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에베소서 6장 4절) |
백화점에서 한 아이가 예의 바르게 엄마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습니다. “어머님, 장난감 좀 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머니도 교양 있게 아이한테 존댓말을 썼습니다. “안 돼요. 오늘은 장난감을 사러 온 게 아니잖아요?” 아이가 떼를 쓰자 어머니가 아이를 달래면서 “엄마가 밖에서 이렇게 떼쓰면 집에 가서 어떻게 한 댔죠?” 그러자 아이가 대답하는 말, “죽인다고 하셨어요.” 그러더랍니다. 아이가 존댓말을 쓰도록 교육은 잘 했지만 대화 내용을 보니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 교육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 가운데 ‘나는 내 자녀들에게 완벽한 자녀교육을 시켰습니다. 부모로써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는 자신의 문제를 모르고 있는 착각속의 부모일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지금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이 모두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손주들을 본 분들이나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분들까지도 오늘 말씀을 새겨서 듣고, 오늘의 자녀 교육의 문제점과 성장세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앞 구절에는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자녀들이지만, 부모들이 자녀에게 가혹한 대우를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아비들아’라고 말씀한 것은 당시 아버지들이 가정교육의 책임을 지고 있었고, 가정에서 권위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아비들’이란 오늘날 가정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를 지칭하는 뜻입니다. “부모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결국 자녀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것은 자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자녀들은 신경질적이며 분노하게 됩니다. ‘노엽게 하다’는 말과 ‘분노’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녀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사랑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라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동안 부모의 관심과 사랑과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개나 소나 말은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고, 뛸 수도 있습니다. 어미에게 가서 젖을 찾아 먹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걸을 수도 없고, 엄마 젖도 찾아가서 못 먹습니다. 젖을 물려주어야 빨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돌봄을 요구하는 본능이 채워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런 애착의 단계가 해결되어야 다음 단계로 발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면 어른이 굶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뇌를 자극합니다. 그것이 아이의 무의식이 되고, 성격이 나빠지고, 부정적 정서로 뇌에 저장됩니다. 돌봄을 받지 못하면 마음에 분노를 쌓습니다. 이러한 분노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대들고, 반항하고, 소리 지르고, 정서 장애가 되고, 공부를 안 하고, 게임에 빠집니다. 어렸을 때 자신을 돌보지 않은 부모에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유아교육과 교수인 전성수 교수는 그의 책에서, 자신이 상담했던 학생 중에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겪고 있는 초등학생을 소개했습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공부하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교실을 돌아다니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귀신이나 외계인이 나오는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부모의 탓이 컸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사업을 핑계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더라도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거나 잠만 자곤 했습니다. 생활비도 전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돈을 벌어야 했고, 아이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켰습니다. 할머니는 아이를 거의 방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몇 년 후에 엄마가 다시 아이를 데려왔을 때 아이는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엄마 곁에 붙어서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조용히 있어야 할 때조차 말을 많이 하고 어른들끼리 말하는 자리에 끼어들어 엄마에게 말을 시켰습니다. 의자에 앉아서도 손과 발을 계속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을 쿡쿡 찌르곤 했으며 책 한 권 읽는 데도 전혀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 어머니 역할을 하지 못하면, 자녀는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월은 돌릴 수 없습니다. 자녀를 돌보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데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자녀는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이 단순한 애정 결핍이 아니라 충족되어야 할 사랑의 본능이 충족되지 않음으로 생기는 분노를 품게 됩니다. 사랑 받지 못한 스트레스가 평생을 괴롭히는 것으로 남습니다.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 두 번째 이유는 발달에 맞지 않는 공부 때문입니다. 아이는 사랑과 돌봄을 요구하는데 부모들은 그 요구를 무시하고 항상 뭔가를 빨리 가르치고자 합니다. 한글을 빨리 가르치려 하고 숫자를 빨리 알게 하려하고 영어를 빨리 가르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한글과 숫자와 영어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어가 뭔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사랑과 돌봄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한글이나 영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오직 그 부모가 어린아이 자신이 한글이나 영어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즉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한글이나 영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의 뇌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것이 됩니다. 아이의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아상이 부정적이 됩니다. 소아정신과에 이런 어린이 환자가 넘치고, 미술치료, 놀이치료 등 치료 대상 환자가 넘치고 있답니다.
