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교회처럼 (사도행전 13장 1-3절) |
어떤 목사님이 다른 도시에 왔다가 아는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반가워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신앙생활은 어떠세요? 섬기시는 교회는 평안하구요?” 집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다니는 교회가 문제가 많아 믿음이 잘 생기지 않고, 교회 다니기가 점점 싫어지는데 맘에 쏙 드는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교회에 나가면 신앙생활을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목사님이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이구, 집사님 두, 세상에 그런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만일 그런 교회가 있더라도 집사님은 그 교회에 가면 안 됩니다.” “아니, 왜요? ... 왜 제가 그 교회 가면 안 되지요?”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교회만이라도 완벽한 교회로 남아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집사님이 그 교회에 나가면, 그 집사님 때문에 완벽한 교회가 완벽이 깨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좋은 교회는 있지만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건강한 교회는 있지만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좋은 교회란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건강한 교회란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교회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안디옥 교회가 좋은 교회였고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오늘은 교회창립 59주년이 되는 교회창립기념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벌써 59살이 되었습니다. 교회창립기념주일 아침에 우리는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좋은 교회, 문제가 없었던 교회는 아니었지만 건강한 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우리 교회의 모습을 점검하고 본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가 있었던 안디옥이라는 도시는 헬레니즘 문화가 번영하고, 그리스 문화적인 중심지였습니다. 안디옥의 크기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보다 세 배쯤 컸습니다. 이 도시는 동양으로 가는 주 도로 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인구는 50만 명 정도였습니다. 안디옥은 매우 커다란 상업의 중심지였고, 도박과 승마시합, 전차 경기 들이 진행되는 곳이었습니다. 다프네 신전에서는 매춘이 성행하였습니다. 안디옥은 안락하고 태만한 삶을 누리는 도시였으며, 특히 부유하고 물질적인 미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으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도시로 들어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죄악이 가득한 도시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안디옥교회 교인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흘러나오고, 형식이 아닌 진심으로 복음을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 26절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최초로 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장소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던 유대인의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인의 도시 안디옥에 있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내적인 성장과 외적인 성장의 균형을 이루며 성장하였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 대표 교회라면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대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되어졌고, 그들은 이미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졌고, 구약의 율법에도 정통하지 않아 오히려 우리에게 더 친근하고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첫째로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인간 퀼트 교회라고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퀼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각각 다른 무늬와 색상의 조각 천들을 이어 퀼팅(누빔)하여 완성된 작품을 만듭니다. 보잘것없는 자투리 천들이 서로 어울려져 가방, 의류, 침구류 등 생활에서 바로 사용 가능한 작품을 만듭니다. 아주 실용적이고도 매력적인 작업이기도 합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천들을 바느질 하여 작품을 만듭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말씀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선지자였고, 교사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정통 유대인으로서 안디옥 교회의 최초의 지도자입니다. 시므온은 니게르라 하는 라틴어 별명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검은 피부색 때문에 붙여진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구레네 시몬과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론이 있지만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시므온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중에서도 흑인들을 더 싫어했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노예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아마도 안디옥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구레네 출신의 전도자였을 것입니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디바를 말합니다. 젖동생이란 한 유모 밑에서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마나엔은 헤롯 왕궁에서 자란 특권층의 사람입니다. 사울은 한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열심히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바나바의 권유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이 다섯 사람은 인종이 달랐고, 살아온 문화와 배경이 다릅니다. 종교적 배경도 다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정통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흑인도 있고 귀족도 있고 노예도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도 있고, 그들은 기술, 나이, 외모, 인격,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각각 달랐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런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 신분과 신앙 경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이 서로 하나 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지도자들이 하나 되는 모범을 보이니까 교인들은 지도자를 따라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부부가 하나 될 때 자녀가 하나 되고, 가족이 하나 됩니다. 교회는 지도자들이 하나 될 때 교회가 하나 됩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인종이 달랐고 문화가 달랐고 언어가 달랐지만,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들 사이에 공통적인 실마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깊은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 가운데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를 읽다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참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고, 그 문제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의 권면도 있고,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책망하기도 한 말씀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제해결의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늘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문제를 풀라고 말씀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상관없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사도들의 교훈과 신도들의 생활이 온전히 그리스도 중심이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의식하면서 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들을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 크리스천, 예수 믿는 사람, 예수쟁이, 교회 다니는 사람,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타락한 때가 어떤 때였느냐 하면, 교회 안에서 인간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앞서고 어느 개인의 공적이 그리스도의 공적보다 앞선 때입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적인 조건이나 배경, 출신, 신분, 세상적인 업적과 개인의 명성이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앞 설 때 교회는 잡음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고 타락하여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도, 장로도, 중직자도, 어느 교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이 앞서기 시작하면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 일반 단체보다 못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사를 포함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또한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으면 사람의 욕심과 뜻에 교회가 휘둘리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하는 존재는 막 되먹은 종이든지, 주인의 것을 탐내는 도둑밖에 더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 중심으로 우리 모두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하나 됨을 힘써 지키기를 바랍니다. ·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건강하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건강한 몸이라는 말은 병이 한 번도 안 걸리는 몸을 말하는 것일까요? 병이 한 번이라도 걸리면 건강한 몸이 아닐까요? 