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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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3855]
· 설교 일자 : 2012년 03월 11일
· 본문 말씀 : 누가복음 22장 24-30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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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누가복음 22장 24-30절)
  어린 시절 남자 어린애들은 모여서 놀다가 한번쯤 하는 경쟁이 있습니다. 무슨 경쟁인지 아십니까? 남성분들은 다 압니다. 누구 오줌이 더 멀리 나가느냐? 를 경쟁합니다. 나란히 서서 일시에 오줌을 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멀리 오줌발이 나가는 아이는 무슨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해 합니다. 우습습니까? 사실 인류의 문명, 과학, 기술은 선의의 비교와 경쟁이 있었기 때문에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비교와 경쟁의 긍정적인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비교하고 경쟁하는 일이 고통으로, 다툼으로, 범죄로, 전쟁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24절에 보니,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하는 다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누가 위냐? 누가 선임이냐? 누가 높으냐? 누가 위대하냐? 누가 힘이 세냐? 누가 영향력이 있느냐? 누가 인기가 많으냐? 그런 종류의 다툼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모이면 ‘누가 크냐?’와 같은 비교와 경쟁이 일어납니다. 인간 내면에 깊숙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언제나 있어왔던 고질병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비교와 경쟁입니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입니다. 누가 더 위대하냐?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유명하냐? 는 고질병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사랑 때문에 생긴 고질병입니다.
  창세기 4장에, 아담과 하와가 낳은 큰 아들 가인과 둘째 아벨이 각각 농사를 짓고, 양을 치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가인은 몹시 화를 내면서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아벨을 들판에서 쳐죽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아벨과 비교했고, 경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아벨을 향한 미움과 시기가 분노로 들끓었고, 결국 인류 최초의 형이 인류 최초의 동생을 쳐 죽이는 최초의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또 사람과 사람을 놓고 비교합니다. 비교하여 내린 결론에 따라 열등감에 시달리기고 하고, 반대로 교만에 빠져 의시대기도 합니다. 비교하여 자신이 쳐진다 싶으면 경쟁을 통하여 이기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난 지고는 못 살아!’ 그러면서 끊임없는 승부욕을 발동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극심한 경쟁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가 다른 아이와 자녀를 비교하여 하는 말 때문에 자녀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위에, 남들보다 더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자기를 과시하기도 하고, 자기를 포장합니다. 명품 물건에 집착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였느냐 하는 것을 비교하고 경쟁하려니까 허세도 부리고, 사치와 허영에 빠지기도 하고, 그것이 안 되면 패배감, 상실감, 열등감에 빠져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두 번째로 말씀하신 직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는, 제자들이 이미 누가 크냐고 변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누가 크냐? 하면서 다투지 말고 오히려 작은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그 후에도 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째로 말씀하신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부탁을 했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가복음 10장 35절 이하에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려면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또한 예수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지 자신의 권한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듣던 다른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었다고 했습니다. 두 형제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키려고 했든, 두 형제가 청했든 간에 다른 제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제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최소한 두 번 있었고,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여 제자들이 화를 낸 사건까지 합치면 세 번이나 누가 크냐? 하는 자리다툼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항상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신 직후이거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다른 때도 아니고 특히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에는 1절부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반이 진행되고 있고, 성만찬이 거행 되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눈 직후에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 3년 동안 스승의 가르침과 기적과 삶을 함께 하였던 제자들이 스승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 그들은 누가 크냐 하는 관심을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중에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곧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은 익히 들었고 알고 있었을 텐데 그랬어야 했을까요? 마치 부모의 임종 앞에서 재산 싸움을 하는 자식처럼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잘못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 크냐?’로 다투는 제자들을 통해 야망에 가득 찬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고, 더 높아지려고, 더 힘 센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도토리 키재기’하듯이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들의 모습은 거기가 거기인데, 그중에 자기는 좀 더 낫다고, 더 크다고, 더 잘났다고 목을 빼고 머리를 자꾸만 위로 솟구치려합니다.
  여러분, 키가 큰 남자가 키가 아주 작은 여자와 연인이 되어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아는 후배 목사가 키가 아주 큽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키 차이가 많이 나는데 괜찮느냐고. 그랬더니 하는 말이 키가 큰 사람 입장에서 보면 키가 아주 작든, 적게 작든 다 작게 보인답니다. 일리가 있는 대답입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우리 인간을 보면, 다 거기가 거기입니다. 비행기 위에서 땅 아래를 내려다보면 100층 빌딩이나 초가집이나 다 거기가 거기로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 관점으로 보면 도토리 키재기 하는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크냐? 누가 잘났냐? 누가 더 높으냐? 하는 문제로 아웅다웅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비교하고 경쟁할 때 정신 에너지를 많이 소모합니다. 그 결과 병이 생깁니다.