전성수 교수는 이렇게 어렸을 때 스트레스를 받은 아이들이 분노가 쌓여 커서 부모를 공격하고 홧김에 부모를 죽이는 패륜을 행하는 사람이 된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자녀들이 “나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관심이 없어!” “아버지는 나만 미워해!”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부모님은 동생을 더 좋아하나 봐! 형을 더 좋아하나 봐!” “우리 부모는 날 낳은 것을 후회하나 봐!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이런 마음을 갖게 되거나 말을 한다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심한 잔소리, 편견, 혹평, 위압, 편애는 자녀를 노엽게 합니다. 자녀에게 상처가 되어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그 자신을 괴롭히고, 만나는 사람에게도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리어졌지만, 자녀 교육에 관한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녀교육에는 실패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했지만 자녀를 노엽게 습니다. 다윗은 부인을 여럿 두었습니다. 첫 부인은 사울 왕의 딸 미갈이며, 그 다음은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밧세바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머니가 다른 자녀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자녀 교육의 문제는 자녀들을 방관하고 훈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장에 보면 학깃이라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도니야가 왕이 되겠다고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열왕기 상 1장 6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도니야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는 말은 훈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녀들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가르치지 않았고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동생 다말을 범했을 때에도, 다윗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을 어긴 아들 암논에게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은 암논에게 적절한 징계를 내리지 않은 아버지 다윗에 대한 분노가 가득하였습니다. 압살롬은 2년 정도 기다렸다가 이복형 암논을 종들을 시켜서 처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압살롬은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3년 동안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안 요압은 압살롬을 다윗에게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에게 그 어떤 용서의 말이나 사랑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그는 다시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구태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대낮에 동침까지 합니다. 결국 압살롬은 다윗의 장수의 칼에 죽습니다. 다윗은 자식 셋을 먼저 보내고, 딸 하나는 이복오빠에게 성폭행 당하고, 자신의 후궁을 아들이 범하는 비참한 일을 겪습니다. 자녀교육의 실패로 인한 고통을 겪는 것이지요.
다윗은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바른 사랑이 아니고 그냥 다 받아주고 넘어가는 사랑이었습니다. 방관하고 징계가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린 왕 다윗은 왜 자녀들에게 는 그렇게 했을까요? 다윗은 왕이 되기 전까지 적어도 10년이란 세월 동안 사울 왕의 공격을 피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미갈과 결혼한 다윗은 도피생활 때에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등의 여인들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 시절 그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고, 가정의 행복을 자녀들과 함께 누릴 수 없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쫓기는 생활로, 왕이 된 후에는 나라를 다스리고 전쟁을 치르고 하는 바쁜 일들 때문에 자녀들과 따뜻한 사랑을 함께 나누고 표현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시간도 없었고, 여건도 어려웠고, 각각 자녀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기에는 자녀들이 많았고, 복잡했습니다. 다윗은 자녀들에게 미안했겠지요.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로써 자녀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훈계하고, 사랑으로 격려하고, 사랑으로 함께 하는 법을 알지 못했고, 행하지 못했습니다.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야단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유 없이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NIV에서는 ‘노엽게 하지 말고’를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녀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녀를 무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잔소리와 조롱으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1절에도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애정이 없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징계할 경우 자녀가 낙심하고 격노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징계를 하더라도 조롱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자존감을 무너뜨리거나 낙담시키는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행하는 징계의 목적은, 성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거나 낙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 양육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으로 징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윗의 자녀를 징계하지 않은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주위에 자신이 잘 해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미안하여 자녀들을 징계하는 것을 꺼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편부모나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없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이의 응석을 받아 주기 쉽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짧으므로 아이를 바로잡거나 벌하는 데 그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잘못된 사랑의 몇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완벽한 자녀을 원하는 사랑, 너는 공부만 해! 내가 다 해줄게 하는 과도한 허용의 사랑,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내 말대로 해, 다 너를 위한 거야- 권위적인 사랑,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하는 사랑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분노한 자녀들은 사탄과 세상에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탄에게 내주고, 세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자녀들에게 건강한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사랑의 마음과 지켜주는 눈과 들어주는 귀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1시간은 커녕 40분도 채 안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아니 먹고 살기도 바쁜데 자녀들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늘릴 수 있습니까? 밤늦게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엄마인 나는 집 안 살림 하느라 정신없는데요. 아빠인 나는 직장 일에 지쳐서 자녀들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그렇게 직장일로, 맞벌이 일로 바쁘고 힘들게 일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물론 가족을 위해서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가족이 행복을 누려야하는 시간을 무조건 유보해 놓고, ‘내가 이렇게 바쁘게 직장생활하고 돈을 버는 이유는 우리 가족이 나중에 잘 살기 위해서야!’라고 말하겠지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고 그때가 되어서 자녀들하고 잘 지내려고 하면 어색하고, 대화의 공통주제가 없고, 부딪히고, 섭섭하고, 소통이 안 되는 관계가 됩니다. ‘그때는 아빠가, 엄마가 가정을 살리느라 바빠서 너희들이랑 함께 하지 못했다.’라고 말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 그들의 성격, 마음, 정신 자세, 생활습관, 신앙의 중심이 다 형성이 되어서 나중에 고치려면 힘이 듭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자녀가 친밀해야 나중에도 친밀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친밀한 것이 아닙니다. 친밀하게 지내는 가족이어야 친밀한 가족입니다.
