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따르는 사람 (요한복음 8장 12절) |
현대인의 정신 질환 중 심각한 것이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증상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을 치료하려면 하루에 적어도 30분 이상 햇빛을 쬐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는 빛이 필요합니다.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하고, 혼돈과 갈등과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우울함과 허무와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그런 현상을 어둠의 권세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둠의 권세는 오늘도 사람들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든지, 어둠이 드리워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3장 20, 21절에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싫어한다면 어둠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어떤 행위가 드러날까 뭔가 자꾸 숨기려 한다면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인생을 걸고 있다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일, 육신의 일만 보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5절 하반절에,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 9-11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둠이 눈을 가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1절에는 어둠의 일은 열매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며, 불안을 느끼고, 무의미하고, 허무를 느끼면서 살고 있다면 어둠 속에서 아직 나오지 못하여 어둠의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직 어둠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까? 그래서 삶이 아직 혼돈스럽고 무질서합니까? 어둠이 마음속에 밀려들어와 마음이 평안치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어둠의 생각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어지럽힙니까?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서 넘어지거나 거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빛을 풍성히 주어 빛 속에서 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드러납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는 어둠이 어둠인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빛이 비치니까 어둠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빛과 비교하여 어둠이 폭로됩니다.
사람들은 그냥 살아갑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며 살아갑니다. 남들이 유치원 가면 따라서 유치원 가고, 남들이 학원가고, 뭘 배운다고 하면 따라서 배우고, 남들이 이런 저런 옷이 유행이라고 입고 다니면 따라서 입고, 남들이 취직하면 취직하고, 남들이 연애하여 결혼하면 똑같이 그렇게 결혼하고, 애 낳으면 똑같이 낳고, 애 학교 보내고, 애 때문에 학교에 좇아다니고 ....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떠밀리듯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빛이 비쳐지면, 우리는 어둠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둠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빛이 비추면 어둠 속에 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얼마나 얼룩지고 더렵혀져 있는지,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던 발걸음, 무질서하고 혼돈스럽게 널려져 있는 물건들, 혼란스러웠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서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면, 우리의 부족과 허물과 죄가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갈릴리 바다에서 만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자신이 잘못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의 말씀이 어떤 사건과 내용의 말씀인지 아십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다 끌어다 놓고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라고 말할 겁니까?”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들으시고 몸을 굽히시더니 땅에다 뭐라고 쓰십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돌을 들고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모였던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노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피하여 가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있는 돌을 들추어내면 그 돌 아래 있던 벌레들이 여기저기로 도망을 갑니다. 그곳에 빛이 비추어지니까 어둡고 습한 곳에 있던 벌레들이 당황하고 그곳을 피하여 도망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시니까 돌을 들고 모였던 어둠의 모습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들은 빛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빛 앞에서 죄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추구하는 성공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그러므로 빛을 따르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사람,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 그 빛이 어둠을 몰아내 주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떤 길로 인생길을 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인생을 가치 있게 하고, 무엇이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무엇이 인생을 영생의 길로 갈 수 있게 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감각만을 만족시키는 것이 행복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것이 진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빛이 갑자기 내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난 생애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니 어둠 속에 있던 자신에게 어둠이 물러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살면서 ‘이게 아닌데...’하면서 살다가 빛을 만나니 눈이 떠진 것 같았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어둠이 우리를 둘러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둠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어둠이 우리를 장악하려고 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면 우리의 마음은 어둠의 생각을 하게 되고, 어둠의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빛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주로 모셔야 합니다. 빛이 우리 안에 비추도록 해야 합니다. 빛이 우리를 비추면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빛이 비추어진 우리 마음은 빛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어둠이 물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빛을 좋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빛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어둠을 멀리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빛이 꺼지지 않는 한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빛납니다. 빛은 희망입니다. 어둠은 절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몇 주 전에 어느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과의 대화중에 제게 크게 힘이 되고 은혜가 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직장 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은 ‘그래도 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는 말이, 교회에 와서도 수채 구멍만 들여다보면 수채 구멍만 보고 집에 가지만, 교인들 중에 신앙생활 열심히 잘 하는 분들, 부부가 신앙 안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분들, 순수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래도 교회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도 어두운 모습이 있습니다. 더러운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못마땅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은 세상보다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면 교회를 다 본 것이 아닙니다. 볼 것을 제대로 다 본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빛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고, 빛을 따라 살려고 하고,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기에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 희망을 버리면 어디에서 세상의 희망을 보겠습니까? 우리가 이 희망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어디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절망을 보고 싶습니까? 희망을 보고 싶습니까?
