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장 1~14절) |
지난 15일 서울 외발산동 버스 차고지에 주차되어 있던 시내버스 38대가 완전 불에 타버렸습니다. 재산 피해 15억원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화재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차고지 안의 부주의로 불이 났던지, 아니면 누가 불을 질렀던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화재 범인이 밝혀졌습니다. 전직 버스 운전기사 황 모씨가 불을 질렀습니다. 그가 불을 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지난해 무단 횡단을 하던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사고로 해고되었고, 해고 과정에서 회사 측과 갈등이 있어 불만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복직을 요구했지만 회사가 받아들여주지 않자 방화를 한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으면 그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면,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다면 분명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한, 다시 부부싸움은 일어날 것입니다. 또 다시 가정불화가 생기지 않으려면, 그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해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불화가 생겼습니다. 조용하던 가정, 화평하던 가정에 분란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어떤 불화냐 하면, 하갈이라는 사래의 여종이 자신의 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여종이 감히 주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주인 사래는 여종 하갈을 학대합니다. 하갈을 못 살게 구는 것이지요. 그전에는 하갈을 학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갈은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학대를 당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마도 매일 큰 소리가 나고, 울음소리가 나고, 집안 분위기가 썰렁하다 못해 가시 방석에 앉은 것 같은 나날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래는 아브람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내가 하갈에게 당하는 모욕은 당신이 당할 모욕이라고, 당신이 책임지라’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왜 이런 가정불화가 생겼을까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날 당시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고, 가나안 땅에 온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아브람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고령이 된 부부는 약속의 자녀에 대해 여러 번 의논했겠지요. 인간적인 조바심 때문에 그들은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성행하던 문화적 관습을 채택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브람의 자녀를 갖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아무런 반대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에 하와가 선악과를 아담에게 건네 줄 때 아무런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받아먹은 사건이 연상됩니다. 그렇게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주인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단 번에 아이를 가졌는데, ‘사래 당신은 뭐 한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래를 우습게 본 것입니다. 이에 사래가 참을 수 없어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의 가정은 큰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사래와 하갈의 갈등은 아브람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평온하던 가정에 순식간에 불화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하갈에게 있어서 아브람과의 동침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거부 아브람의 첫 번째 첩이 된다는 것은 사래의 노예였던 자신에게 상당한 신분 상승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장막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주인 사래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하갈의 임신 소식은 곧 바로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사래는 여종 하갈이 자신의 남편의 아이를 갖은 후에도 자신에게 고분고분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학대를 받게 된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결국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사래는 자신이 겪고 있는 수치가 하나님의 약속과 그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로 생겨난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불신앙과 인간적인 방법과 계획, 그리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하여 믿음의 가정에 고통과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사래는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방법으로, 당시 문화적 관습의 방법으로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람도 그 계획과 방법에 동조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면 잘 될 것 같았지만, 아브람과 사래의 가정에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엉켰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복잡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래의 판단과 계획, 그리고 그가 한 말, 그리고 하갈에 대한 행동을 보면 사래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신앙에 어긋났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학대만 하면 하갈이 고분고분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사래의 기준으로 보면 하갈이 학대 받아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남편 아브람이 섭섭하고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또 하갈도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억울하다고 할 것입니다. 아브람도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아내가 못 마땅할 수도 있습니다. 사래와 하갈과 아브람은 모두 문제의 원인이 내가 아닌 바로 너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보면 자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스티븐 룽구가 쓴 [예수를 업고 가는 아프리카 당나귀]에 한 흑인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그 흑인 소년은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백인들이 사는 집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나온 음식을 먹고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인 선교사 부인이 그 아이에게 청소부 일을 시켰습니다. 흑인 소년이 볼 때 선교사의 집에는 청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살던 움막에 비해 너무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금만 치우고 하루 종일 놀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며칠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기준으로는 깨끗하게 청소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으로 보면 내가 맞는 것 같을 수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만 보면 내가 틀리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 뜻대로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삶입니다.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맞추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나에게 끌어다 맞추려고 하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기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산다고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내 방법으로 행하고서는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신다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자기 뜻대로, 자기 방법대로, 자기 욕심대로 살면서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일, 신앙생활, 가정생활에서 문제가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불편한 관계가 생기면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은 아닌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내 방법대로 해서 생긴 일은 아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내가 품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벌인 일 때문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해결해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본문 말씀은 광야로 도망친 하갈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갈의 이름의 뜻은 ‘도망’입니다. 도망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하갈이 아브람의 집에서부터 광야로 도망하였습니다. 본문 1절에 그가 애굽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아브람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바로 왕에게 선물 받은 여종으로 추정됩니다. 도망할 때 하갈은 임신 상태입니다. 그런 그가 아무것도 없이 광야로 나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갈은 무작정 도망친 것입니다. 앞뒤 생각없이 사래를 멸시했고, 앞뒤 생각없이 학대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그런 하갈에게도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호칭을 통하여 하갈이 여전히 사래의 여종이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래를 통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가 상속자가 되며, 그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많아 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만을 생각한다면,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생긴 생명, 즉 아브라함과 사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를 하나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갈이 임신하자마자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을 보시고, 하갈을 향해 하나님께서 꾸짖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까불더니 잘 됐다고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천사가 아브람과 사래의 집에서 도망하여 광야 샘 곁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 하갈을 찾아왔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창세기 3장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죄를 짓고 숲으로 도망하여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던 하나님이 연상됩니다. 