김정운 교수가 쓴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에는 남자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자신의 만년필, 이어령 교수의 책상, 차범근 축구감독의 계란받침대, 안성기 씨의 스케치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영복 교수는 벼루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는 신영복 교수는 어린 시절 한학자인 할아버지의 사랑방에 불려가서 붓글씨를 배웠답니다. 할아버지는 소일 삼아 손자에게 명심보감, 천자문도 가르쳤고, 먹을 갈게 하며 붓글씨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한 글쓰기 놀이는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는 문화학습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어릴 때의 문화적 경험은 향후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 경험이 다양한 상징을 통해 내면화되어 개인의 행동방식과 사고 패턴을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달력이라도 집에서 ‘명화달력’을 보고 자란 아이와 소주광고 비키니 달력을 보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문화적 관심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어린 시절 보고 들으며 자란 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하는 문화학습은 아주 중요해서 도덕적 규범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난생처음 흑인을 본 아이는 어머니의 표정을 살핍니다. 어머니가 당황해하거나 어색해하면 아이의 반응도 똑같아집니다. 불안해하며 울거나 어머니에게 안깁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면 아이의 반응도 지극히 편안해집니다. 이렇게 부모의 행동양식, 습관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한 문화적 경험이 자녀들의 발달 심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부모가 자녀들의 어린 시절 어떤 문화를 경험하게 하느냐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육을 하라,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적 문화속에서 신앙적인 경험을 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 속에는 격려와 칭찬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인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꾸짖으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여 주시고, 사랑으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그의 주석에서, ‘기독교 양육의 핵심(심장)은 아이의 심장을 그의 구주의 심장에로 데려가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대인의 밥상머리 교육, 유대인의 베갯머리 교육을 교육학자들이 소개하며 강조합니다. 그들은 밥상머리에서 잔소리가 아닌 대화를 통해서, 신앙적인 의식을 통해서
가정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은 곧 기독교적 문화, 기독교적인 교육, 신앙적인 경험을 함께 하며 양육하는 노력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에로 데려가는 교육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에게 성경을 읽어 줍니까? 성경을 읽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신앙의 위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자녀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까? 자녀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교회에 소속된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자녀들이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사랑하고, 훈계하고 격려하며 양육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양육하고 있습니까? 소금과 빛의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나누고 구제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까?
강아지와 같이 애완동물들 키우는 데도 이것저것 배우고 잘 키우려고 하면서, 백년대계라고 하는 사람을 키우는 일에, 너무도 무책임하게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장세대를 노엽게 하는 어른은 아닌지,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여 분노를 키워주고 있는 기성세대는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포장된 욕심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방관으로 자녀를 망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 봐야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은 자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노엽게 하지 않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여 진정으로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자녀로 자라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사랑의 마음과 지켜주는 눈과 들어주는 귀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매, 사랑의 훈계도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에게, 기성세대 여러분, 어른 여러분! 성장세대에게 관심과 돌봄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적 문화 경험으로 바른 양육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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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4월 29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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