  저희 교회에 강의한 적이 있는 정신과 의사 이무석 교수는 정신력, 즉 정신 에너지란 전화기 배터리처럼 사람마다 일정량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즘 스마트폰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아 전화를 하는 일에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휴대폰 배터리는 휴대폰을 전화 통화 하는 데만이 아니고 게임을 하거나 다른 무엇을 하느라고 사용하면 정작 전화를 걸고 받아야 할 때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할 수 있으려면 재충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신력, 정신 에너지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무석 교수는 정신 에너지가 고갈되면 나타나는 증상을 설명합니다. 정신 에너지가 고갈되면 학생은 공부를 못합니다.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또 정신 에너지가 고갈되면 사람이 싫어집니다. 짜증을 잘 냅니다. 신경질이 자주 나고 주위 사람들과 잘 싸웁니다. 쉽게 피곤을 느낍니다. 삶의 의욕이 떨어집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증상이 있다면 정신 에너지가 고갈된 것입니다. 영적인 에너지가 바닥이 난 것입니다. 재충전하지 않으면 연쇄부도 현상처럼 정신 질환, 신체 질병이 생기게 됩니다.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아버지와 함께 정신과를 찾았습니다. 학생은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며 엉엉 울더랍니다. 일주일 전부터 몸이 나른하고 의욕이 없어지더니 공부를 해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이 머리가 텅 빈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만 바쁘고 몸이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이 학생의 마음속에는 큰 일이 났다는 절망감이 무섭게 엄습해 왔습니다. 자존심도 강하고 공부 욕심도 많아서 성적이 최상위 그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무석 교수가 진단한 결과 탈진 증후군이라고 판단이 되었답니다. 정신 에너지를 너무 과도하게 써 버린 탓이었습니다. 정신 에너지를 충전하지 않고 소모만 하여 에너지의 고갈이 온 상태입니다. 왜 그렇게 정신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었을까를 알아보니 라이벌 때문이었답니다. 문제의 시작은 모의고사를 친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여학생 등 뒤에서 라이벌 학생이 다른 친구와 답을 맞추어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틀린 문제들을 라이벌 학생은 다 맞혔더랍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갑자기 초조해졌습니다. 그날부터 잠 잘 시간도 없이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나왔고 라이벌 학생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더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정신 에너지가 고갈 된 것입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일에 정신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렸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에 대해 분노와 증오심을 가질 때에는 어느 때보다도 그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고 가슴 속에는 미움, 질투, 분노, 증오심으로 가득 찹니다. 한번 그를 생각하면 잠간 동안에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의 정신 에너지는 급격하게 소모됩니다. 정신 에너지가 고갈되면 재충전하지 않는 한, 몸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스트레스입니다.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 우리의 정신 에너지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앞에서 말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경쟁 스트레스로 너무도 많은 정신 에너지를 소모해서 문제가 생긴 경우입니다. 여러분,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의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정신 건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나아가 신앙생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비교하는 습관, 비교하는 마음은 신앙에도 도움이 안 되고, 행복도 사라지게 합니다.
  어떤 가정에 초등학교 4학년인 큰 딸과 2학년인 아들이 있는데, 가끔 2학년인 아들이 아빠에게 손을 내민답니다. 용돈을 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빠는 아들에게 500원짜리 동전을 준답니다. 그러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고는 달려갑니다.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예, 과자 사먹으러 갑니다. 한 번은 4학년 딸아이가 아빠한테 용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어 500원짜리를 주려고 보니까 없어서 1000원 짜리 지폐를 주었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걸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아들이 툴툴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누나는 천원을 주고 자기는 5백 원밖에 안 주었느냐는 것이지요. 그 아들은 아빠가 자신에게만 5백 원을 준 줄로 알았을 땐 그 5백 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는데, 누나에겐 천원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심통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누나가 받은 용돈과 자기가 받은 용돈을 비교하기 시작하자 심통이 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이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물질의 복이나 세상의 출세나 현세적인 것 때문에 속이 상하여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감사할 줄 모르고, 신앙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의 고난과 불행을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조언을 해 줍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그러면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내가 그들보다 더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고,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고난과 불행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말일 수는 있지만, 그의 삶을 행복으로 풍성하게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여 불행을 느끼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는 하지만, 늘 그의 인생이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여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건강치 못한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비교를 하게 되는 때에 순식간에 무너지지 때문입니다. 월세 사는 사람들을 비교하여 나는 전세에 사니까 감사하다, 괜찮다,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살다가 어느 날 가까이 지내던 이웃집이 집을 장만하여 그 집에 집들이를 갔다 올 때에 속으로 월세 사는 사람을 생각하며 “나는 전세에 사니까 감사하다, 괜찮다,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 수 없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비교와 경쟁으로 항상 나보다 못한 쪽만을 비교하여 내가 낫다고 위로하면서 살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셨는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왜 지셨는지, 십자가의 진리가 어떤 삶을 뜻하는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인정받고, 하나님께 높임을 받고, 성령 하나님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다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에게 찾아 오셔서 그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사명을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고, 내양을 먹여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젊었을 때는 어디든지 원하는 곳으로 다니겠지만, 네가 나이 들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제자 요한이 따르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궁금했던 것이지요. 요한이 어떻게 사명을 감당할지, 어떻게 죽을 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살려 두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남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대사 “너나 잘 하세요.”는 너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뜻은 아니지만,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네가 나를 위해 신앙 생활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너는 네가 할 도리를 다 해라.’입니다. 그저 자신의 신앙으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믿고, 섬기고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남들은 기도 안 하는 데 왜 나만 기도해야 하나요? 