하갈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두 사건 모두 하나님께서 실망과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셔서 새로운 위로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통한 자손창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갈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사래와 함께 살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기 전까지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가서 사래에게 복종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주시면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1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심’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의미입니다. 광야에서 고통속에서 부르짖는 하갈의 호소를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마엘! 하갈은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자신을 학대했던 사래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학대받을 것을 감수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 다음 15절에 보면,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시 아브람과 사라에게로 돌아갔고, 추측컨대, 아브람과 사래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광야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그분의 말씀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이 됩니다.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가 정하는 법인데 아브람은 여종 하갈이 가출했다가 들어와서 하는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람은 하갈의 광야의 경험을 들었고, 여호와의 사자의 지시에 순종한 것입니다. 아마 사래도 하갈의 경험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람도, 사래도 하갈의 말에 대해 무슨 헛소리냐고, 어디서 이상한 말을 꾸며 수작을 부리냐고 말하지 않고 하갈의 경험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하갈의 신앙 경험을 통해 아마도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던 것도 상당히 완화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의 지시에 순종하여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가 사래에게 복종했고, 아브람도 여호와의 사자의 지시에 순종하여 아들의 이름을 정했고, 사래까지 그 지시에 따라 태도 변화가 있었다면 아브람의 가정의 풍랑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함으로 우선 해결된 셈입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최선의 해결을 얻습니다. 각자 자기 입장만, 자기 기준만 고집하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가정에 평화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개입하신 결과입니다. 사람이 망쳐 놓은 관계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어 지극히 작은이가 되어 버린 불쌍한 하갈을 살피셨습니다. 사래와 아브람도 실수하였지만 하갈도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갈을 살펴주십니다. 망가진 것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갈은 나중에 아들이 태어난 뒤,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를 때마다 자신의 고통을 들어주신 하나님, 자신의 신음소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들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고, 우리가 어리석고, 우리가 연약하고, 우리가 부족하고, 우리가 한심해도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음송 “주만 바라볼찌라”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14절에 하갈은 자신의 고통을 들어주신 하나님을 만난 곳, 그 옆에 있는 샘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브엘라해로이’ 본래 발음은 ‘베에르 라하이 로이’입니다. ‘베엘’은 우물을 말하고, ‘하이’는 ‘살아있는, 활력적인, 신선한’이라는 뜻이고, ‘로이’는 ‘나를 살펴보심, 감찰하심, 지켜보심’이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나를 살펴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 ‘나를 지켜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도망가던 여종 하갈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것을 하갈은 배웠습니다. 여주인 사래로부터 도망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엘 로이(El Roi)’ 즉 살펴보시는 하나님, 지켜보시는 하나님, 선과 악을 감찰하시며 모든 곳을 보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으며, 무엇을 빠뜨렸는지를 다 아십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어떤 단추를 잘못 끼었는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피하려고 도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도망할 수도 없습니다. 시편 139편 7절-10절 말씀,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피해 도망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도망하여 숨을 곳도 한군데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숨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고 누가복음 12장 2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속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39편 1절 이하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내가 앉고 일어서고 눕는 것, 나의 생각, 나의 혀의 말, 모든 행위를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속인다고 속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통찰하십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만드실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계획을 담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교도소 교도관의 눈으로 우리를 감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처럼 죄를 찾아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농장에서 노예들을 부리기 위해 관리하던 작업반장과 같이 채찍을 휘두르며 학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가장 깊은 것까지도 통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가운데 삶의 밑바닥에서 낙심할 때에도 나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매히 당하는 고난과 헤어 나올 수 없는 곤고함에 처했을 때에도 살펴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보면, 고통 받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 비탄에 빠진 사람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한숨, 그들의 탄식, 그들의 노래, 그들의 부르짖음, 그들의 간구를 대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그야말로 작은 자들의 형편을 들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흰 지팡이를 손에 쥐어 주면서,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까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고,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버스 타고 다니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어느 날 버스에 올라 탄 부인에게 버스 운전기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줌마는 복도 많습니다.” “왜요?” 무슨 말 뜻인지 시각장애 입은 부인은 되 물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대답하는 말이,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그런 남편은 못 봤어요.” 이 말은 들은 부인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남편은 아내가 혼자 할 수 있도록 손잡고 다니던 일을 그만 했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매일 잡고 다니던 손이 없어지니까 남편이 옆에 없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도 남편은 아내를 혼자 내 보낸 적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내는 볼 수가 없으니까 남편이 자신을 내팽개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내팽개쳤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나를 살피시지 않으신다고 불평한 적은 없습니까? 나를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애굽에서 데리고 온 여종 하갈과 같은 사람도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하반절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그의 생각]이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함께 동영상을 따라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1절,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 2절,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이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너와 같이 있고 싶어하신단다 /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광야에서도 폭풍 중에도 /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단다 /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교우 여러분, 이 찬송 가사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하갈을 고통을 들으시고 살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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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2월 03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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