두 사람의 죄수가 감방에 갇혀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눈높이 석자 위에 있는 자그마한 창문 하나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창문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긴 날이 지난 뒤, 한 사람은 절망에 지쳐 쓰러졌고, 한 사람은 새 희망을 안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두 갇힌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왜 한 사람은 절망으로 쓰러졌고, 한 사람은 새 희망을 안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한 사람은 내가 죄수라는 엄연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차가운 쇠창살을 늘 보고 지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소름끼치는 창살인지... 절망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깊어져 갔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창살 저 너머로 보이는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는 소망의 푸른빛이 항상 비치고 있었고, 밤에는 별들이 반짝였습니다. 같은 창문 안 감방 안에 살았지만 한 사람은 쇠창살만 보고 절망만을 보았고, 한 사람은 창살 너머 하늘을 보며 희망을 보았습니다. 절망만 보느냐? 희망을 보느냐? 어둠만을 보느냐? 빛을 보면서 사느냐? 여러분은 무엇을 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가 우리나라에 방영되면서 많은 이들이 즐겨 보고 있습니다. 이에 이어 여러 가지 수사 드라마들이 줄을 이어 방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드라마들의 내용 중에 등장하는 범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범인들은 자신들이 범인이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겪은 상처, 충격, 억울함, 사회에 대한 반항 등등 그런 그들이 술, 마약, 섹스, 폭력, 범죄를 선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악을 행하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여 범죄자가 되어 결국 과학수사대의 수사로 잡혀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사관들도 그 범인들이 겪은 일들을 겪은 수사관들이 많았습니다. 그 수사관들이 범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도 그런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었지만 자신들은 당신처럼 악을 행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어둠의 길을 선택하느냐? 빛의 길을 선택하느냐? 악을 선택하느냐? 선을 선택하느냐? 죽음 길을 선택하느냐? 생명의 길을 선택하느냐? 부정적인 것을 선택하느냐?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느냐? 결정적인 갈림길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빛을 따르는 것은 희망을 붙잡는 것입니다. 생명을 붙잡는 것이고, 선을 붙잡는 것이고, 긍정의 생각을 붙잡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희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희망을 붙잡지 않으면 어둠 속에 머물게 되고, 혼돈, 무질서, 방향 상실, 낙심, 절망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죽음입니다.