남들은 열심을 내지 않는데 왜 나만 열심을 내야 하나요? 남들은 섬기고 봉사하지 않는데 왜 나만 섬기고 봉사해야 하나요? 남들은 용서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데 왜 나만 용서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나요?”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의 정신 에너지와 영적인 에너지를 줄 줄 새게 하는 생각과 마음입니다. 교우 여러분, 다른 사람과의 비교할 때 마다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응답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다고 해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십자가 위에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겸손히 희생하시고, 낮아지실 데로 낮아지셨는데... 이렇게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묵상하면,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아등바등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괴로워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란 어떤 사람이 큰 자인지를 25절 이하에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식탁에 앉아서 식사대접을 받는 사람과 식사 시중을 드는 사람을 비교할 때, 식사 대접을 받는 사람이 큰 자라고 말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말하는 큰 자, 높은 자, 위대한 자가 아니라 천국에서 큰 자, 천국에서 높은 자, 하나님의 나라에서 대접받고 열두지파를 다스리는 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뒤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누구보다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앉아서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누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고 오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삶은 누가 크냐에 마음을 둔 사람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대에 뒤떨어진 삶의 자세이고, 처세술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는 무한경쟁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도는 그게 아니라고, 십자가에 담긴 용서와 사랑과 희생은 비교하고 경쟁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십자가는 겸손이고 섬김이고 희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비교하고 경쟁하고 높아지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힘이고,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힘이라고 하는 것에는 돈의 힘, 폭력의 힘, 권력의 힘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돈의 힘은 강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이 움직입니다. 돈 때문에 남을 위해 일도 합니다. 죽기 살기로 움직입니다. 폭력의 힘도 사람을 움직입니다. 주먹이 무서워서, 매가 무서워서, 어떤 외부적인 압력이 두려워서 할 수 없이 움직입니다. 권력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의 힘이 사람을 움직이고, 그 힘에 맞게 변화되게 합니다. 그런 권력의 맛 때문에 권력 맛을 본 사람들은 자꾸만 권력을 쥐려고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이 권력의 힘을 쥐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쥐고 있던 권력의 힘을 놓기 싫어서 정신병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힘에 의해 움직여진 마음은 쉽게 바뀌고 쉽게 배신합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힘은 사랑입니다. 섬기고 대접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을 계속 행하시어 백성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전쟁이나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 엎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천사들을 동원하여 로마 군대를 멸절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종으로 세상에 오셔서 섬기고 희생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나라 국민들이 현 나라 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국민을 섬기려 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왜 정치권들이 새롭게 뭔가를 하려고 난리입니까?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진심으로 섬기고 낮아져서 봉사하는 인물을 원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늦게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겉모양만 변화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국민들도 정신을 차려 잘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고, 본을 보이신 삶은 사랑으로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과 십자가를 묵상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야 하고, 십자가를 가슴에 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서서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하면서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투지는 안더라도 마음속에 비교와 경쟁으로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 하지는 않습니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곳에 정신 에너지, 영적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하십니까? 삶의 의욕과 활기가 넘치기를 원하십니까? 영적으로 메마르지 않고 완악해지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쉽게 낙심하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비교와 경쟁을 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비교와 경쟁을 버리고 겸손과 섬김과 사랑으로 몸도 마음도 영도 건강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3월 1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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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문들을 닫은 제자들
· 일시  2012년 04월 15일
· 말씀  요한복음 20장 19-2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내가 주님을 뵈었어요
· 일시  2012년 04월 08일
· 말씀  요한 20장 11-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 일시  2012년 04월 06일
· 말씀  베드로전서 1장 18~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침묵하신 예수님
· 일시  2012년 04월 01일
· 말씀  이사야 53장 7-9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모든 믿는 자에게
· 일시  2012년 05월 01일
· 말씀  로마서 1장 16-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를 참으사
· 일시  2012년 03월 18일
· 말씀  히브리서 12장 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누가 크냐?
· 일시  2012년 03월 11일
· 말씀  누가복음 22장 24-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일시  2012년 03월 04일
· 말씀  고린도전서 2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만약
· 일시  2012년 02월 26일
· 말씀  요한복음 11장 17-4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
· 일시  2012년 02월 19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넬료의 열심
· 일시  2012년 02월 12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24-3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넬료의 가정
· 일시  2012년 02월 05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가 경건하여
· 일시  2012년 01월 29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빛 (ii)
· 일시  2012년 01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 15장 14-16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빛 (i)
· 일시  2012년 01월 15일
· 말씀  마태복음 5장 14-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소금 (ii)
· 일시  2012년 01월 08일
· 말씀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소금 (i)
· 일시  2012년 01월 01일
· 말씀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빛이 있으라
· 일시  2011년 12월 31일
· 말씀  창세기 1장 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소통하러 오신 하나님
· 일시  2011년 12월 25일
· 말씀  마태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