ’은 ‘땅 속의 소금’, ‘흙속의 소금’으로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신약성경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헬라 사상이 아닌 히브리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고, 단지 복음의 세계화를 위해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빌려 썼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같은 셈족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아랍어에서 모두 흙은 곧 진흙으로 만든 화덕(oven)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고대부터 빵을 굽는 데 사용한 화덕은 진흙으로 만들었는데, 지금도 2000년 전 성서시대 삶과 비교해서 별반 차이가 없는 베두인의 마을에 가면 진흙으로 만든 화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류모세 선교사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은 분명 ‘진흙의 소금’ 즉 실제로 ‘진흙의 화덕의 소금’을 의미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진흙의 화덕 속에서 소금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나무가 귀한 이스라엘에서 화덕에 사용하는 연료는 주로 낙타, 양, 염소와 같은 동물의 변이었습니다. 변을 지붕에서 잘 말려 연료로 사용했는데, 동물의 변은 불이 쉽게 붙지 않기 때문에 이때 소금을 촉매로 사용해 불을 붙였답니다. 화덕의 가장 밑판에 소금을 깔고 그 위에 잘 말린 동물의 변을 깔아서 불을 붙이면 소금이 촉매역할을 해서 불이 잘 붙게 된답니다. 이것은 마치 연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 그 밑에 번개탄을 까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소금’은 ‘진흙 화덕 속의 소금’으로 이 소금은 동물 변 연료를 위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에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류 모세 선교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짜게 하는 소금의 맛’은 양념의 의미 보다는 진흙 화덕 밑에 깔리는 불쏘시개로 사용되는 소금인데, 이렇게 화덕 밑에 깔린 소금은 자주 사용하다 보면 그 기능을 잃게 되고, 이것이 바로 ‘짠맛을 잃은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기능을 잃은 소금은 화덕에서 긁어내어 내다 버린다는 뜻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마가복음 9장 47-49절에 지옥에 대한 묘사를 할 때, 꺼지지 않는 불속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소금을 이야기 합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어쨌든 오늘 본문 13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소금으로, 땅의 소금으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쓸모 있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 전부라면, 단지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처럼 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 땅의 소금의 의미는 입맛을 위하여 존재하는 소금으로서의 역할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다르게 표현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매운 고춧가루이다.” “너희는 세상의 후추이다.” 이렇게 말씀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 가정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고춧가루도, 후추 가루도 음식의 맛을 위해 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금과 고춧가루, 후추 가루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고춧가루, 후추 가루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넣을 수도 있고, 안 넣을 수도 있습니다. 음식의 종류에 따라 넣을 수도 있고, 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샐러드와 같은 채소 자체로만 음식을 만드는 요리가 아닌 이상, 간을 맞추기 위해 많든 적든 넣어야 합니다. 소금이 들어가 녹아져 내는 맛이란 음식의 가장 기초가 되는 맛입니다. 기초이면서 중심입니다.
  소금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소금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무엇일까요? 소금이 음식의 맛을 위해 존재한다면 소금은 음식에 녹아서 맛있는 음식이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음식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소금은 음식을 먹는 사람을 위해 녹아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이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소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대상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세상을 위해 그 역할과 기능을 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드려지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이고, 사명이고,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요리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완성되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 땅의 소금이라고 해서 세속적인 세계와 완전히 동화되어 버려 자신의 고유한 소명을 잊어버린 그리스도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속에서 녹아지는 것이 소금이지만,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짓을 하여도 그 맛을 내주기 위해 녹는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에서 나와서 바다의 물기를 완전히 증발시킨 다음에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바닷물에서부터 나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세상과 섞일 수 없는 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죽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진리를 지켜야합니다.

   소금은 정직하고 유순하여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쓰려고 집어넣기만 하면 순순히 녹아주는 편한 물질입니다. 그렇다고 넣는 소금의 양 전체가 다 녹는 것은 아닙니다. 물에 최대로 녹을 수 있는 소금의 양은 39% 미만입니다. 물의 온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물에 아무리 많은 소금을 갖다 넣어도 일정한 양이 녹으면 더 이상 녹지 않습니다. 그러나 녹은 양만큼은 효력을 발생합니다. 짠 맛을 냅니다. 소금이 녹는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내어도 소금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단지 짜다, 싱겁다, 간이 맞다 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갖은 양념을 다 넣고, 온갖 기교를 다부려 요리를 해도 간이 맞지 않으면 실패한 요리입니다. 소금이 내는 맛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소금이 영광을 얻지 않습니다. 김치를 담글 때에도 소금을 넣고, 된장이나 고추장을 만들 때에도 소금이 사용되지만, 맛있는 된장, 고추장이 만들어진 후에 소금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김장 김치를 담근 후에도 김장 김치가 맛있으면, 배추가 좋아서, 또는 양념을 잘 했더니 김장김치가 맛있다고 하지 소금을 잘 넣어서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금은 녹아져 맛을 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고춧가루를 넣으면 빨간색이 드러나고, 깨를 뿌리면 깨들이 보입니다. 생강을 넣든지, 마늘을 넣든지 다른 양념들은 색깔로든, 모양으로든 드러납니다. 그런데 소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녹아져 모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금이야 말로,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 6장 3절의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이렇게 소금은 아주 중요한 것이면서도 녹아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맛을 내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초이면서도 그저 묵묵히 자기를 녹여 헌신하는 존재가 소금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를 없애고 죽여서 세상을 사랑하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삶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살라는 예수님의 정신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 교회에 다니는 어떤 사람의 남편으로부터 자기를 방문하거나 교회에 참석하라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목사가 자기를 방문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도 자기를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요청을 존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일 년 후 그 사람이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찬송을 마친 후 그는 앞으로 나와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교회 식구들과 교제를 나누는 삶으로 되돌아왔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돌아오게 한 것은 그의 헌신된 그리스도인 아내의 거룩한 삶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어떤 설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잔소리하거나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남편을 위해 기도했고 그 앞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가정에서 소금이었고, 그의 삶은 남편으로 하여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소금의 짠맛을 보고 난 후 갈증이 생겨서 물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소금은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 책임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몫의 책임, 자기 몫의 역할, 자기 몫의 사명을 다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삶입니다. 소금이 맛을 낸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닷물 속에는 3%의 소금만으로 바닷물이 됩니다. 음식에 들어가든, 다른 모든 용도에 사용되는 소금도 각각에 필요한 양만큼 사용되어 역할을 합니다.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면서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받은 대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터전에서 소금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맛을 잃어버린 소금에 대한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는 것은 본질과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생명이신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행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예수님을 떠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복음과 진리를,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예수님의 생명이 없어진 것이고, 세상 속에서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맛을 잃은 소금이 밖에 버려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밟힌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9절에도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셨고,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짖 밟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심판을 받습니다.
교우 여러분, 버려지고 짖밟히는 소금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진리와 정신을 세상 속에 행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세상의 소금, 땅의 소금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1월 0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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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빛이 있으라
· 일시  2011년 12월 31일
· 말씀  창세기 1장 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소통하러 오신 하나님
· 일시  2011년 12월 25일
· 말씀  마태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