이번, 우리교회 성지답사팀이 다녀온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은 몹시 날씨가 더운 기간이었습니다. 40도를 훨씬 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 들어가면 살만 했고, 바람이 불어주면 그늘 아래에서는 시원했습니다. 날씨가 덥다 보니 시원한 물을 자주 마셔야 했고, 이동 버스는 에어콘을 항상 틀어놓았습니다. 음식도 바뀌고 장시간 비행으로 처음 시작부터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배탈이 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건강한 사람은 배탈이 났을 때, 약을 먹고 음식을 조심하니까 오래 가지 않아 나았습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속히 회복이 안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같이 갔던 다른 교회 집사님이 그랬습니다. 건강치 못했던 것이지요. 건강이란 그런 것입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고, 활동력이 있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건강이란 회복 능력을 말합니다. 문제 해결 능력을 말합니다. 건강한 교회란 문제가 안 생기면 좋겠지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생긴 문제를 잘 해결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강치 못한 교회는 생겨난 문제를 더 큰 문제로 만드는 교회입니다. 우리 몸의 건강도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은 병이 하나 생기면 합병증이 생기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또 실제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여 해야 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2, 23, 24절,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건강한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또 그들은 말씀과 기도와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있어 열매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안디옥 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였습니다. 13장 2, 3절에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기도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안디옥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신앙 자세이며, 신앙의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함께 영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몸은 내가 잘 먹고 잘 관리하고 운동하면 됩니다. 물론 그 외의 변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몸의 건강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의 건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건강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이 바로 서야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각 개인의 건강한 신앙을 만들어 주시고,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서로를 세워주는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라는 인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든지 자기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로 보나 신앙의 연조로 보나 자기보다 아래인 사울이 머지않아 자기보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큰 인물이 될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그것을 알고 사울을 찾아가서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 하자고 청해 왔다는 것은 바나바의 인격이 위대했습니다. 바나바는 누가 높은 명성을 얻느냐, 누가 인기가 좋아지느냐, 누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더 받느냐에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퍼져서 구원 얻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울이 바울이라는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세워주었습니다.
마나엔은 헤롯 궁의 귀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인물이 어떤 단체나 공동체에 오면 야단법석이 일어납니다. 또 본인도 그런 대우를 받기를 기대합니다. 귀족이 교회에 나왔다고 특별대우를 해 주는 일이 있든지, 본인도 자신을 알아서 대우해 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거나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나엔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안디옥 교회 교인들도 그를 특별대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죄인이요, 동일하게 은혜 받아 구원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함께 세워져 갔습니다. 사실 이런 자세와 모습이 진정으로 서로를 세워주는 모습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으로 신앙이 자라고 복음적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특별대우를 받게 되면, 특별대우가 감사하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특별대우를 받는 것만을 기대를 하기 때문에 겸손한 신앙, 진실 된 신앙과 자율적인 신앙이 생기지 않습니다. 결국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겸손과 진실과 스스로 갈망하는 신앙의 자세가 없기 때문에, 그런 교인들은 조금만 섭섭하다고 느껴지면 신앙생활이 흔들리거나 신앙생활을 관두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배우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 교회는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서로 다른 출신과 배경과 사회적 위치와 인종적인 다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잘 품고 서로 세워주고 함께 성장 발전하는 교회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명자로 세워주는 교회였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항상 배우는 자세로,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습니다.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주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살리는 사람이지 상처주고 넘어뜨리고 죽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우리 몸의 심장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와 희생을 알지 못하고 잊고 산다면 심장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십자가 정신으로, 십자가의 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 때, 거기에서 생명이 살아나고, 생명이 자라게 되고, 생명을 세워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번 성지답사 중 요르단을 갔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 건너편에 있는 마지막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던 느보산을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르단에 간 기회에 몇몇 역사적인 장소와 유물들도 보았습니다. 그중 카락성에 갔었습니다. 십자군 성채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모압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지금은 요르단에 있습니다. 사해 바다를 중심으로 남동쪽 아래로 있습니다. 그 십자군 성채를 보니 얼마나 견고하게 지었는지, 성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방팔방으로 모든 적들을 훤히 관찰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철옹성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군은 나중에 지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패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십자군 전쟁은 십자가를 내세운 전쟁이었지만, 십자가의 정신은 없었던 전쟁이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노략질을 했습니다. 그들의 옷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십자군 전쟁의 결과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더했고, 살라딘에 의해 십자군이 패망하면서 오늘날까지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도와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면 복음의 능력도 잃게 되고, 생명력도 잃게 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십자가의 도를 잃어버리고, 십자가의 용서,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가 식어버리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됩니다. 불 커진 등잔이 됩니다. 세상 속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심장을 잃어버린 몸처럼 신앙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관계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냥 종교인일 뿐입니다. 교우 여러분,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씻음 받아 정결케 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를 멀리하며 살아가고, 십자가의 사랑을 공급받아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며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희망을 주며,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십자가 정신으로 서로 세워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세워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현삼 목사님의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제가 물으면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묻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얼굴도 보기 싫고 만나기도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를 옮기고 싶습니까?”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습니까?”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으로 서로 세워주며 사랑을 행하는 교회가 되어 안디옥 교회처럼 건강한 교회,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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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7월 0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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