탤런트인 이광기씨는 2009년 11월 8일에 신종플루에 의해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가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 석규는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생명을 살려냈습니다. 석규의 죽음을 계기로 신종플루의 치료약인 타미플루를 처방받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타미플루는 신종플루 의심 환자가 여러 검사를 거쳐야만 처방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타미플루는 신속하게 처방받을 수 있게 되었고, 신종플루로 인한 사망은 급격히 줄었습니다. 주변에서 이광기씨에게 “석규가 다른 아이들을 살려냈다”는 말을 건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원망만 가득했습니다. “왜 그게 내 아들이어야 하는데? 왜?” 하며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하도 울어서 실신 상태가 되어 있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나도 살아서 뭘 하나.’ 하는 생각에 조용히 아파트 비상계단으로 갔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싫더랍니다. 10층이었는데, 떨어져도 안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마의 유혹인 것이죠. 그런데 그 순간 하늘을 보게 됐답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담긴 기도를 하게 되었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었구나. 내가 잠시 잠깐 관리한 거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답니다. 아들 잃은 슬픔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과 더불어 많은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광기씨는 요즘도 죽은 아들 석규가 나오는 꿈을 꾼답니다. 꿈속에서 아들은 언제나 사랑스럽게 웃고 있고, 아빠의 얼굴을 만져준답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는 일이 전에 보다 줄었습니다. 집에는 아직 아들의 키를 재던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 아들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나올 때도 아내에게 “울지 말고 이런 과정을 즐기자”고 말합니다. 아들의 존재와 부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살자는 마음이지요. 그리고 이광기씨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지역 어린이들을 후원하며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활동해왔고, 2010년부터는 아이티를 찾아 봉사활동을 펼치며 학교 건립에 힘쓰고 있습니다. “우연히 해외 봉사를 가서 석규 또래의 아이를 안았는데, 그 아이가 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로 석규와 동갑인 아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죠. 배고프고 아픈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았는데 이 아이들은 누가 위로해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후 부부는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으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인공수정을 권했지만, 이미 딸이 있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부부는 아이가 생길 거라고 믿고 기도했다가 소식이 없자 회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제가 욕심을 부렸네요. 제 아이를 거두어 가시는 대신 수많은 후원할 아이들을 주셨는데 감사한 마음을 버리고 또 다른 생명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했답니다. 그러다 자선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그 기간에 아이가 생겼답니다. 부인 박지영 씨는 아이를 어렵게 가진 만큼이나 금년 1월 12일에 어렵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전치태반으로 수술로 출산할 수밖에 없어 수술을 하면서 목숨이 위급한 상황까지 다다랐습니다. 수술 중 42 봉지나 되는 피를 수혈 받았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살아난 것이 기적입니다.
그는 올 하반기부터는 새로운 방식의 기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자선 경매의 수익금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고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 달에 3만 원이면 점심 한 번 안 먹고, 술 한 잔 안마시면 낼 수 있는 돈이잖아요. 그 돈으로 아이는 학교에 다니고 치료를 받을 수 있어요. 그 아이의 삶을 보면, 내가 기부한 금액 이상의 가치를 느끼게 돼요. 바늘구멍 하나로 들어오는 빛이 방 안을 밝힐 수도 있어요. 결국 작은 실천을 통해서 세상이 밝아지는 거예요.”
그룹 록밴드 부활에서 활동하는 가수 김 태원씨는 이 광기씨하고 아주 친 하다고 합니다.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이 만약 신앙을 갖게 되면 이 광기씨가 믿는 신앙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탤런트 이 광기씨는 빛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어둠속에 던져서 그 속에서 사탄의 속삭임과 죽음의 소리를 들었지만 빛을 따라 아들을 잃는 슬픔과 절망의 어둠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빛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빛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딛고 설 반석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등불입니다. 따라가야 할 빛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준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의 삶에서 빛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빛을 선택했습니다. 비록 그가 어둠 가운데 있는 것 같을지라도, 어둠에 휩싸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지라도 빛을 향해 돌아섰고, 빛을 향해 걸어갔고, 빛의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어둠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하나님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십니다’(시편 27편 1절)라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빛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시편 119편 105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어둠의 생각들을 몰아냅니다. 가야 할 길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소리, 긍정의 소리, 희망의 소리를 자꾸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긍정의 말씀입니다. 희망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살리는 말씀입니다. 빛의 소리입니다. 부정의 소리는 어둠의 소리입니다. 사탄의 소리입니다. 죽음의 말입니다. 죽이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길에 빛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면 진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진리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오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충만히 모시기 위하여 늘 간구해야 합니다.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감정과 의지만으로는 마음속에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충만히 거하시면, 어둠은 자연히 몰아내집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빛을 찾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여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빛을 따라 지속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빛은 구원입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빛은 희망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어두운 생각을 내어드리고, 빛을 따라 희망을 붙잡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2012년 09월 02일
신문수 목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